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의 기쁨

정윤수<이상한 열매, 빌리 홀리데이>

미송 2009. 9. 24. 09:34

이상한 열매, 빌리 홀리데이

 

 

책과 연관하여 내게 하나의 좌우명이 있다면, 바윗장처럼 단단한 신념이 있다면,

책이란 어떤 경우에도 빌려올 수는 있지만 절대 빌려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늘 그러하듯이, 책을 빌려간 사람은 결코 그것을 들고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신념으로 삼고 있다.

 

3년 전의 일이다.

요즘도 홍대앞이나 삼청동의 ‘올드’한 카페에서나 볼 수 있는

꽤 많은 양의 LP 판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구매하기 위하여 세 사람이 함께 왔다.

적지 않은 양이라서 작지 않은 금액이 오갔는데,

그 미묘하면서도 즐거운 흥정 중에 어떤 사람이 내 서가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얇은 책이었고, 그 무렵에는 절판 중이었다.

몇 번이고 책을 훑어보던 그가 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 내게 말했다.

“이 책, 좀 빌려가면 안 될까요? 이게 절판이 돼서......

이 동네 사니까 며칠 후에 돌려 드릴께요.”

그때 나는, 음반을 사러 온 사람과 흥정을 하던 중이었다.

제법 큰 단위는 이미 결정되었고 십만 원 단위 아랫자리를

조정하던 와중이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러시죠, 뭐.”

그 책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1915년 오늘, 4월 7일에 태어난, 빌리 홀리데이를 위하여

“그녀의 스윙에 맞추어 세계가 스윙하였다. 지구 그 자체가

흔들흔들 흔들렸다”

고 격찬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얇은 책 <재즈 에세이>는

3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뼈 아픈 실책이다.

빌리 홀리데이를 말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동시대 가수들을 함께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컨대 엘라 피츠제럴드가 있다.

그녀에게서는 투명한 영혼의 소리가 난다.

그녀의 스윙과 발라드는 죄 없는 사람조차 흐느껴 울게 만들 만큼 지극한 서정으로 충만하다.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부른, 조지 거쉰의 <포기와 베스> 중에서 ‘summertime'를 들어보면, 누구나 천상에서 들려오는 아늑한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사라 본이 있다.

답답하고 지루한 일상의 틈으로 그녀의 소리가 들려오면,

그 자리가 어떤 경우이든지, 당장 넘실대는 즉흥의 향연이 펼쳐진다.

마지막으로 애비 링컨이 있다.

울고 싶으면 지금 그녀의 이름을 검색해 보면 된다.

그렇다면 빌리 홀리데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음악을 들으면,

우선 1930년대에서 1940년대에 걸친 녹음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충만한 상상력으로 넘실거리고,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높이 비상한다.

그것은 이미 예술이 아니라 마법이었다’.

 

1915년 4월 7일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난

(펜실바니아주 필라델피아라는 주장도 있음)

빌리의 삶은, 태생부터 엉망진창이었다.

어머니는 백인 가정의 하녀였다.

그마저도 빌리를 임신한 사실 때문에 쫓겨났다.

빌리는 학대받는 흑인 아이의 전형적인 고통을 겪으며 성장했다.

열 살이 되어 돈벌이에 나섰다가 성 폭행을 당하였으나

경찰은 가해자인 40대의 백인 남자 대신 빌리를 감화원에 보냈고, 그곳에서 2년을 보냈다.

 

그후로도 고통은 그의 양식이 되었다. 열네 살 때는 뉴욕의 사창가에서 생활했다.

다행이라면, 그녀가 어쨌거나 대공황을 전후로 하여 뉴욕으로 흘러들어 왔다는 점이다.

남부 항구 도시 뉴올리언스와 세인트루이스에서 발달한 재즈는

미시시피 강을 따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카고를 거쳐

뉴욕으로 선회하면서, ‘스윙’의 절정을 구가하고 있었다.

빌리는 나이트클럽 '포즈와 제리즈'의 오디션에 합격하여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빌리는 "홀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만약 누가 핀이라도 하나 떨어뜨렸다면

그것은 마치 폭탄이 터지는 소리 같았을 것"이라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때부터 노래를 부르는 빌리 홀리데이가 되었다.

테디 윌슨 악단의 보컬로 참여하여 녹음한 음반이 널리 팔렸고

듀크 엘링턴의 영화음악 <심포니 인 블랙>의 보컬까지 맡게 되었으며

1936년에는 첫 번째 독집 음반 <빌리 홀리데이 스토리>를 크게 성공시켰다.

듀크 엘링턴, 플레처 헨더슨, 카운트 베이시, 레스터 영 등 ‘스윙’ 시대의

위대한 악단장들이 그녀를 가운데 세워놓고 연주를 했다.

그러니까 이 무렵까지가 앞서 언급했던,

‘믿기지 않을 만큼 충만한 상상력으로 넘실’(하루키)거렸던 시기로서,

하루키는 젊은 날에 이 무렵의 빌리 홀리데이를 열심히 들었다고 고백한다.

그 후의 빌리 홀리데이는?

 

하루키는, “마약에 절어 목소리가 망가진 이후,

<버브> 시대의 그녀의 녹음은 그다지 열심히 듣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멀리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1950년대 들어서부터는 너무 애처롭고 무겁고 감상적으로 들렸다.

그런데 점점 나이를 먹어 30대가 되고 40대가 되자

오히려 그 시대의 레코드를 즐겨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몸과 마음이 그 음악들을 바라게 된 모양이었다.”

대단히 감상적인 하루키의 표현들이지만,

어느 구두 광고 때문에 국내에 유명해진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가 그대로 증명하듯이,

실제로 40, 50년대의 목소리가 어떤 면에서 우리 귀에 ‘익숙한’ 빌리 홀리데이임은 무시하기 어렵다.

 

극심한 인종 차별, 실패로 끝난 두 번의 결혼,

무대 위의 고통과 무대 뒤의 고독, 그리고 40, 50년대를 활동한

거의 모든 재즈 뮤지션들에게 통과의례로 찾아왔던 마약에의 유혹이

그녀의 목소리를 ‘거칠게’ 다듬어주었다.

재활병원과 감옥을 순회하던 그녀의 삶은

결국 1959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병원을 종착역으로 삼게 된다.

병원의 간호사들은 마약에 찌든 중년의 환자에게 강도 높은 진정제만 투여했다.

7월 17일, 엘리노어 페이건(본명)이라는 이름의 여자는

'마약중독 말기증상, 치료 방법 없음'이라는 진료 기록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40대의 하루키는, 감옥과 병원을 오가는 사이에

간신히 무대에 서거나 몇 차례 녹음을 남긴

중년의 빌리 홀리데이를 자주 듣게 되면서 이렇게 썼다.

“어떤 의미에서는 퇴락했다고도 할 수 있는 빌리 홀리데이의 만년의 노래에서

내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나? 그에 관해서 여러 가지 생각해 보았다.

그 안에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왜 나를 그렇게 강하게 흡인하는 것인지?

어쩌면 그것은 '용서'같은 것이 아닐까?”

글쎄...... 아무래도 ‘용서’라는 말로 끝 맺는 하루키의 단상은

너무 ‘교과서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 ‘용서’라는 단어는 어쩐지 하루키가 자신의 나이듦을 위로하기 위하여

빌리 홀리데이의 생애를 슬쩍 인용하는 듯이 보인다.

 

나이 들면 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무소유로 돌아가고,

하는 식의 흐름은 하나의 근사한 완결된 문장일 수는 있어도 대체로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예컨대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로 뜻하지 않게 장안에 널리 이름을 알린

경북 봉화의 전우익 선생은 2004년에 유명을 달리하였는데,

그 무렵에 찍은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밤마다 온갖 욕망과 거짓과 부끄러움과 싸우느라 잠을 이루기 어렵다고도 했다.

이 생생한 리얼리티가 오히려 삶의 본질에 가깝지 않은가, 잠시 생각해 본다.

아, 물론 이것은 아주 얇은 책을 몇 년 전에 ‘빌려 가서’

여전히 돌려주지 않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한 저주는 결코 아니다.

 

봄 비도 내린 4월 7일의 아침에, 오늘 태어난 빌리 홀리데이의 영상을 소개한다.

단순히 ‘억압과 저항’의 양식화된 종류로서의 ‘인종 차별’을 넘어서서,

인간 그 자체의 ‘삶과 죽음’을 한 줌의 모래로, 본질적인 파괴에 이르게 하는,

그 참담함을 떠올리게 하는, 이 노래 ‘Strange Fruit’(이상한 열매) 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Strange Fruit’

Southern trees bear strange fruit

Blood on the leaves

Blood at the root

Black bodies swinging in the southern breeze

Strange fruit hanging from the poplar trees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린다.

잎사귀와 뿌리에는 피가 흥건하고,

남부의 따뜻한 산들 바람에

검은 몸뚱이들이 매달린 채 흔들린다.

포플러나무에 매달려 있는 이상한 열매들.

Pastoral scene of the gallant south

The bulging eyes and the twisted mouth

The scent of magnolia sweet and fresh

Then the sudden smell of burning flesh

멋진 남부의 전원 풍경,

튀어나온 눈과 찌그러진 입술,

달콤하고 상쾌한 매그놀리아 향,

그리고는 갑자기 풍겨오는, 살덩이를 태우는 냄새여!

Here is a fruit for the crows to pluck

for the rain to gather

for the wind to suck

for the sun to rot

for the tree to drop

Here is a strange and bitter crop

여기 까마귀들이 뜯어먹고,

비를 모으며 바람을 빨아들이는,

그리고 햇살에 썩어가고 나무에서 떨어질,

여기 이상하고 슬픈 열매가 있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

빌리 홀리데이

도널드 클라크 지음 | 한종현 옮김 | 을유문화사

세계적 권위의 <펭귄 대중음악 백과사전>으로 잘 알려진

음악 저술가 도널드 클라크의 걸작 다큐멘터리.

빌리 홀리데이의 삶을 1차 자료와 인터뷰로 철저히 고증하였다.

사창가와 마약과 감옥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공간으로 구성되는 그녀의 삶을

동시대 음악인들과의 오랜 대화로 새롭게 들여다본, 예술가 평전의 고전이다.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

에릭 홉스봄 지음 | 김동택 외 옮김 | 영림카디널

80년대에 독서를 한 사람들에게 아도르노는 다소 의아한 화두를 던졌다.

이 진보적 사회학자는 재즈가 '현대 사회의 소외론'적 관점에서 퇴행적이라고 진단한 것이다. 아무리 들어도 그 '퇴행성'을 찾기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홉스봄의 이 책은 성서와 다를 바 없다. 물론 역사학자 홉스봄의 이 책은 산업혁명기 노동자들이나 베트남의 게릴라, 시칠리아 섬의 산적 살바토레 줄리아노 등을 통하여 역사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을 보여주는데, 그 마지막 4부가 재즈에 할애되고 있다.

본명은 물론 프랜스시 뉴튼이라는 필명으로 재즈에 관한 개론서와 입문서와 칼럼을 써온 홉스봄이 이 책에 수록한 빌리 홀리데이에 관한 글은, 그녀가 1959년에 죽었을 때 쓴 추도사이다. 홉스봄은 "그녀의 노래에는 잘려나간 자신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사람과 같은 마음의 고통과 육체적 체념이 뒤섞여 있다”고 쓴다.

재즈를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근간을 두면서 주류 예술로 등장한 아주 드문 사례'라고

평가하는 홉스봄의 따스한 연민이 흘러넘치는 명문이다.

 

< Lady in satin>

빌리 홀리데이 | CBS/콜럼비아

아무래도 그녀는 우리의 재즈 환경에서,

아니 호들갑스러운 문화 환경에서, 너무 쉽게 소비되었다.

근사하게 와인을 마시기 위해 틀어보는 설익은 중산층 문화의 'BGM'에 가깝다.

그녀의 최후의 걸작, 사망하기 1년 전인 1958년의 이 앨범은,

그 대표 수록곡인 'I`m a fool to want you'만 듣고 말기에는 너무나 풍성한, 최후의 만찬이다.

 

글/ 정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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