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수필] 그것 또한 지나가리라

미송 2009. 8. 21. 01:53

 

그것 또한 지나가리라


엄마는 오늘 엉덩이가 달싹 올라간 탐스런 여자를 봤단다. 그녀는 우리 방과 후 아카데미에 일주일에 두 번씩 오시는 수학선생님이지. 엄마보다 세 살이나 젊었어. 그녀의 뒷태, 힙라인이 어찌나 매력적인지 엄마는 주눅이 들곤 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엄마 변태야 네가 그렇게 말할지도 몰라. 요즘 애들 버전으로 스물세 살 너도 그렇게 이상해하거나, 내가 설령 서운해지더라도 할 수 없어. 예쁜 걸 예쁘다고 하는 게 뭐 죈가.

40대에도 좀체 쳐 질 줄 모르는 엉덩이가 한 둘이 아니니, 스카이라인 확실하고 멋진 그 내력을 다 모르겠단 말이지. 혹, 시각 디자이너들 실력이 하루아침에 너무 좋아진 덕에 축 쳐진 엉덩이나 젖가슴들이 그녀 것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하는지, 그럼 좋지 뭘. 요즘 엄마는 왕복 땅밟기를 시작했다. 출퇴근길을 걸어서 다니기로 했어. 사십 분 동안이라도 자동차를 잊겠다는 결심이지.

첫째인 널 업을 적부터 던져버린 뾰족구두, 허벅지살 들래며 입던 스커트, 둘째까지 낳고 신혼 끝을 외치며 버려 버린 것들, 그런 것들 속에서도 유년의 낮은 운동화 하나 있으면 그만이야 할 때가 되었나봐.

운동화 신은 키가 얼마냐고- 지들이 돈 주고 살 것도 아니면서- 엄마가 하늘과 얼만큼 가까운가 궁금한지 자꾸만 묻는 열세 살 아이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는 그저 편한 신을 신기로 결정했지. 그래선가, 늙어갈수록 땅과 가까이 닿는 운동이 좋다는 학설이 저절로 믿겨지네.

튕겨 오를 듯 빵빵한 공이나 추켜세워진 그녀 엉덩이, 탄력이란 근거 있는 학설을 서슴없이 수용하는 정신 속에서 발아하는 꿈, 긴 낭하 속 숙주 같은 꿈이 아닐까. 언제까지 하이힐만 신고 다닐 공주처럼, 금 나와라 뚝딱하면 금 나오고 은 나와라 뚝딱 하면 은 나오는 세상, 도깨비 세상처럼 무엇이든 제 맘 먹은 데로 다 되는 세상인 줄 알았다면 그건 오만이야. 네 생각은?

석 달 전 엄마는, 네 싸이월드에서 일기 한 편을 훔쳐보았어. 다른 페이지도 슬쩍슬쩍 엿보았지. 솔직히 재밌어 웃기도 했다. 스물세 살 생각 스물세 살 즐거움 스물세 살...슬픔....물방울, 갇힌 삶이라고, 군대생활을 가끔 넌 그렇게 표현했지. 상병 휴가를 나와 친구와 미술전시관을 돌다 문득, 복귀할 시간이 다가오면 눈앞이 캄캄하고 답답해진다고. 그래서 그랬을까. 2009년 5월 13일 수요일 17시 26분 네 일기장에는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어.

족쇄 소리처럼 들리더구나. 때로는 마음 졸이기도 하고 치솟기도 하는 시간의 정수리에서 우리는 지금 사글세를 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아들, 유대 외경 ‘미드라시’ 에 전해지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어보렴. 엄마는 네 일기장에 기록된 네 마음에 밥보자기 같은 이야기를 다시 얹는다. 다윗 왕이 어느 날 궁중 세공인에게 명했어.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반지에는 큰 승리를 거둬 기쁨을 억제치 못할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고 또한 큰 절망에 빠졌을 때 용기를 함께 줄 수 있는 글귀를 적어 달라고, 세공인은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지만 고민에 빠졌지. 그는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단다. 솔로몬이 대답했어.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글귀를 반지에 새겨 넣으라고 승리에 도취한 순간, 왕이 그 글귀를 보면 자만심이 가라앉을 것이고, 절망에 빠졌을 때 그 글귀를 보면 큰 용기를 얻게 될 것이라고.

물과 물로 싸워도 당할 수 없던 하지의 모가지가 꺽이는 시각, 엄마의 귓가엔 마흔 다섯 번째 귀뚜라미 소리가 전해지고 있구나. 무의미의 의미로 계절이, 엉덩이 꼿꼿이 올라간 그녀가- 나보다 세 살이나 젊은- 여름 에필로그를 장식하듯 엄마의 눈 밖으로 사라지고 있구나. 젊은 날의 뾰족구두처럼, 또각또각...또각..또각.

널, 만나기 전 엄마는 하늘나라 선녀였다. 이제는 그 빛나던 선녀 옷은 낡아서 찢어져버렸고, 잃어버렸다는 말이 맞고, 그래서 후회했느냐. 아니 한 번도 널 잊은 적이 없었다. 절망의 강을 건널 수 있게 해 준 너, 자만심마저 겸손으로 손 모으게 하였으니, 푸른 아포리즘에 창창한 돛 달고 떠나는 나의 스물세 살......부디 안녕!


2009. 8. 21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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