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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브르통, <나자>

미송 2009. 8. 31. 09:50

                                                  앙드레 브르통, <나자>

 
앙드레 브르통 Andre Breton, <나자 Nadja>(1928), 오생근 역, 민음사, 178쪽, 2008


1
운동 혹은 이즘(-ism)으로서의 초현실주의가 거론될 때면
언제나 언급됐던 그 소설, 고전(canon) <나자 Nadja>.
설마 번역이 될까, 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원어로 한번쯤 짚어야 되지 않을까,
그런 건방진 생각을 했었다.

초현실주의가 언어로 번역될 수 있을거라는 기대는
조금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마니페스토같은 강령이 아닌 이상에야,
초현실주의의 기본인 말장난(언어유희)이 우리말이 아닌 이상에야,
<나자>의 번역은 언제나 먼 일인 것만 같았다.

2
Andre Breton (1896-1966, 사진출처; 본문 152쪽)


이렇게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초현실주의를 주도한 사람이라니,
차라리 주어진 대로 의사의 길을 걷지, 쯧쯧
(하긴 의사로 이렇게 이름 남기기도 쉽지 않지만)

운동, 강령, 차치하고
<나자>는 정말 제대로 된 "연애소설"이다.

나의 부러움은
그가 전직 의사가 될 수 있었는데
그걸 포기하면서까지
예술 나부랭이를 주도했다는 점에 있는게 아니다.
30대 중반, 딱 그 나이에 아주 멋들어지게
연애소설을 썼다는 점이다.

3
초현실주의 이후 신난 건
프로이트, 라캉 어쩌고 저쩌고 하는
비평가들뿐이지,
정작 초현실주의가 보여준 건
무의식의 소실점이다.
그 소실점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건
정작 과거 없는 빈곤한 현대의 비평가들일지도 모른다.

하여 생각컨대,
운동으로 초현실주의가 빛을 발할 수 있었다면
그 1번은 오브제/사진과 문학일테고
회화와 조각은 부차적이다.

말장난을 기본으로 한
초현실주의에서
회화는 밀릴 수 밖에 없다.

사진과 회화를 동반한 이 텍스트가
빛을 발할 수 밖에 없음을,
마지막 소설 속의 "내"가 말하길,
(다분히 마지막 문장이 강령적이긴 해.
운동 컴플렉스마냥.)

아름다움은 발작적인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아닐 것이다. (본문 165쪽)

p. s. > 움베르트 에코를 읽으면서
소설답지 않다고 투덜대던 거,
한 방에 해소했다.
아무리 허접한 연애 이야기라도
소설은, 최소한 이래야한다, 라고
내게 말해준 책.

브르통의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
에누리를 바랄 필요 없는 그 문장들,
그러나 성립되는 '이야기'
요즘 소설가들이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