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불교학 강좌 <因果(인과)의 法則(법칙)>

미송 2009. 9. 11. 23:54

 

因果(인과)의 法則(법칙)

 

 

오늘의 주제는 인과(因果, hetu-paccaya)의 두 단어 중에서 특히 원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천착을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은 방대한 불교의 스케일에 대개들 놀랍니다. 그리하여 머리 좋은 학자들이 불교 공부를 할 때는 그 스케일을 다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까 그 중에 주요한 개념을 하나 따서 그것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가면서 나름대로 불교학적인 안목을 정립해 나가는 것을 많이 봅니다.

예를 들어서 구 소련 태생의 불교학자 체로바스키 같은 사람은 열반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불교에 대한 이해를 나름대로 정립을 시킵니다. 어떤 학자는 법(法)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불교를 나름대로 확립을 시키고, 어떤 이는 마음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불교를 정립시키는데, 최근에는 칼루파하나(Kalupahana)라는 탁월한 학자가 나타나서 원시불교에서부터 부파불교 초기·중기·후기 대승 그리고 동서양의 현대불교에 이르기까지 인과율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불교에 접근하는 그런 방법을 택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런데 인과라는 개념, 특히 원인이라는 개념으로 불교나 진리, 학문을 통찰해 보겠다는 것은 단순히 불교 안에서 시작된 것으로는 너무 늦게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서양에서는 원인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 사색은 서양의 철학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국 무엇이 가장 근본이 되는 원인이냐 하는 질문에서도 우리가 느낄 수 있지만 원인을 정확하게 추구한다고 하는 것 그것은 그야말로 학문의 오랜 숙제이며, 아울러 가장 정통으로 학문하는 왕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의미에서 원인이라고 하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누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불교가 원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문화 영역, 학문보다도 독보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요.

우리는 이제 도대체 무엇을 원인이라고 부르느냐, 우리가 ‘인과법이다, 원인을 잘 지어야 한다’ 하는 그런 애매모호한 술어들을 나열하는 데에만 그치지 말고, 정확하게 원인의 개념을 부처님은 어떻게 부여하고 계시며 어디서 어디까지를 원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오늘 충분히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먼저 이 문제에 들어가기 위해서 기존의 우리가 생각해 왔던 원인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서양인들 중에서 원인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생각됩니다. 이 사람은 원인을 네 가지로 분석합니다. 이 네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충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과라고 하는 것은 예측이 가능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원인이 되려면 그 ‘무엇’이라는 원인에 의하여 야기되어진 결과, 반응 변화에 대한 정확한 예측이 가능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인이라고 불러 줄 수가 있는데 그런 식의 논리라면 이 우주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도 정확한 원인만 규정할 수 있다면 예측이 가능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 논리를 세워볼 수가 있지요.

원인에 의하여 결과가 예측이 가능하다고 했을 때 그 결과는 원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시간적으로 나중의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적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이에요. 미래의 일이에요. 그 미래가 가장 극단의 경우까지 치달은 형태가 무엇이냐 하면 아마 이 우주의 완성형태라고 해도 좋을 것이고, 이 우주의 종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고 어쨌든 이 우주의 끝이라는 것으로서 시간적으로 끝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될 겁니다. 그 우주의 시간적인 끝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까지 말할 수 있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정확하게 예측을 해냅니다. 이 우주는 끝이 어떻게 될 것이다라고 예측을 해내요.

이 예측을 해내는 사람으로 먼저 두 사람을 들 수 있어요. 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고 또 하나는 오늘날의 과학자들입니다. 특히 스티븐 호킹이라는 사람은 우주의 끝을 예측해 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끝을 어떻게 예측을 했느냐 하면, 그 예측이 정확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원인을 설정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 네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있을 일을 정확하게 예측해 낸다는 겁니다. 첫 번째 원인이 무엇이냐 하면 형태인이라는 겁니다. 두 번째 원인은 질료인이고, 세 번째 원인은 동력인, 네 번째 원인은 목적인입니다.

이 네 가지가 인(因)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이 네 가지의 원인에 의하여 우리는 이 원인이 장차 야기하게 될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일단 이해하기 쉬운 것부터 설명을 해보면, 질료인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서 식초가 세상에 나타났다 하면 식초 이전의 무엇인가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식초가 튀어나오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야구르트가 되려면 이전에 우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질료(質料)입니다.

식초가 나오기 위해서는 그 전에 술이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식초를 결과로 보고 술이라는 원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적용해보자 이거예요. 그랬을 때 술이라는 것을 질료인이라고 부릅니다. 질료의 질(質)은 물질이라고 보고 료(料)는 물질적 재료라고 보면 됩니다. 어떠한 새로운 물질이 있기 위해서는 이 새로운 물질과는 다른 어떤 물질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두 번째 동력인이라는 것은 술이 식초가 되기 위해서는 술을 그냥 가만히 둔다고 해서 식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술을 가만히 두면 썩어 버려요. 다른 변화가 생겨 버립니다. 술에 적절한 온도 같은 것을 가해야 술이 식초로 변한다는 겁니다. 그랬을 때 술로 하여금 식초로 변하게 하는 온도 같은 것들을 동력인이라고 합니다. A라는 상황에서 B라는 상황으로 변해가기 위해서는 질료와 동력만 갖고는 안 된다는 겁니다. 다시 형태인과 목적인이 더해져야 저와 같은 변화가 발생한다는 겁니다.

이 술에 A라는 온도를 가했을 때 왜 하필 식초가 나타나느냐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입니다. 왜 A라는 온도일 때는 식초이고 B라는 온도일 때는 다른 물질이 되고 또 다른 온도일 때는 다른 어떤 것이 나타나야 할까요. 그것은 형태인이라는 다른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개념 설명이 쉽지가 않습니다만 시도를 해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시작은 원질(prime matter)에서 시작한다는 겁니다. 이 원질이 우주의 끝에 이르러서는 완성된 형태로 끝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질과 형태라는 두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우주를 설명해 나갑니다. 원질이라는 것은 100% 가능성을 뜻하는 말이라 합니다.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상태, 그러나 아직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원질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점점 어떤 형태를 갖추어 나간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형태가 없다가 1·2·3·4단계의 형태를 거치다가 완성된 형태까지 이른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 우주라는 겁니다.

1단계의 형태는 무엇이냐 하면 돌 같은 무기물입니다. 2단계는 식물이고, 3단계는 동물, 4단계는 인간, 최종적으로는 신이라는 형태에 도달한다는 겁니다. 이 마지막 형태를 완성, 실현(Actual)이라고 합니다.

그랬을 때 무기물은 식물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무기물 다음에는 식물이, 식물 다음에는 동물이, 그랬을 때 식물은 무기물이 앞으로 발전해가야 할 형태, 폼(form)이에요. 뒤의 단계는 앞 단계의 폼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기물은 결국 식물로 발전해 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처해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필연성 아니겠어요? 필연성이라는 것이 개입되어야 ‘인(hetu)’이라는 느낌도 느낀다고 했는데 원질에는 형태라는 것이 앞에 있기 때문에 이것은 나름대로 발전해 간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존재는 다음에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인가라는 발전의 폼이 전제되어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에게도 다음에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인가라는 폼이 내재되어 있다는 겁니다. 바로 그 내재되어 있는 존재가, 술의 경우에는 식초로서 그것이 바로 술의 폼이 되는 겁니다. 식초는 술이 변화된 존재 아닙니까? 그러나 뒤집으면 식초는 술이 식초로 변하기 위한 하나의 원인이 된다는 겁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형태인이 가장 궁극적인 스케일로 커지는 것이 목적인입니다.

모든 존재는 왜 변하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왜 변하느냐고 물었을 때 떠올리는 답변은 질료인과 동력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동력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로 태워버리니까 나무가 숯으로 변한 것 아니냐하는 겁니다. 그랬을 때 불은 동력인, 나무는 질료인인 것입니다.

여기서 끝냈을 수도 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는 궁극적인 폼을 향해 간다고 하는 그런 성질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변한다는 겁니다. 그러한 목적이 없다면 변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왜 불에 타야 되느냐는 겁니다. 하나의 존재가 존재했다면 계속 존재할 것이지 왜 변화를 일으키느냐는 겁니다. 굳이 변화를 일으킨다면 질료인이나 동력인 정도로는 약하다는 겁니다. 모든 존재는 궁극적으로 변해가야 할 최종적인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변한다는 겁니다. 그 목표가 바로 원인이라는 겁니다. 그 폼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으로 잡아요. 그래서 나중에 그리스 철학은 기독교 신학의 논리적인 근거를 제공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은 플라톤입니다. 그러나 스승 플라톤과는 정 반대되는 이론을 내놓습니다. 신학 시대의 후반부인 스콜라 철학의 시대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바탕으로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근거를 끌어냅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도 그리스철학에 상당한 바탕을 둡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가장 핵심이 바로 이겁니다. 모든 존재는 바로 궁극적인 형태로 향하여 가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궁극적인 형태에 도달해야만 된다는 그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는 목적인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왜 세상은 변해야만 할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딘가로 향하여 가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형태와 질료, 동력, 목적이라고 하는 원인이 정확하게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이상 우리의 결과는 궁극적인 형태로 간다는 겁니다. 모두 신의 나라에서 하나가 되는 곳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주의 끝은 신이라는 개념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완벽한 현실태로 끝나니, 모든 가능태가 현실로, 모든 원질이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아직도 우리는 구체적인 형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가능태를 가지고 있고, 동시에 어느 정도만 실현된 그런 형태라는 겁니다. 이 가능태 조차도 전부 현실로 실현될 때 그 때 끝난다는 겁니다. 이렇게 원인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이라는 개념을 살펴보면, 결국에는 지금 우리는 어떤 과정에 있고, 과정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고, 그 변화에 적용되는 원인은 저런 것이고, 저러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이 결론에 도달하게 되겠다는 정확한 예측을 나름대로 내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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