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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국 평전 표지 | |
ⓒ2006 시대의창 |
사람들이 점차로 이런 본성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수오지심과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시비지심이 무뎌지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의 지적으로 자신의 부도덕함을 알고 나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세태다.
사회지도층이나 정부 고위 공직자조차도 시비선악과 수오지심을 모르고 있고, 교육자도 종교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일반인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 잘못된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해방 뒤 일제 강점하 반민족 행위자들에 대한 추상같은 벌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항일유적답사 길에 베이징에서 만나 뵌 한 독립운동가는 울먹이시며 이런 말씀을 했다.
"내 듣자하니 이완용이 후손이 제 할아비가 매국해서 왜왕 은사금으로 산 토지를 재판으로 찾아갔다는데, 그게 무슨 법치국가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법은 법이 아니다. 독립군을 잡아 악랄하게 고문했던 헌병보조원조차도 한 놈 제대로 처벌했다는 소문을 못 들었다. 민족 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는 기타 범죄는 범죄가 아닌 세상이다. 나라 팔아먹은 놈도, 왜놈 앞잡이 노릇하던 놈도, 높은 벼슬하며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에 배고파서 도둑질한 사람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 그런 나라는 부패하기 마련이고 도의와 양심은 땅에 떨어져 버린다."
평생을 친일문학 연구에 몰두한 임종국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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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를 지키는 임종국 선생 |
ⓒ2006 박도 |
나는 이 책을 책상 위에 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 문득 머리 속에는 중국 전한시대 사마천이 연상되었다. 그는 곧은 말과 글로 궁형(宮刑, 생식기를 없애는 형벌)까지 당하면서도 <사기>를 남긴 역사가였다.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게", "중뿔나게", "바보처럼" 평생을 친일문학 연구에 이바지한 임종국 선생과 그의 생애를 좇으면서 외골수 인생을 사는 정운현씨의 역작을 앞에 두고 감히 서평을 쓰기로 약속한 내 혀의 가벼운 놀림에 많이 후회했다. 부족한 내가 감히 이 역작을 한두 번 읽고 평할 수 없는 데다가, 자칫 대붕을 참새로 평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늦은 아침밥을 먹은 뒤 바로 책을 펼쳤다. 책에는 낯익은 분들이 이름이 많았다.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 총장도, 교양영어를 강독하셨던 교수도, 내가 가장 존경하였던 시인인 은사도, 내가 잘 아는 여러 선배의 글도 행적도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임종국 선생이 사셨던 시대와 공간의 배경도 일부는 내가 몸소 겪었기에 그 시절로 돌아가 그대로 책 속으로 빨려 들었다(대학 졸업년도가 나와 같다).
후기격인 집필일기와 연보 임종국 논저목록 인터뷰 명단까지 모두 읽고는 시계를 보자 이튿날 새벽 2시 30분이었다.
새벽안개가 자욱한 텃밭으로 나가 심호흡을 한 뒤 다시 글방으로 돌아와 책을 독파한 여운을 그대로 간직한 채 이 기사를 쓰고 있다.
"임종국 선생을 탐구해 가는 행복한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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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3년 고 임종국 선생 14주기 추모제가 열린 천안공원묘소 |
ⓒ2006 박도 |
내가 서가에 꽂아두고 <항일유적답사기>를 집필하면서 가장 많이 참고했던 <일제침략과 친일파>(임종국 지음)의 표지에 담은 글이다.
이 책은 친일파 연구서 가운데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으로, 내가 이 책을 손에 넣은 것은 1980년대 초다. 그때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의 친일행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보면서 일제하 부귀영화가 오히려 치욕이라는 것과 역사에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였으리라 싶다.
지은이 정운현씨는 책머리에서 "임종국 선생을 탐구해 가는 행복한 글쓰기"라고 했다. 그는 이 글을 충북 옥천군 동이면 한 시골집 사랑채(초근당)에 2주 동안 칩거하면서 대역작을 탈고하였다고 집필일기에서 밝히고 있다. 2주만에 대작을 탈고하는 그의 왕성한 필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정운현이라는 긴 직함으로 좀체 시간을 낼 수 없는 그는 초인적으로 자판을 두드렸으리라 짐작이 간다.
이 대목을 보면서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만주 벌판을 누비던 한 파르티잔을 그리고자 5년 전에 기필하고도 여태 절반도 못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필력 속도는 나에게 크나큰 충격과 한 수를 가르쳐 주었다. 아마도 그는 수십 년 모은 자료와 공부해둔 사실들을 한꺼번에 폭포수처럼 이 책에 쏟아 부었나 보다.
'보림재(寶林齋)'라는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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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 정운현(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씨. | |
ⓒ2006 오마이뉴스 권우성 |
"그런데 요즘 두 달 정도 걸려서 <총독부 관보> 조사를 완전히 끝냈습니다. 1년분 평균 600~700매를 복사했으니까 35년분 총계 2만 매 이상이나 되는 굉장한 작업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떻든 완료단계입니다만, 그 다음이 <매일신보>로 종전 전 약 10년분에 대한 조사입니다. 이놈은 복사도 할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필사를 할 예정입니다. 아들을 조수로 삼고 2개월 정도 시간을 들이면 어떻게든 완성될 것으로 예정하고 있습니다.(410쪽)"
이 대목에서는 처연해지고 임종국 선생이 숭고해진다. 마땅히 나라가 해야 할 일을, 연구비는커녕 먼지 나는 주머니를 탈탈 털어 중학교 휴학 중인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자취를 하면서 도서관에 처박혀 자료를 모았다. 그동안 변변히 잡수시지도 못하고 수십 년간 켜켜이 쌓인 먼지를 마시다가 건강이 상해 끝내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가셨다.
정운현씨는 자신의 개인연구실에 '보림재(寶林齋)'라는 현판을 달아두었다는데, 그 뜻은 '임종국 선생을 보배처럼 모시는 연구실'이라고 한다.
임종국 선생은 가셨지만 그는 선생이 가던 길을 그대로 뒤따르고 있다. 그는 <친일파 - 그 인간과 논리> <창씨개명> <친일파 죄상기> <중국대만 친일파재판사>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 - 증언 반민특위>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실록 군인 박정희> 등 자신이 펴낸 책으로 춘추필봉을 휘두르며 시대의 올곧은 정신을 깨우치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임종국 선생과 지은이 정운현씨는 시대의 양심을 지키는 파수꾼이요, 의인이다. <구약성서> '창세기(18:22~33)' 편에 보면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얘기가 나온다. 우리나라가 이나마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은 이런 분들처럼 곳곳에 보이지 않는 의인이 숨어서 이 나라를 받치는 버팀목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임종국 평전> 책장을 덮으며 삼가 고인의 영전에 옷깃을 여미며 깊이 고개 숙인다.
임종국 선생, 당신은 시대의 양심이었습니다. 이제 하늘에서 편히 쉬십시오. 이렇게 당신을 따르는 든든한 후학이 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