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수필] 빗금

미송 2009. 10. 16. 11:43

빗금

 

 

달과 술

 

가로등 여럿 불빛이 보름달을 보고 있었다. 선연한 얼굴. 고색창연하게 어우러진 달빛이 아슴한 얼굴마저 원안으로 들일 것 같은 밤, 달 보러 오라는 S의 부름을 받고 꼬무작꼬무작 집을 나섰다. 달을 보러 갔다. 아니 S를 만나러 갔다. 십 삼년 전부터 아름드리에 서각犀角에 새겨오던 이야기들, 무엇보다, 한숨짓던 사연들을 우린 기억했을까. 매양 뜨고 지는 달인데 보름달이란 특별한 이유에서만 부르지 않았으리란 걸, 난 안다. 오래 사귀어온 사람을 만나는 일은 고전을 읽는 일 만큼이나 믿음이 간다.

 

어디서 구한 산딸기인지 그녀가 복분자 한 병을 담아 가지고 나왔다. 웬일일까 술이 먼저 취한 듯 보들거렸다. 어찌 이리 달그작작한 맛을 내었나 싶어서 그녀의 손마디를 살피다 손등에 비친 둥그런 달을 보았다. 정중동靜中動의 달빛에 반사된 손이 아름답다. 고마운 손,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언니처럼 도와주곤 하던 궂은 손이 예술가의 손이다. 이상은 형이상形而上에 속했으나 현실은 형이하形而下에 머무는, 생의 미학이란 죽음에 견줄만한 노동을 전제로 한 것일까. S는 최근 정신병원에서의 업무 이야기를, 나는 시간의 ‘또 다른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깊은 산 속, 엿듣는 달빛이 오락가락 그네를 타고 있었다. S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거의가 반복적이다 끝내는 치유 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내일이면 달라지리라 맹세 하지만 일주일도 넘기지 못해 똑같은 일로 병원에 다시 오는 사람들. 쉽게 바뀌지 않는 게 인간이다. 통계적 수치를 넘어서 검증된 진리가 된 것 같다. 알콜중독자를 돕고 있는 S는 한계를 느낄 때 마다 외로워진다고 했다. 진력을 다해서 작성한 보고서들이 한낱 종이 쪼가리로 전락될 때 회의懷疑도 가질 것이다. 병을 고쳐보려는 자와 그냥 그대로 살다 죽으려는 자의 관성이 공존하는 세계. 인과율이나 과학의 합리주의로만 설명될 수 있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은 시간과 함께 강물처럼 흘러간다. 기차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 사이에도 사라진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목숨을 걸기도 끝내기도 한다.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는 공황이거나 화석이 된 경우이거나 죽음은 호흡의 정지를 넘어서 의식의 정지를 일컫는다. 깜박거리고 발름거리고 달싹대지만 고인 물의 상태로 있는 것을 죽음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난, 한결같다는 말에 별로 집착하지 않는다. 복분자 알큰한 맛에 취하고 달빛에 취하던 그 밤조차도,

 

 

구호처럼

 

60대들의 건배구호가 바뀌었다. 구구 팔팔 이 삼사- 구십 구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이삼일만 아프고 죽자-에서, 구구 팔팔 이삼일-구십 구세까지 팔팔하게 살고 이삼일 정도 아프다가도 발딱 일어나자-로. 약간 억하심정抑何心情도 작용 되었겠지만 선량한 의지가 담긴 구호다. 꿈대로 다 될 수는 없겠지만 지극한 용기다. 시간과 영원 삶과 죽음 카피된 일상과 전율 소유와 존재 그리고 애증까지, 뭉뚱그려 안고 깊은 강을 건너는 우리. 흐르는 것은 강물이 아니라 정작 자신이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 하는 누구의 묘비명처럼 코믹하게 그러나 아쉽게 끝나는 생生이지만 원초적 자극을 주고 싶다.

 

2005년 초, 여고동창생의 소개로 나는 사이버 문학공간을 만났다. 그리고 인터넷 시인이 되었다. 한 동안 가상세계와 현실세계가 뒤바뀌어 애매모호한 시간을 경험하였다. 한시적 즐거움도 있었다. 두 세계에도 공통점이 있었다. 누구나 선생이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과 인터넷에 노출된 여성들 대부분의 의존 심리가 그것이다. 자유란 새장의 안팎 경계에 따라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미숙아인 나에게도 그런 선생들이 다녀갔다. 유형도 가지각색이었다.

 

첫째 선생은 허구한 날 그리움 시를 써서 올려주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정말 시詩인가 부다 하고, 남의 그리움을 내 것처럼 심심찮게 짜깁기도 하였다. 두 번째 선생은 칭찬에 몹시 궁한 사람이었다. 명분 뚜렷한 이름에 똥칠이나 하고 다닌다며 가는 곳마다 따라와서는 야단을 쳤다. 솔직히 그때도 나는 진정한 내 이름을 알지 못했기에 그의 운운云云함은 의미가 없었다. 세 번째 선생은 프로필로 자신을 포장한 사람이었다. 교활했다. 속된 말로 작업조가 아니었을까. 솔직성이 녹아든 글이 문학이라면 욕망으로 꾸민 글은 문학이 아니다. 기형과 자폐의 모양. 그 와중에서도 문학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호텔, 델리시아스

 

세상이 생긴 이래 인간이 가졌던 기억의 양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고뇌했던, 스승 한 분을 드디어 만났다. 문학의 거봉巨峯 보르헤스가 바로 그다. “나의 꿈은 마치 당신들이 깨어 있는 것과 같지요 거울을 볼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자신의 얼굴에 깜짝 놀라고 시계 분침 뿐 아니라 시침이 움직이는 것도 감지하고 자기 몸의 부패와 충치와 피로의 미묘한 진행을 계속해서 구별해냅니다.” 세상에 대해 그토록 외로웠던 관찰자는 잠자기마저 어려웠다고 한다. 천재도 역시 연민 덩어리이다. 불면과 더위에 견디다 못한 보르헤스가 마침내 자살을 결심한다. 1935년 2월 그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가게에서 권총 한 자루를 구입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멋지게 자살하는 대중적인 탐정소설 한 권과 드라이 진 한 병을 산다. 역에 나가서 편도 차편을 끊어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인 아드로게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아드로게에 있는 라스 델리시아스('쾌락'이라는 의미)호텔을 죽음의 장소로 택한다.

 

방에 들어간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술을 따라 마신다. 구두를 벗고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드러눕는다. 구두끈을 맬 줄 몰랐던 그에게 구두를 벗는다는 사실은 긴 머무름을 의미했다. 그는 탐정소설을 읽어나간다. 이윽고 총을 꺼내 총알을 장전하지 않은 채로 자기 머리에 총구를 갖다 대고 방아쇠를 당겨본다. 찰각 소리에 그는 전율하며 순간적으로 크나큰 모순을 느낀다. 작가로 태어나 쉬지 않고 글을 써온 바로 그 손으로 방아쇠를 잡아당겨 나름대로 하나의 우주인 작가의 머리를 박살낼 수 있다니, 술기운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몹시 갈증이 난다. 갈증이 더해 갈수록 갈등도 깊어만 간다.

 

마침내 그는 자살을 감행할 용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인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창밖에선 늦여름 새벽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깨어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머리가 몹시 아팠다. 죽음이란 삶 보다 더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거장의 뒤꼍에는 자신을 잃은 후에야 얻게 된 생의 유머들이 속속 박혀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당신은 왜 쉬지 않고 쓰냐고. 그러나 어쩌면 나는 쓰는 자가 아닌 읽는 자로 남고 싶은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나를 읽고 다시 자기를 써 내려가듯 나 역시 자의의 칼로는 끝낼 수 없는 생명으로 인해 간간히 나를 읽어가는 존재인지도,

 

하늘이 금세 맑아졌다. 부유하는 먼지와 착각을 주던 눈雪의 입자들이 사라졌다. 하루에도 몇 차례 표정을 바꾸는 구름과 시간과 소리들, 그러나 비의 사선斜線들만이 자신의 정체를 알리듯 이 순간에도 무엇인가를 꾸준히 허물고 있다.

 

2009. 10. 16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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