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737

[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라면 먹을래요?

[라면: 머글래요] 겉뜻- 간단한 요기나 하자는 제안 속뜻 자고 가라는 제안 주석- 바래다준 남자에게 여자가 묻는다. “라면, 먹을래요?” 소파에 나란히 앉아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여자가 다시 묻는다. “재밌는 얘기 좀 해봐요.” “라면에 소주 먹으면 맛있는데. 나 재밌는 얘기 몰라요. 원래 썰렁해요.” 그러자 여자가 대답한다. “재밌다.” 그러고는 라면을 끓이러 주방 앞으로 가서는 남자에게 자고 가라는 엉뚱한 제안을 한다. 늦은 밤이니 ‘차 한잔 하고 가요’ 대신에 요기나 하자고 제안했을 테고, 간단한 식사로 라면만 한 게 없었을 테고, 물이 끓는 짧은 시간의 어색함을 감추려고 재밌는 얘기를 해보라고 했을 테지. 그런데 거기 담긴 얘기가 제법이다. 재밌는 얘기를 하라고 했더니 남자는 소주를 먹자..

운문과 산문 2023.03.26

박준<취향의 탄생>

생각해보면 나는 환경이 바뀌는 일에 유난히 민감해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흘러도 집에 있는 가구들의 배치를 바꾸는 법이 거의 없고, 매일 저녁 아파트 주차장에서도 꼭 같은 곳에 주차를 해야 마음이 놓인다. 대학 시절, 방학이 되면 친구들은 교환학생이며 해외연수며 하는 이름들로 멀리 떠났지만 나는 늘 빈 강의실과 한적해진 도서관과 학교 앞 술집들을 지켰다. 일찍이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새 학기만 되면 나는 으레 말수가 적고 소극적인 아이로 변해 있었고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무서워 유치원 문턱에도 가지 못한 아이가 바로 나였다. 유년을 보낸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이야기도 조금 하고 싶다. 서울의 변두리 동네답게 군사보호지역에 개발제한구역, 거기에 북한산국립공원으로 묶여 있던..

운문과 산문 2023.01.31

울음 <이명윤>

마당의 수도꼭지가 얼었다 마른 소리만 낼 뿐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 물이 얼음에 갇혀 맘껏 울지 못한다 나도 모르게 울음, 울음 하고 중얼거렸다 뇌리 속에서 부표처럼 떠오르는 울음이 있다 그 해 울음은 죽음으로 요약되었고 울음은 불법이라는 포승줄에 묶여 버렸다 울음은 유족과 정부 사이의 합의로 거의 일 년 만에 땅에 묻혔다 누군가 던진 돌에 빙판 속에 갇힌 울음이 쩍, 하고 운다 허름한 제도의 벽에 갇혀 햇살 속으로 날아가지 못한 울음의 문양을 본다 실핏줄처럼 얼음 속에 박혀 있는, 세상은 울음 속에서 나온 것 울음을 만지며 울음과 놀다가 울음 속으로 사라지는 것 울음을 포박하지 마라 울음은 평화를 부르는 순한 짐승 울음은 가난한 마음의 멜로디 울음은 서로의 손수건에 맺히는 꽃 울음은 막힌 세상을 흐..

운문과 산문 2022.12.16

이응준 <명왕성에서 이별>

인류와 인공지능 기계들이 아마겟돈과 같은 전쟁을 벌인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도래할 것인가? 누구는 인류 쪽이 이기고 누구는 인공지능 기계들 쪽이 이길 거라고 제각기 나름의 일리 있는 주장들을 내놓을 터이다. 만약 내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후자가 전자를 멸망시키리라고 본다. 결코 인간이 한심해서가 아니라, 기계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그 후유증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는 영혼이 없으므로 당연히 영혼의 소모나 황폐 또한 없다. 일단 적으로 입력되어 있으니 무조건 그 적을 계산 값이 나오는 바대로 무정하게 죽이면 그만인 것이고, 적에 의해 동료가 파괴됐다고 한들 한 치도 흔들릴 까닭이 없다. 행여 인간의 증오 내지는 복수심이 기계와의 사생결단에 도움이 되리라는 반박은 가당치 않다. 작은 싸..

운문과 산문 2022.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