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송기영 <뒷골목 라라 외 7편>

미송 2009. 1. 25. 17:00

뒷골목 라라 외 7편 / 송기영

 

부평역 뒷골목에서

밤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라라

혼자 자신을 게우고 있는 당신들에게서

대당 천 원을 받고 등을 쳐 드리지

라라, 열 대 정도면 당신들은 게울 만한 자기를

다 게우고, 계산을 치르고

타인이 되어 돌아갈 테지만

뒷골목에서 퍼엉, 퍼엉, 퍼엉하고

가슴께 뭉쳤던 것들이

골목을 걸어 나가는 소릴 좀 들어 봐

그날은 눈이 왔고, 술을 마셨고

혼자 그 남자의 뒷골목에 들어왔던, 라라

랄라라 그날은 눈이 왔고, 새해를 기다렸고

쉰 대, 하루 일당분을 혼자 맞고도

자기를 게워 내지 못해서

라라의 무릎 위에서 퍼엉,

퍼엉 소리를 내며 기절한 남자

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라라, 밤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혼자 게우고 있는

쓸쓸한 당신의 등을 쳐 드리지, 라라

랄라라

 

 

 

Player

512MB RAM X 2

 

    요리하는 기계랑 삽질하는 기계가 살았어요. 알고리즘이 그래요. 하나가 삽질해야 다른 하나가 요리할 수 있고 그렇게 요리해야 다른 하나가 메뉴대로 삽질할 수 있거든요. 요리하는 기계와 삽질하는 기계가 함께 보내는 시간은 모두 여섯 시간. 요리도 삽질도 없는 무료한 시간에 그들은 톱니를 닦고 조이고 기름 치죠. 서로의 톱니가 종종 어긋날 때도 있는데 그러면 낯설어 얼굴을 가리기도 하지만, 날이 밝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요리하는 기계는 자신의 메뉴대로 한 솥 아침을 볶아 낼 테고, 삽질하는 기계는 할부로 판 실입주 공간을 총총 빠져나갈 테죠. 졸음이 질펀한 오후, 삽질 기계는 정비 공장에 간 요리 기계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어요. 권위있는 정비사의 말이 요리 기계의 배에 새로운 톱니가 자라고 있다는군요. 자신이 판 세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삽질 기계는 서점에 들렀어요. 새로 자라날 톱니에게 되먹일, 작은 그림 매뉴얼들이 필요했거든요. 요리하는 기계랑 삽질하는 기계가 살았어요. 알고리즘을 누가 짰는지 나는 잘 몰라요.

 

 

 

사춘기 분재

 

 

무화과 나무가 저질러 놓은 가지 끝에

작은 꽃이 달렸다

액자 밖으로 비집어져 나온

살 한 덩이

벙어리 계집애가 무화, 무화 웃는다

못 들은 척

혀만 날름거리고 있을 뿐인 꽃

주인이 돌보지 못한 사이

 

바람이 잎겨드랑이를 파고들어 와

깍지벌레의 속삭임을 까 놓았나

가위를 꺼내 든 주인 남자가

자신의 형(形)을 집행하려고

문 손잡이를 돌렸을 때

마침내 폭발하는

 

까르르

 

 

 

철 추파춥스

 

 

    영원한 달콤함은 없다. 우리 동네 제철소에서는 방학을 맞아 철 추파춥스를 할인 판매한다. 달콤이 달콤인 것은 달달한 맛과 기분이 한순간 녹아 사라진다는 특성 때문이다. 순철 제품은 그 맛을 정련했다. 혓바닥이 1538도 이상 되지 않는 한, 당신의 사탕은 쉽게 녹지 않는다. 혀로 굴려 보라. 왕사탕 천 개 분의 중량 덕에 입 안 가득한 포만감도 느낄 수 있다.

 

    본 제품은 철 함량을 99.9%로 높임으로써 임산부와 골다공증 환자, 수험생들에게 그만이다. 급한 마음에 씹어 먹으면 뼈가 나갈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사탕을 다 먹으면 풍선껌도 씹을 수 있다. 벌써부터 녹여 먹는 것들에 볼이 부푸는 당신. 사탕을 다 녹여 먹은 후에 당신의 사랑도 후, 후 불어 보자. 끈적거리지 않는 달콤함, 철 추파춥스.

 

    혹 달콤함에 서투르다면, 아침저녁으로 한두 개씩 지옥-철을 권한다. 장마-철은 녹슬기 쉬우니 개봉 후 바로 입에 넣어야 한다. 대기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결국

 

    아달달 녹아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저마다 한철, 막대에 꽂힌- 얼굴들은 모두

 

 

 

이지상 베이커리

 

 

    이지상 베이커리에서 10년째 빵을 굽고 있는 이 씨는 강력분 내부의 기억은 비추어진 빛 알갱이의 에너지를 덩어리째 흡수한다고 설명한다 이때 고독했던 밀가루가 현실을 박차고 나갈 만큼 충분한 열을 얻으면 비로소 빵으로 방출되고 남은 에너지는 튀김용 빵가루나 목탄 지우개로 변하는 것이다 10년째 오직 한 종류, 죽은 딸아이의 추억만은 반죽해 온 그의 아내 김정애 씨는 인간의 전두엽이 빛 알갱이를 흡수할 때 대가로 매일 매일 한 줌씩의 머리카락을 지불해야 한다고 믿었다 기억의 입자, 즉 빛은 심장의 떨림과도 비례한다고 하는데 마침 강력분이 목에 걸린 김 여사는 일찍 발효해 버린 딸의 사진을 바게트 빵으로 문지르다가

 

    뜨겁게 달아오른 이 씨의 오븐 속으로

    훌쩍 뛰어 들어가 버렸다

 

 

 

폐수종*

 

 

    수초 속에 숨은 노란 고양이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 고양이 털 때문에 겨울에도 춥지는 않을 거야. 갸르르. 이따금씩 녀석의 울음소리가 물을 데워 놓을 테지. 작업복을 벗고 바위틈에 누워 보글보글 휘파람을 불어야지. 고양이가 물어 온 물고기를 새장 속에 담아 둘테야, 걱정 마, 여기선 태엽을 감지 않아도 돼. 구두끈을 풀어 주머니에 넣어 두라구. 길이 모두 끝난 곳에서 우리는 흘러(氵)가는 법(去), 법을 배우지. 물 밑엔 위풍당당 어족(語族)들을 가르쳐 줄 나무가 있고. 물로 활활 타오르는 나무 밑동엔, 고양이가 묻어 놓은 구름의 흰 뼈가 있지. 뼛조각을 가지고 놀다 손을 베어 설사 내 안에 구름이 치밀어 오른다 할지라도

 

    이젠 울어도 돼, 이곳은

    물 샐 틈 없으니까.

 

* 폐수종 : 폐가 울혈되고 폐포 속에 액체가 고인 상태

 

 

 

실험실에서 보낸 한 철

 

    모든 현실은 꿈이다. 나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를 꾸어 낸다. 이봐 몇 푼만 꿔 줘. 너는 지갑을 열어, 몇 개의 나를 손바닥 위에 던져 준다. 간지러워, 손바닥에 금이 간다. 금이 몇 돈 모이면 장사라도 해야지. 손님 없는 밤엔 한 권씩 책을 먹고 바지에 나를 싼다. 창피하지 않아, 꿈이니까. 책 표지엔 늘 위태롭게 매달린 여자가 있다. 오늘은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자, 그러니 어서 뛰어내려. 동틀 무렵, 나는 그녀를 거뜬히 받아 낸다. 그녀는 부러진 두 팔을 엮어 작은 아이들을 만들어 준다. 아이들은 내 심장을 오도독 씹어 먹고, 실핏줄을 엮어 그네를 탄다. 웃는 얼굴로 나는 말한다. 힘들지 않아, 꿈인걸. 오래오래 참다가 침 대신 혓바닥을 삼키기도 한다. 어차피 나는 불가능했던 어떤 것. 머리가 깨지고 아이들이 운다. 괜찮아, 괜찮아, 아프지 않아. 이번 주말엔 낮잠 대신 어디 공원에라도 가 보자. 부스스 잠에서 일어나 아이들의 손을 잡는다. 날개가 돋는다. 눈을 감고, 나는 돌아오지 못할 충동으로 날아가고 싶다.

 

    눈부시다.

 

    아침부터 놀이 공원을 덮고 있던 수많은,

 

 

 

엄마 찾아, 또 다음 장

 

    유년은 한때, 엄마였던 세계는 끝났다(우리는 엄마가 낳은 무수한 마르코*들. 서울역 대합실에는 언제나 마르코가 차고 넘친다. 1막 1장, 마로코가 또 하나의 마르코에게 손을 흔든다. 헤어지자, 우리는 각기 다른 엄마를 찾고 있었던 거야. 마르코가 떠나고 또 다른 마르코가 2장에서 내린다. 무대는 둥글어서 마르코도 돌고, 엄마도 돈다. 돌고 돌다 3장. 엄마를 잊어버린 마르코가 있고 선술집에서 싸움이나 일삼는 마르코도 있다. 그런데 마르코, 네 엄마도 너를 낳고 미역국을 먹었겠지? 하지만 우리는 엄마가 낳을 수밖에 없었던 얼굴들. 장이 바뀔 때마다 더러는 엄마가 된 마르코들이다. 다음 장이 열리면, 이 세상의 모든 엄마는 마르코를 버릴 엄마거나, 마르코의 엄마가 되려고 다짐한 마르코였음이 밝혀질테지. 그런데 엄마가 정말 있기나 했던 것일까, 마르코? 분장실에서 엄마를 보고도 모른 척 지나가 버린, 마르코의 아빠이자 남편일 마르코가 속삭였다) 나직이.

 

* 마르코 : <엄마 찾아 삼만리> 의 주인공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 <공포의 기록>  (0) 2009.02.04
이태준<달밤>  (0) 2009.01.28
사바나에서 블랙커피를 외 다수  (0) 2009.01.25
박상우<돌아오지 않은 황제의 여인>   (0) 2009.01.23
강은교<집착하면 잃으리라>  (0) 2009.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