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수필] 숨어있는 길

미송 2009. 10. 3. 23:49

 

 

숨어있는 길 

 

 

문 하나 달지 않은 하늘이 가을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산허리를 핥듯 지나온 오후가 여섯 개의 구멍(六入) 속에서 향기를 들락이는 지금은 밤. 그러나 철판같이 견고한 어둠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순간, 신(神)과 인간의 쇠사슬마저 끊어질 것 같은 가을입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지도책에서 보았던 별 관측소로 가기 위해 우리는 차를 몰았습니다. 그러나 그만 비포장도로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소박하니 유혹할 건 다 유혹하는 코스모스가 춤추는 가로수, 그 옆 반짝이는 자작나무 이파리들 아래 강물을 따라, 나 언젠가 숨이 멎는다해도 이 길 따라 갔으면 좋겠다 했던, 개망초 꽃길 닮은 코스모스 길을 지났습니다. 목적지를 정한 바 없는 우리가 아니었지만 딱히 오늘 그 곳에 올라야 한다는 의식도 없었습니다. 해발 450m 산등성이를 두 번 정도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이 초저녁별은 하늘 아래 꽃으로 피어 있었습니다.

 

시골 주유소 앞 아저씨 한 분이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기름을 넣고 가라고 수신호를 보냅니다. 차를 돌려 기름을 또 넣고 싶었지만 애마는 복부비만입니다. 외길에서 다른 차와 마주치면 어떻게 하지 말하는 순간, 차 한 대가 우리처럼 비포장도로를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오른쪽으로는 낭떠러지. 바퀴 하나 삐끗하면 온 몸이 아래로 구를지도 모른다고, 피부촉감과 의식이 벌떡 일어섰습니다. 조심조심 뒤편 공간을 향해 후진을 하고 길을 양보하자 찰나의 스릴이 날아들었습니다.

 

여행은 찰나의 스릴과 망각으로 교차로를 그려줍니다. 뻥 뚫린 길은 재미없는 이야기 같아서, 우리는 비포장도로를 만나기 위해 가끔은 형식적인 지도책을 펼치기도 합니다. 유혹하는 코스모스 길을 다 지날 수 없어서, 눈과 귀와 코와 혀와 촉감과 마음(眼, 耳, 鼻, 舌, 呻, 意)으로 다 경험할 수 없는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서, 험산준령같은 고개를 만나도 즐거이 넘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길은, 치자빛 익은 벼들과 연두색 표지 동화 같은 그림으로 여행자의 낯선 길을 안내해줍니다. 가을 닮은 미소보다 더 큰 보시(施)가 없을 듯 합니다. 매일 웃어주는 일은 빈들의 충만함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벼가 익었습니다. 이른 벼들이 벌써 논두렁에 누웠습니다. 고개를 숙이거나 바닥에 누웠거나, 익은 후에도 깨달음을 얻으려고 달려가는 것들이야말로 평화로운 보행자입니다. 비포장도로는 내일도 열릴 것이지만, 오늘의 길에서 적멸의 꽃 한 송이를 만난 우리는 목적지를 정하여 다시 떠나렵니다. 우주의 열쇠를 손에 쥔 사람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라도 , 그렇게 가을 속으로 걸어가려구요.

 

2009. 10. 3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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