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737

윤제림 <사랑을 놓치다> 外

1 사랑을 놓치다 ……내 한때 곳집 앞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 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2 함께 젖다 봄이 오는 강변, 빗속에 의자 하나 앉아 있습니다 의자의 무릎 위엔 젖은 손수건이 한 장 가까운 사이인 듯 고개 숙인 나무 한 그루가 의자의 어깨를 짚고 서 있지만 의자는 강물만 바라보고 앉았습니다 영 끝나버린 사랑은 아닌 것 같은데 의자는 자꾸만 울고 나무는 그냥 듣고만 있습니다 언제나 그칠까요 와락, 나무가 의자를 껴안는 광경까지 보고 싶은데 손..

운문과 산문 2022.08.26

류시화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초대 손을 내밀어 보라 다친 새를 초대하듯이 가만히 날개를 접고 있는 자신에게 상처에게 손을 내밀어 보라 언 꽃나무를 초대하듯이 숨죽이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에게 기쁨에게 그런 사람 봄이면 꽃마다 찾아가 칭찬해 주는 사람 남모르는 상처 입었어도 어투에 가시가 박혀 있지 않은 사람 숨결과 웃음이 잇닿아 있는 사람 자신이 아픔이면서 그 아픔의 치료제임을 아는 사람 이따금 방문하는 슬픔 맞아들이되 기쁨의 촉수 부러뜨리지 않는 사람 한때 부서져서 온전해질 수 있게 된 사람 사탕수수처럼 심이 거칠어도 존재 어느 층에 단맛을 간직한 사람 좋아하는 것 더 오래 좋아하기 위해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 어느 길을 가든 자신 안으로도 길을 내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기 영혼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 내어 주는 사람 아직..

운문과 산문 2022.06.29

아침의 안이

아침의 안이 / 심보선 자니 캐시가 흘러나오는 오를레앙의 카페에서 나는 한없이 안이해진다 커피를 몇 모금 마셨는데 첫 모금이 어제 일 같다 오늘 아침 빵 굽는 노인이 내게 말했다 생각은 멀어질수록 단맛으로 변하고 빵은 멀어질수록 쓴맛으로 변한다 그는 오로지 빵의 관점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 그것을 나는 아주 선량한 사람으로 여겨왔다 아침은 특히 밤에 서글서글한 미소를 띤 채 꿈의 뻣뻣한 뒷목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너는 적어도 오늘밤은 죽지 않을 거여 습관적이고 연속적인 순간들 쉽사리 떠오르는 과거들 사랑과 무관한 상실들 그런 것들을 떠벌리며 개자식들이 담배를 나눠 필 때 어쩌면 인생 전부가 여기서 간단히 끝난다 자니 캐시, 내가 명명한 오늘 아침의 이름 그는 안이하게 죽지 않았으리 아침은 그의 죽은 ..

운문과 산문 2021.10.30

2008년 겨울호

포옹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가까이.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매우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김행숙(〈서시〉, 2008년 겨울호) 월식 촉촉하게 달뜬 그녀의 몸에 나를 대자 스르르 미끄러졌습니다. 나의 첨단이 그녀의 둥근 틈 앞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말입니다. 그녀가 열었는지 내가 밀고 들어갔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사르르 눈앞이 캄캄해진 것을 보면 불어먹는다는 거,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최초의 일이 다 그렇습니다. 그 다음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만, -..

운문과 산문 2021.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