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어떤 이가 시장에서 낯선 사람의 발을 밟으면
공손하게 사과를 하고 설명을 덧붙인다
이곳이 너무 혼잡하군요
만일 형이 동생의 발을 밟으면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다
가장 훌륭한 예의는 모든 형식으로부터 자유롭다
완전한 행위는 관계로부터 자유롭다
완전한 지혜는 계획함이 없다
완전한 사랑은 증명함이 없다
완전한 진실성은 보증함이 없다
-辯明
위대한 모든 것, 아름다운 모든 것, 진실하고 참된 모든 것은 언제나 자연발생적이다.
계획적으로 그것들을 할 수 없다. 계획을 짜는 순간, 그때 모든 것은 가짜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그렇게 해왔다. 그대의 사랑, 진실성, 진리, 모든 것이 잘못이다. 그대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행해 왔기 때문이다. 자연발생적으로 하면 안 된다고 배워 왔기 때문이다. 계산하고, 통제하고, 자신을 잘 관리하라고, 절대로 자연적인 흐름에 따라서는 안 된다고 그대는 배웠다. 그리하여 굳어지고, 얼어붙고, 죽어버렸다.
삶은 계획을 모른다. 삶은 삶 자체로 충분하다.
나무가 어떻게 자라고, 성장하고, 어떻게 꽃피울 것인가를 계획하는가? 나무는 그냥 자랄 뿐이다. 그 자라남을 의식하지도 않으면서, 거기 스스로를 의심함이 없다. 나무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계획을 세우기 시작할 때, 그대는 자신을 나누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둘이 된다. 통제하는 하나와 통제당하는 다른 하나로. 그때 갈등이 일어나고 결코 평화로울 수 없다. 자신을 통제하는데 성공할지는 모르지만, 그곳에 평화는 없을 것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결국 그대는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이 철저히 실패했음을, 실패도 실패로 끝나고, 성공도 실패가 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하나인 것에 속한다. 아름다움은 조화로운 전체에 속한다. 모든 문화, 문명, 모든 사회가 그대를 추하게 만든다. 모든 도덕이 그대를 추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분리 위에, 통제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바알 셈 토브가 세 마리 말이 이끄는 아름다운 마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줄곧 하나의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여행을 하는 3일 동안 세 마리 말 중 어느 말도 울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그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넷째날 길을 가던 농부가 갑자기 그에게 말의 고빼를 늦추라고 소리쳤다. 그는 급히 고삐를 늦추었다. 그러자 세 마리 말이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 말들은 겨우 살아난 것이다. 고빼를 너무 잡아당겼기 때문에 3일 동안 말들은 줄곧 죽어 있었고, 죽어가고 있었다.
그대에게, 인간 전체에게 그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대는 울 수가 없다. 말이 울지 않는다면 그 말은 죽은 것이다. 말이 우는 것은 즐겁다는 것을 의미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대는 울 수가 없다. 죽어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삶은 넘쳐나는 노래도 아니고, 에너지가 흘러넘쳐 일어나는 춤도 아니다. 꽃이 피어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사치스런 일이다. 꽃이 피어남은 오직 나무가 가진 것이 너무 많을 때만 일어난다. 그것에게는 줄 필요가 나눠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대가 넘치도록 많이 가졌을 때 삶은 춤이 되고 축제가 된다.
그러나 사회는 춤과 축제를 허용하지 않는다. 사회는 그대가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갖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그대는 오로지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아갈 수 있다. 넘쳐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일단 넘쳐나면, 사회는 그대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대를 통제하길 원한다. 그것은 교묘한 지배다.
오직 그대가 춤출 때, 환희에 젖어 있을 때, 비난하지 않을 때, 그대가 흘러넘칠 때, 아무도 곁에 앉아 통제하지 않고 아무도 관리하지 않을 때, 그때 비로서 삶은 하나의 자연스런 흐름이 된다. 그 삶은 형식적이지 않다. 그 삶은 더 없이 자연스럽다. 그때 그대는 들어간다. 그때 어디에나 문이 있다. 그대는 어느 곳에서나 신의 사원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대는 일종의 정신 분열증에 걸려 있다. 정신과 의사가 진단을 내렸을 때만 정신 분열증 환자인 것은 아니다. 그대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굳이 정신과 의사가 필요 없다. 사회가 정신 분열증을 창조한다. 분리가 곧 정신분열이다. 그대는 본래 그렇지 않았었다. 본래는 하나의 전체적인 존재로 태어났다. 그런데 사회가 즉각적으로 그대를 갖고 작업하기 시작하고, 대수술이 이루어진다. 여럿으로 나눠질 때까지 그 수술이 중단없이 계속된다. 그렇게 되면 사회는 편해진다. 그대 스스로 내면에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면의 싸움을 통해 그대가 가진 에너지가 분산되며, 결코 밖으로 흘러넘치지 않는다. 그때 그대는 더 이상 위험한 존재가 아니다.
넘쳐나는 에너지는 반역이 된다. 넘쳐나는 에너지는 언제나 반역적이다. 넘쳐나는 에너지는 언제나 혁명을 시도한다. 그것은 홍수로 범람하는 강물과 같다.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도의 기본 원리 중 하나는 자연스럽게 된다면 그것이 최상의 기도라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신을 잃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신에게 가 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신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언어는 부적절한 것이다. 그것은 필요가 없다. 장자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그대 안의 전체성을 드러낼 것인가에 대해서만 말했다. 전체로 될 때 그대는 성스러워진다. 그대의 조각들이 하나로 녹아들 때, 그때 삶은 기도가 된다. 노자와 장자는 결코 기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20100212-20230810 타이핑 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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