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최정란<커밍아웃>

미송 2009. 8. 31. 09:39

 

 

 

 

 

 

 

 

커밍아웃 / 최정란 

                              

 

 

 

 

 

아직도 엄마로 보이니, 아직도 여자로 보이니,

아직도 내가 사람으로 보이니?

 

쇠사슬 묶인 발목을 절그렁거리며 어둠을 질질 끌고 

꿈과 생시를 넘나든다

 

처음에는 다름 아닌 내가 누구보다 더 두려웠다 

아마도 사백구십구 년 전이었을 것이다

거울을 보지 못하고 두려움의 냄새에 벌벌 떨었다

 

조금 지나니 바퀴 한 마리 못 죽이는 나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굳이 금요일 밤이 아니어도 좋았다  

안개가 끼거나 바람 부는 밤이면 어김없이

숲으로 강둑으로 밤의 거리로 빈 집으로 출몰했다

묶인 개들이 비명을 잃고 납작 엎드려 떨었다

숲을 배회하는 늑대들은 제 자리에 얼어붙었다 

 

폭주족의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밤의 도로를 질주하는 것도 싫증나고 언제부터인가 재미있는 일 좀 더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시들해졌다

년 쯤 지나자 규칙적인 생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출몰 계획표를 짰다

희소가치를 생각해서 빈도를 줄였다

수요일 밤에만 활동하기로 했다

 

정착하는 것이 좋을 듯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기왕 유령이라면 유령다워야 하겠다는 생각에 

의상을 맞추어 유령다운 모습을 갖추기로 했다

코스플레 동호회에서 공동구매로 자주색 벨벳 망또를 주문하고

특별한 날을 위해서 하얀 소복과 긴 생머리 가발도 주문했다

빨간 루즈와 창백한 얼굴을 만들 흰 파운데이션과

마룻바닥에 핏자국을 찍을 붉은 물감을 소품으로 준비했다

문이 없이도 수시로 드나들 벽을 세웠다

문으로 드나든다면 유령답지 못하니까

 

유령입문을 읽고 또 읽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해

무지한 유령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유령가문의 영광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인터넷으로 유령 에티켓 강좌에 등록하고 

세계화 시대를 대비해 

드라큐라어 회화를 초급까지 익혔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나타났느냐고?

사슬에 기름 좀 쳐 줘, 이제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싫증이 났거든

난청이 올 것 같아 

 

 웹진 『시인광장』2009년 가을호 발표

 

 

최정란 시인

  

 1961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1983년 계명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시 〈두실역 일번 출입구〉가 당선되어 등단. 2007년 시집『여우장갑』을 출간. 현재 웹진 『시인광장』편집위원으로 활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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