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최상호<시에 대한 커밍아웃>

미송 2009. 8. 31. 09:45

 

시에 대한 커밍아웃 / 최상호

 

 

그건 트릭이에요

내가 고상한 말로 아주 그럴듯하게

뽀대나게 시를 써서

밑천 없는 본질을 감추었어요

그것은 순진한 당신을 겨냥한

의도확대의 오류일 뿐인 걸요

 

가령,

'도시의 거친 바다에서

울부짖는 파도 소리를 듣는다'

라고 쓰면 당신은 도회지의 푸른 고독을 읽어대겠지만

그건 그날이

어지간히도 일이 안 풀리는

아주 개 같은 날이었다는 뜻이지요

아니면 이건 어떤가요?

 

어느 봄날에

'촉촉한 감나무 새잎을 쓰다듬으니

금세 눈이 맑아지고

겨우내 엉긴 몸 실타래 풀어지듯

오, 자연의 신비여'

라고 멋지게 품위를 잡았다 해도

그건 영혼의 순수가 아니라

엉큼하게도

새싹처럼 어린 영계 보듬고

회춘하고픈 마음이 일었다는 것일뿐이지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겠지만

 

문제는 말이에요,

나 원 참, 이젠 어떤 때는 내가 풀어놓은

어휘의 덫에

나도 깜빡 속는다니까요

어떤 때는 혼자 감격도 한다니까요

 

최상호 시집 <고슴도치 혹은 엔두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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