내가 읽은 시

류시화 <나비>

미송 2022. 4. 18. 12:35

 

 

나비 / 류시화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지구에 달맞이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이제 막 동그라미를 그려낸 어린 해바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그리움 때문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

 

파도가 바다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너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나비의 그 날개짓 때문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내 그리움 때문

 

 

가수 김종환이 불렀던 존재의 이유 ‘니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니가 있어 나는 살 수 있는거야’ 처럼 절절해,

 

그리움으로 속 시끄러운 사람 이제 말수 좀 줄여야 한다. 그리움에 못 이겨 이승으로 내려왔던 데미무어 사랑과 영혼도 있었으나, 이별이나 죽음의 후생관리 형태도 여러 가지겠으나,

 

그리움은 결국 남겨진 자들의 몫. 무릎관절이 시원찮아 달아날 엄두도 못내는 신세라도,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그리움을 지키기 위해 남겨진 자들.

 

입만 나불대더라도 나 앉은 지구가 낙원이다. <오>

 

 

20190210-2022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