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이상 <공포의 기록>

미송 2009. 2. 4. 01:07

공포의 기록

 

서장

 

  생활, 내가 이미 오래 전부터 생활을 갖지 못한 것을 나는 잘 안다. 단편적으로 나를 찾아오는 '생활 비슷한 것'도 오직 '고통'이란 요괴뿐이다. 아무리 찾아도 이것을 알아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무슨 방법으로든지 생활력을 회복하려 꿈꾸는 때도 없지는 않다. 그것 때문에 나는 입때 자살을 안 하고 대기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말하고 싶다만.

  제2차 객혈이 있은 후 나는 어슴푸레하게나마 내 수명에 대한 개념을 파악하였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그러나 그 이튿날 나는 작은어머니와 말다툼을 하고 맥박 125의 팔을 안은 채, 나의 물욕을 부끄럽다 하였다. 나는 목을 놓고 울었다. 어린애같이 울었다.

  남 보기에 퍽이나 추악했을 것이다. 그러다 나는 내가 왜 우는가를 깨닫고 곧 울음을 그쳤다.

  나는 근래의 내 심경을 정직하게 말하려 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다. 만신창이의 나이건만 약간의 귀족 취미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남 듣기 좋게 말하자면 나는 절대로 내 자신을 경멸하지 않고 그 대신 부끄럽게 생각하리라는 그러한 심리로 이동하였다고 할 수는 있다. 적어도 그것에 가까운 것만은 사실이다.

 

 

불행한 계승

 

  4월로 들어서면서는 나는 얼마간 기동할 정신이 났다. 객혈하는 도수도 훨씬 뜨고 또 분량도 훨씬 줄었다. 그러나 침침한 방안으로 훗훗한 공기가 들어와서 미적지근하게 미적지근한 체온과 어울릴 적에 피로는 겨울 동안보다 훨씬 더한 것 같음은 제 팔뚝을 들 힘조차 제게 없는 것이다. 하도 답답하면 나는 툇마루에 볕이 드는 데로 나와 앉아서 반쯤 보이는 닭의 장 쪽을 보려고 그래서가 아니라 보이니까 멀거니 보고 있자면 으레 작은어머니가 그 닭의 장을 얼싸안고 얼미적얼미적하는 것이다. 저것은 즉 고 덜 여물어서 알을 안 까는 암탉들을 내려다보면서 언제나 요것들을 길러서 누이를 보나 하는 고약한 어머니들의 제 딸 노리는 그게 아닌가 내 눈에 비치는 것이다. 나는 물론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작은어머니의 얼굴을 암만 봐도 미워할 데가 어디 있는냐, 넓은 이마, 고른 치아의 열, 알맞은 코, 그리고 작은아버지만 살아 계시면 아직도 얼마든지 변변한 애정의 색을 띨 수 있는 총기 있는 눈 하며 다 내가 좋아라는 부분부분인데 어째 그런지 그런 좋은 부분들이 종합된 '작은 어머니'라는 인상이 나로 하여금 증오의 염을 일으키게 한다.

  물론 이래서는 못 쓴다. 이것은 분명히 내 병이다. 오래오래 사람을 싫어하는 버릇이 살피고 살펴서 급기야에 이 모양이 되고만 것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내 육친까지를 미워하기 시작하다가는 나는 참 이 세상에 의지할 곳이 도무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 참 안됐다.

  이런 공연한 망상들이 벌써 나을 수도 있었을 내 병을 자꾸 덧들이게 하는 것일 것이다. 나는 마음을 조용히 또 순하게 먹어야 할 것이라고 여러 번 괴로워하는데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은 도리어 또 겹겹이 짐 되는 것도 같아서 나는 차라리 방심 상태를 꾸미고 방 안에서는 천장만 쳐다보거나 나오면 허공만 쳐다보거나 하제도 역시 나를 싸고도는 온갖 것에 대한 증오의 염이 무럭무럭 구름 일듯 하는 것을 영 막을 길이 없다.

 비가 두어 번 왔다. 싹이 트려나 보다. 내려다보는 지면이 갈수록 심상치 않다. 바람이 없이 조용한 날은 툇마루에 드는 볕을 가만히 잡기만 하면 퍽 따뜻하다. 이렇게 따뜻한 볕을 쪼이면서 이렇게 혼곤한데 하필 사람만을 미워해야 되는 까닭이 무엇이냐. 사람이 나를 싫어할 성싶은데 나도 사실 내가 싫다. 이렇게 저를 사랑할 줄도 모르는 인간이 남을 위할 줄 알 수 있으랴. 없다. 그러면 나는 참 불행하구나. 

  이런 망상을 시작하면 정말이지 한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힘이 들고 힘이 드는 것이 싫어도 움직여야 한다. 나는 헌 구두짝을 끌고 마당으로 나가서 담 한 모퉁이를 의지해서 꾸며놓은 닭의 집 가까이 가 본다.

 

  혹 나는 마음으로 작은어머니에게 사과하려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 이것은 또 그러나 -- 작은어머니는 나를 보더니 얼른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저러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닭의 집 높이가 내 턱 좀 못 미치기 때문에 나는 거기 가로질린 나무에 턱을 받치고 닭의 집 속을 내려다보고 있자니까 냄새도 어지간한데 제일 그 수탉이 딱해 죽겠다. 공연히 성이 대밑둥까지 나서 모가지 털을 벌컥 일으켜 세워가지고는 숨이 헐레벌떡 헐레벌떡 야단법석이다. 제 딴은 그 가운데 막힌 철망을 뚫고 이쪽 암탉들 있는 데로 가고 싶어서 그러는 모양인데 사람 같으면 그만하면 넘어갈 줄 알고 그만둠 직하건만 이놈은 참 성벽이 대단하다.

 

  가끔 철망 무너진 구멍에 무작정하고 목을 틀어박았다가 잘 나오지 않아서 눈을 감고 끽끽 소리를 지르다가 가까스로 빠져나가는 걸 보고 저놈이 그만하면 단념하였다 하고 있으면 그래도 여전히 야단이다. 나는 그만 그놈의 끈기에 진력이 나서 못 생긴 놈, 미련한 놈, 못생긴 놈, 미련한 놈 하고 혼자서 화를 벌컥 내어보다가도 또 그놈으 그런 미칠 것 같은 정열이 다시없이 부럽기도 하고 존경해야 할 것같이 생각되기도 해서 자세히 본다.

  그런데 암탉들은 어떠냐 하면 영 본숭만숭이다. 모른 체하고 그저 모이 주워 먹기에만 열중이다. 아하 저러니까 수탉이란 놈이 화가 더 날 밖에 하고 나는 그 세침데기 암탉들을 안타깝게 생각한 것이다. 좀 가끔 수탉 쪽을 한두 번쯤 건너가다가도 보아주지 원-- 하고 나도 실없이 화가 난다. 수탉은 여전히 모이 주워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뒤법석을 치는데 좀처럼 허기도 지지 않는다. 

 

  이러다가 나는 저 수탉이 대체 요 세 마리 암탉 중의 어떤 놈을 노리는 것인가 좀 살펴보기로 하였다. 물론 수탉이란 놈의 변두가 하도 두리번거리니까 그놈의 시선만 가지고는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보통 사람 남자가 여자 보는 그런 눈으로 한번 보아야겠다.   

  얼른 보기에 사람의 눈으로는 짐승의 얼굴을 사람이 아무개 아무개 하듯 구별하기는 어려운 것 같이 보이는데 또 그렇지도 않다. 자세히 보면 저마다 특징다운 특징이 있고 성미도 제각기 다르다. 요 암탉 세 마리도 비슷하여서 얼른 보기에는 고놈이 고놈 같고 하더니 얼마큼이나 들여다보니까 모두 참 다르다. 

 

  키가 잘닥막하고, 눈앞이 검고, 털이 군데군데 빠지고 흙투성이의 그중 더러운 암탉 한 마리가 내 눈에 띄었다. 새침한 중에도 새침한 품이 풋고추같이 맵겠다. 그렇게 보니 그럴 성도 싶은 게 모이를 먹다가는 때때로 흘깃흘깃 음분(淫芬)한 계집같이 곁눈질을 곧잘 한다. 금방 달려들어 모래라도 한 줌 껴얹어주었으면 하는 공연한 충동을 느끼나 그러나 허리를 굽히기가 싫다. 속모르는 수탉은 수선도 피우는구나.

  아무것도 생각 않는 게 상수다. 닭들의 생활에도 그런 갸륵한 분쟁이 있으니 하물며 사람의 탈을 쓴 나에게 수없는 번거로움이 어찌 없으랴. 가엾은 수탉에 내 자신을 비겨보고 나는 다시 헌 구두짝을 질질 끈다. 바람이 없어서 퍽 따뜻하다. 싹이 트려나 보다.

  얼굴이 이렇게까지 창백한 것이 웬일일까 하고 내가 번민해서--

    내 황막한 의학 지식이 그예 진단하였다. 회충---

    그렇지만 이 진단에는 심원한 유서가 있다. 회충이 아니면 십이지장충---십이지장충이 아니면 조충--이러리라는 것이다. 회충약을 써서 안 들으면 조충약을 쓰고, 조충약을 써서 안 들으면 그 다음은 아직 연구해보지 않았다.

   어떤 몹시 불쾌한 하루를 선택하여 우선 회충산을 돈복하였다.

   안다. 두 끼를 절식해야 한다는 것도, 복약 후에 반드시 혼도한다는 것도.

   대낮이다. 이부자리를 펴고 그 속으로 움푹 들어가서 너부죽이 누워서, 이래도? 하고 그 혼도라는 것이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마음이 늘 초조한 법, 귀로 위 속이 버글버글하는 소리를 알아듣고 눈으로 방 네 귀가 정말 뒤퉁그러지려나 보고, 옆구리만 좀 근질근질해도 요게 혼도하는 놈인가 하고 긴장한다.

그랬건만 딱한 일은 끝끝대 내가 혼도 않고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3시를 쳐도 역시 그턱이다.

 

 타이핑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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