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비틀린 민중 삶 예술로 피워내다

국립현대미술관 경향신문·MBC가 공동 주최하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덕수궁미술관·11월9일까지)에는 제목 그대로 라틴아메리카 예술의 대가들이 등장한다. 디에고 리베라, 페르난도 보테로, 알프레도 람 등은 세계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 위주의 미술을 주로 접해온 한국에서 이들 작가의 이름은 낯설다. 경향신문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라틴아메리카 미술 중에서도 핵심으로 꼽히는 멕시코 미술의 대가 5명과 그들의 작품 세계를 멕시코 현지 취재를 통해 소개한다.
생명·고통 독특하게 표현 ‘멕시코 문화아이콘’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멕시코시티에 살아도 10번 미술관에 오면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1~2번 볼까말까예요.” 지난 17일 멕시코시티에 있는 현대미술관을 찾았을 때 안내자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다 칼로(1907~1954)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두 명의 프리다’(1939년작)를 보기 위해 갔지만 해외 전시 중이어서 볼 수 없었다.
멕시코에서 멕시코의 대표 작가의 작품을 쉽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프리다 칼로의 인기를 증명한다. 멕시코시티의 교외 코요아칸에서 태어난 그는 드라마틱한 삶과 독특한 자화상 작품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가다. 소아마비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신체 장애, 이로 인한 불임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멕시코의 또다른 대표 화가이자 남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에 대한 사랑 등이 작품의 소재가 됐다. 인디오 전통복식 등 멕시코 전통 문화를 작품에 담고 멕시코적인 민중미술 또한 보여줌으로써 원시적 생명력, 무의식, 정신적 고통을 독특하게 표현해냈다는 인정을 받는다.

“개인 인생사를 그림 속에 독창적으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삶의 모습을 소박하게 반영한 측면도 있지만 이것이 보는 사람에게는 직접 전달되기 때문에 강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요.” 작가와 그의 작품은 이제 멕시코의 문화 아이콘이 됐다고 소개한 멕시코 틀락스칼라 주립미술관(이하 주립미술관) 헬레나 헤르난데스 관장의 말이다. 주립미술관은 서울 정동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이하 라틴전)에 전시되고 있는 프리다 칼로 작품 7점을 제공했다.
프리다 칼로 탄생 100주년이었던 지난해, 멕시코 정부는 해외에 있는 프리다 칼로 작품까지 모아 대대적인 전시를 열었다. 이를 계기로 프리다 칼로의 생애와 작품은 새삼 주목의 대상이 됐다. 이 전시는 현재 미국 5개 도시 순회전에 나선 상태. 한국의 라틴전을 위해 프리다 칼로 작품을 구해야 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은 수소문 끝에 틀락스칼라 주립미술관에서 작품을 얻을 수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백남준 작품 12점을 주립미술관에 보내 교환전시를 열고 있다.
헤르난데스 관장은 “주정부가 25년 전 프리다 칼로의 친구인 시인 미겔 리라로부터 프리다 칼로 작품 7점을 구입했으며, 2004년 주립미술관을 세우면서 전시할 공간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주립미술관 안에는 프리다 칼로 작품을 모아 놓은 전시실이 따로 있다. 유화 2점과 수채화 3점, 스케치 1점, 나무 화판 1점 등이다. “작품 활동 초기인 1920년대 중후반에 그린 작품들로 사진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화가로서의 작업을 시작한 시기의 것들”이라고 말했다. 친한 친구였던 미겔 리라의 초상화, 멕시코 혁명 지도자 판초 비야와 혁명군의 생활상을 담은 작품, 수채로 그린 자화상 등이다. 한국의 라틴전에는 주립미술관의 프리다 칼로 작품 7점이 모두 들어왔으며 역시 별도의 방에 모아 전시하고 있다.
프리다 칼로 작품은 130점 정도로 추정된다. 작품 수가 적고 소장처가 흩어져 있어 그의 작품을 보고 싶은 사람들은 애가 타게 마련. 한국에서는 라틴전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게 됐지만 곧 프리다 칼로 관련 새 자료와 작품들이 멕시코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지난 17일 멕시코시티 코요아칸에 있는 ‘프리다 칼로 미술관’을 찾았을 때 시메나 고네스 큐레이터는 “최근 새로 발견된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의 유품 상자에서 2만2000여점의 자료와 작품이 확인됐다”면서 “오는 8월28일 이를 일반에게 공개하는 행사를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프리다 칼로, 디에고, 그들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 등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 프리다 칼로의 사진 작품 두 점과 색연필로 그린 자화상,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의 스케치·낙서·책 등의 자료가 포함된다.
멕시코시티·틀락스칼라(멕시코)/임영주기자
ㆍ프리다 칼로
풀네임: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 -
하지만 그녀는 1910년 멕시코 혁명이 발발한 그 해에 태어났다고 사람들에게 얘기하곤 한다. 공산주의자로 메시코 혁명기우와 함께 태어났음을 강조한다.
1913년(6세)
소아마비에 걸려 9개월간 방에만 갇힌 채로 살았다. 외로운 어린시절, 소아마비로 인해 말라빠진 오른쪽다리를 혐오하게 되었다.
1921년(14세)
명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해서 서클 '카츄사즈' 활동을 하면서 독서를 끊임없이 했다. 또한 그녀는 카츄사즈를 통해 남자아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정을 실현해 나가는 동지적 성실함을 배우게 되었다. 그 서클에서 그녀의 첫 사랑이자, 오랜 친구가 되는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를 만난다.
1925년(18세)
알레한드로와 프리다가 탄 버스가 건널목에서 열차와 충돌해서 알레한드로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으나, 프리다는 심한 참상을 당했다.(하복부와 척추뼈에 철골이 들어가고, 심한 출혈 때문에 그녀가 살아있는게 다행인데다가 하반신 마비가 되어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1926년(19세)
사고의 후유증으로 고통 속에 나날을 보내며 알레한드로에게 끊임없는 사랑의 편지를 보낸다. 계속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지루한 나머지 무언가를 해보기로 결심, 그녀의 가족들은 천장에 거울을 설치해 주고, 침대에 부착할 수 있도록 특수 이젤을 제작해 줬다. 그렇게 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첫 번째 그림 '자화상'을 완성한 후 알레한드로에게 보냄.
1928년(21세)
알레한드로와의 이별, 그러나 이후에는 친구 사이로 평생 서로를 지켜보게 된다. 그해 프리다는 멕시코에서 망명하고 있던 쿠바의 공산주의자 훌리오 안토니오 메야를 알게 되고, 그와 함께 살고 있는 티나 모도티와 깊은 우정을 나눈다. 그리하여 프리다는 티나와의 교류를 통해 멕시코 공산당에 입당하게 되고, 그 이후부터 그녀는 공산당이 조직한 문화 행사 및 정치 행사에도 참여하면서 이 때, 두 번째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게 된다.
1929년(22세)
42세의 디에고와 결혼했다. 친구들은 스무살 이상의 나이 차이와 디에고의 복잡한 여자 관계를 들먹이며 반대하지만 프리다의 아버지는 그녀의 치료비 지출로 인한 재정적인 압박을 받고 있는 터라 승낙했다. 결혼 후 그녀는 그림을 그만두고 남편을 위해서만 봉사한다. 그녀는 디에고가 추구하던 원주민과 멕시코의 토속성을 직접 집에서 실천했다.
1930(23세)
첫 번째 임신, 끔찍했던 교통사고와 선천성 골반 이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임신 중절을 했다. 공산주의자들을 디에고가 부르주아화 되었다면서 비난하고 결국 스스로 탈당을 하게 되었다. 디에고의 미국에서의 벽화 작업으로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1932년(25세)
두 번째 임신, 프리다는 디에고에게 아들을 선사하고 싶었지만, 그는 아이르 원치 않았고, 건강상의 이유로 유산. 낙태라는 고통을 알게 된다. 프리다의 어머니가 폐암으로 사망하고 디에고는 플레이 보이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방종의 생활을 시작했으며 프리다는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1934년(27세)
세번째의 유산, 디에고가 프리다의 막내 동생인 크리스티나와 깊은 관계인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디에고가 좋아하던 긴 머리를 자르고, 더 이상 테우아나 전통의상도 입지 않았다.
1935년(28세)
멕시코로 돌아와 일본 태생의 조각가인 '이사무 노구치'와 사랑에 빠진다. 디에고는 크리스티나와의 관계를 청산한 후였고, 프리다와 이사무의 비밀스런 만남을 알게된다. 디에고의 협박으로 그들의 만남은 끝났다. 프리다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1937년(30세)
망명 생활로 떠돌던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 부부를 도와주게 된다. 트로츠키는 프리다에게 매혹되고 둘의 만남은 사랑으로 발전되었으나 오래가지 않고 관계를 청산하였다.
1938년(31세)
프랑스 초현실주의 거장 앙드레 부르통을 만났다. 11월 뉴욕의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가지게 된다. 브르통은 그녀를 "뛰어난 초현실주의 화가"라고 찬사를 보냈다. 뉴욕에서 젊은 사진작가인 니콜라스 머레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39(32세)
앙드레 부르통의 후원으로 파리의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진다. 이 전시회에서도 역시 칸딘스키, 피카소 등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극찬을 받는다. 남미 화가로는 최초의 루브로 박물관에 그녀의 그림이 소장된다. 머레이와 이별하고, 디에고와의 관계도 악화되어 이혼한 후, 더욱 그림에 몰두하게 된다.
1940(33세)
멕시코 미술관에서 개최된 초현실주의 국제 전시회에 '2인의 프리다 상처받은 식탁'을 출품하고, 디에고는 여자 관계 정리하고, 상대방에 대한 독립성 존중 등을 조건으로 디에고 리베라의 54세의 생일에 재결합한다.
1941(34세)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의 죽음, 프리다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1944(37세)
석고와 가죽 코르셋으로 몸을 지탱하지 못해 강철 코르셋을 착용하기에 이른다.
1946(39세)
뉴욕에서 척추 수술을 받았으나 고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1950~51에는 영국에서 일곱 번의 척추 수술을 받는다.
1953(46세)
멕시코에서 프리다 칼로의 회고 전시회가 열렸는데 개막식날 침대에 실린채 참석했다. 결국 오른쪽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다.
1954(47세)
폐렴이 겹친다. 7월에 휠체어를 타고 공산주의자 시위에 참여했고 정치적 신념을 표현할 각본을 만들기 위해 다시금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54년 7월 12일 일기
"내가 거리로 나간 것이 다행스런 일이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더 이상 고통스런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1954년 7월 13일 자살
1958년 푸른 저택의 프리다 박물관으로 개장.
“그녀는 보기 드문 품위를 지녔고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눈에는 기묘한 불길이 타오르고 가슴은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해 아이 같지 않은 매력을 갖고 있었다.”
벽화주의 운동의 세계적인 거장인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1886∼1957). 1923년 멕시코시티 국립 예비학교에서 벽화작업을 하던 서른일곱 살의 리베라는 우연히 마주친 16세 소녀를 이렇게 묘사했다. 훗날 멕시코 미술계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다.
이들은 6년 뒤인 1929년 8월 21일 결혼했다. 당시 22세이던 칼로는 21년 연상인 리베라의 세 번째 아내였다.
리베라의 지독한 여성편력 탓에 두 사람은 별거, 이혼, 재결합을 거듭했다. 하지만 이들은 부부이자 미술 동료로 갈라설 수 없는 사이였다. 칼로는 자신의 내면에 담긴 욕망과 좌절의 풍경을 그렸고, 리베라는 멕시코 농민 등 민중을 소재로 한 역사적 풍경을 벽화로 표현했다. 칼로는 자화상 속 자신의 이마에 ‘디에고’의 이름을 새겨 넣을 정도였다.
이런 칼로의 47년 인생은 스러져가는 육체와의 싸움이었다. 6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다리가 불구가 됐고, 18세 때인 1925년에는 교통사고로 척추와 골반을 심하게 다쳐 30여 차례나 외과수술을 받아야 했다.
칼로가 이 참담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것이 그림이다. 그는 평생 2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어머니의 출산 장면을 담은 ‘나의 탄생’을 비롯해 교통사고, 유산, 몸을 쇠로 고정한 흉측한 자신의 몸 등 자화상이 많았다.
칼로는 “살아오며 나 혼자일 때가 많았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소재가 나이기 때문”이라고 자화상을 많이 그린 이유를 말했다.
칼로가 양성애자이자 공산주의자로 활동한 것을 두고 찬반이 엇갈리긴 하지만 그가 자신의 장애를 예술로 승화시킨 여성이라는 데 이견을 달기는 어렵다. 멕시코 정부는 1984년 칼로의 작품을 ‘국보’로 지정했다.
이런 칼로의 모습에는 서른두 해를 뜨겁게 살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전혜린(1934∼1965)이 겹쳐진다.
전혜린은 자신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78)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누구나 자기의 쥐덫 속에 살고 있다. 개인의 쥐덫과 인류의 운명이라는 역사성, 시간성의 쥐덫이 놓여 있다. … 죽음을 내포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자신의 내부에 파고드는 것, 내적 관조에 의해 어떤 체념적인 긍정을 얻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것이다.”
황태훈 기자
'발견의 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윤수<이상한 열매, 빌리 홀리데이> (0) | 2009.09.24 |
---|---|
빌리 홀리데이 (0) | 2009.09.23 |
스파링 파트너 (0) | 2009.09.10 |
泣斬馬謖(읍참마속) (0) | 2009.08.28 |
쉬운 불교 (0) | 2009.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