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바보같은 일’만 하다 갔다
[오마이뉴스 기고] 친일명단 일등공신 임종국 선생은 누구인가
김삼웅 독립기념관장
캄캄한 밤길에 초롱불을 들고 걷는 사람이 있었다. 길동무도 없었고 밤길을 헤쳐갈 지팡이 하나도 없었다. 사위는 어둠에 묻혀 있었고 용비어천가만이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굴욕회담을 지켜보던 임종국은 불현듯 해방 직후 자신의 고향에서 체험한 어떤 일화가 떠올랐다. 당시 17세 소년이던 그는 패전 소식에 주눅이 들어 곧 일본으로 쫓겨나게 될 한 일본군을 마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임종국의 배족사 연구는 제도권에서 철저히 외면되었다. 그의 글을 실어주는 신문도 잡지도 거의 없었다. 어쩌다 글을 실었던 매체는 더이상 게재가 어렵다는 통고가 따라다녔다. 그가 사망했을 때도 언론은 1단 기사로 처리하거나 아예 취급하지도 않았다. 2005-09-02 ⓒ 민족문제연구소
지금도 친일파 얘기만 나오면 먹기살기가 어렵고 국민 화합이 중요한데 지난 일을 꺼내 시끄럽게 하는 이유가 뭐냐고 핏대를 올리는 사람이 많다. 1960~70년대에는 지금과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다.
그때 최고 권부는 물론 사법·언론·검찰·학계·문화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친일세력이 주름잡고 있었다. 내선일체, 천황만세, 귀축영미를 부르짖던 자들은 유신만이 살길이라고 외치고, 어용지식인들은 일제강점기에 불렀던 용비어천가를 가사만 바꿔 합창하고 있었다.
친일파 문제는 용공 좌경과 동류항으로 묶이고 이단이거나 사문난적으로 취급되었다. 실제 분위기가 그랬다.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의 폭력에 짓밟힌 이래 친일파 연구는 한국사회에서 금기의 대상이 되었다.
친일파 세상에서 친일파를 연구하거나 척결하자는 주장은 사상이 불순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반공이 국시인 체제에서 '사상불순'은 곧 좌경 빨갱이와 같은 등식이었다.
그때 최고 권부는 물론 사법·언론·검찰·학계·문화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친일세력이 주름잡고 있었다. 내선일체, 천황만세, 귀축영미를 부르짖던 자들은 유신만이 살길이라고 외치고, 어용지식인들은 일제강점기에 불렀던 용비어천가를 가사만 바꿔 합창하고 있었다.
친일파 문제는 용공 좌경과 동류항으로 묶이고 이단이거나 사문난적으로 취급되었다. 실제 분위기가 그랬다.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의 폭력에 짓밟힌 이래 친일파 연구는 한국사회에서 금기의 대상이 되었다.
친일파 세상에서 친일파를 연구하거나 척결하자는 주장은 사상이 불순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반공이 국시인 체제에서 '사상불순'은 곧 좌경 빨갱이와 같은 등식이었다.
임종국, 그가 맨 처음 초롱불을 들었다. 아무도 걷지 않는 밤길을, '어둠의 자식들'이 가로막고 있는 가시밭길을 혼자서 외롭게, 그러나 의롭게 걸었다.
임종국 선생은 1929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일제강점기에 천도교 청우당 대표로 친일회의를 주재하고 국방 헌금을 모집했던 친일파 임문호이다. 매국노나 A·B급 친일파는 아니었지만 지방에서는 행세 깨나 하던 친일인사였던 것 같다.
이같은 사실은 임종국 선생이 본격적인 친일문제를 제기하면서 스스로 밝혔다. 이번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등재 예정자 중에는 그의 선친도 들어있다. 선친의 과오를 참회하는 마음이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종국은 출세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자신의 전공보다 시인 이상 연구에 몰두한 문학청년이었다. 졸업 후 <이상전집>을 펴내고 1959년에는 <문학예술>지에 시 '비(碑)'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사상계>에 많은 시와 평론을 발표했다. 태평한 세월이었다면 그는 시인으로, 문학인으로 종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의 상황은 역사의식이 남다른 문학청년을 문학의 영역에 안주하게 만들지 않았다. 일본군·만군 출신들이 중심이 된 박정희 정권은 1965년 일본과 저자세 굴욕회담을 벌이고 있었다. 시민·학생들이 반대 투쟁에 나서고 정부는 계엄령과 위수령을 반복하면서 반대를 누르고 굴욕회담을 마무리지었다.
패전 군인이 노려보며 남긴 말 "20년 후에 다시 돌아온다"
반민특위가 무산된 지 17년이 지난 1966년 '제2반민특위'가 열렸다. '열렸다'는 표현보다는 반민자들의 기소장이 제기되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친일문인들에 대한 임종국의 매서운 기소장이었다.
임종국은 이 해 <친일문학론>을 펴냈다. 변호사도, 재판장도, 방청객도 없는 역사의 법정에서 친일문인들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였다. 그 때까지 한국 근현대문학의 성좌와 같았던 문인들이 대부분 배족의 친일부역자들이었다는 추상같은 고발은 한국문학사에 일대 경종이었다.
혼자 하는 반민특위 활동은 문학부문에 머물지 않고 꾸준히 확대되었다. <발가벗고 온 총독>(1970), <정신대 실록>(1981), <일제침략과 친일파>(1982), <밤의 일제 침략사>(1984), <일제하의 사상탄압>(1985),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2>(1988, 1989) 등 일제 침략사와 친일파 연구에 기본 사료가 되는 저서와 자료집을 잇따라 출간했다.
연구 영역도 정치·경제·사회·교육·문화·종교·예술·군사·언론 등 전역에 걸쳐 진행되었다.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한 실증적 관찰이었다. 그가 한번도 송사에 휘말리지 않는 것은 충실한 '자료' 때문이었다.
친일파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친일관련 저서가 환영받을 리 없다. <친일문학론>이 초판 3천부를 소화하는데 10년이 걸렸다. 제도권 학자들은 '넝마주이'라 비아냥대고 이단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그는 괘념치 아니하고 '재야 사학자'의 타이틀로 친일연구에 몰두했다.
생활고로 서울에서 버티기도 어려웠던 데다가 지병인 천식이 폐기종으로 전이되자 그는 천안 교외에 '요산재'라는 외딴집을 짓고 닭을 키우면서 배족사에 관한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원고료 몇 푼 나오면 헌 책방을 뒤지거나 대학도서관의 자료 복사비에 쏟아부었다. 생활은 궁핍하기 그지없고 날이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었다. 병원에 오래 입원할 처지도 못되었다.
궁핍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배족사 연구는 그칠 줄 몰랐다. 필생의 과업으로 10권 분량의 <친일파 총서>를 기획하였다. 틈틈이 마련한 수천매의 친일파 인명사전 카드는 지금 민족문제연구소에 소중한 사료로 보존되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텍스트가 되고 있다. 선생은 이 과업을 완성하지 못한 채 1989년 11월 12일 61세의 생애를 접었다.
그는 철저한 외면과 멸시 속에 떠나갔다
유신정권 말기인 1979년 <해방 전후사의 인식(1)>이 판금된 배경은 이 책에 비중 있게 실린 임종국 선생의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란 논문 때문이었다. 일제 말 친일군상의 대부분은 해방 후 분단과 독재군상으로 탈바꿈하고, 이들과 그 후예들이 칼자루를 잡고 '판금'의 딱지를 붙였던 것이다.
임종국은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친일군상들이 활개 치는 암울한 시대에 혼자서 '반민특위 활동'을 전개하다가 쓸쓸하게 죽었다. 그러나 그가 동토에 뿌린 씨앗은 몇 후학들에게 이어지고 반민족문제연구소에 이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라는 묘판으로 성장하였다.
아무리 같은 시대를 살아도 관념의 깊이나 인식의 부피가 같을 수 없다. 임종국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많은 지식인들이 배족자들을 기리면서 평안하게 살아갈 때 그는 외로운 고난의 길을 택했다.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와 그의 가족에게는 궁핍과 싸늘한 모멸이 따랐다.
어쩌면 그는 '바보같은 일'만을 하다가 죽었다. 죽은 뒤에도 쉽게 햇볕은 비춰주지 않았다. 배족의 무리에게까지 문화훈장과 각종 상이 추서되는 판에 그에게는 망각의 너울만이 쌓여갔다. 뒤늦게 올 3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선생의 뜻을 되새기려 한다. 그리고 '임종국문화상'을 제정하여 역사정의 실현에 활동하는 인사들을 격려할 계획도 세웠다.
선생은 세상을 뜨기 2년 전 다음과 같은 절규를 유언처럼 남겼다.
"혼이 없는 사람이 시체이듯이 혼이 없는 민족도 죽은 민족이다.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해서도 안되며 진실만을 밝혀서 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15년 걸려서 모은 내 침략, 배족사의 자료들이 그런 일에 작은 보탬을 해줄 것이다.
그것들은 59세인 나로서 두 번 모을 수 없기 때문에,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자료와 그것을 정리한 카드 속에 묻혀서 생사를 함께 할 뿐인 것이다."
금관문화훈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사는 유일한 존재다. '세(世)'는 시간, '계(界)'는 공간이다. 누구도 시공을 초월한 존재는 불가능하다. 문제는 주어진 시공에서 어떻게 살다 죽느냐는 것이다. 친일배족자들이 천년 만년을 살 것처럼 행세해도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산자락 빈 터에 묻힘을 면치 못하고, 역사와 후손에게 오명만 유산처럼 남겼다.
반면에 애국자들의 삶은 험난했지만 그들의 성망은 역사에 정사(正史)로 남는다. 임종국의 삶도 이와 같다. 그의 16주기를 앞두고 있다. 정부는 이제 임종국 선생께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여 업적을 기렸으면 한다.
다음은 오늘에 이르러 임종국 사상의 일면이라도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과 나누고자 하는 선생의 유고 한 대목이다.
청산이 아니라 오히려 온존된 일제의 잔재는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민족의 정기를 좀 먹었고, 민족의 가치관을 학살하였다. 이 흙탕물을 걷어내지 못하는 한 민족의 자주는 공염불이요, 따라서 민족의 통일도 백일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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