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여래장과 열반

미송 2023. 7. 11. 11:36

 

원효대사는 열반이라는 도는 지극히 가깝고 지극히 멀다는 것을. 이 도를 증득한 사람은 굉장히 고요한가 하면 또한 굉장히 시끄럽기도 하다.”고 했다. 열반이란 무위자연과 합일한 상태이므로 가까운 것, 먼 것 모두 포함되며, 또한 지극히 현실적인 것으로 적극적이고 무위적인 연기과정에서 일어나므로 시끄럽기도 하고 조용하기도 한 것이다. 만약 계속 조용하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유위적인 것으로 한쪽 극단에 치우쳐서 진정한 열반이 못 된다.

 

생동심으로 일어나는 고()는 동적() 상태이나 염오의 생동심의 여윔은 멸도(滅道)즉 열반의 정적(靜的) 상태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대승은 소승과 같이 열반에 머물지 않고 중생을 위해 대자비(大慈悲)를 베푼다. 그래서 원효대사는 세속에서 깨달음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요약중생(饒益衆生)을 실천해야 하므로 도를 증득한 사람은 고요한 정적 상태뿐만 아니라 시끄러운 동적 상태에서도 중생제도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런 사상(思想)을 직접 실천한 사람이 신라의 원효대사이다.[중략]

 

<승만경>에서 열반을 상()이라고 보는 것이 상견(常見)이니, 정견(正見)이 아니다.”라고 했다. 생동심을 여의고 근본심을 드러내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근본심이 한번 드러나도 언제나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동심이 항상 틈만 생기면(외부 경계와 접하면) 다시 살아나서 근본심을 오염 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열반을 상견으로 생각하는 것은 올바를 견해가 아니다. 이 뜻은 한번 깨달음이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원각경>에서는 깨달은 마음을 잊지 못하거나 깨달은 마음이 아직 남아 있다면 번뇌의 씨앗이 되는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결국 깨달았다, 얻었다고 하는 것은 깨달음이란 목표를 달성했다는 데서 생기는 강한 집착심 때문에 교만한 상을 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은 깨달은 것이 못 된다. 얻어도 얻은 줄 모르고 깨달아도 깨달은 줄 모르면서 요익중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여여(如如)해야 하는 것이다.

 

용수는 윤회와 열반은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했다. 열반은 염오의 생동심의 여읨에 따를 근본심의 현현이다. 이것은 우주 생명체의 본성인 우주심으로 사후 다음 생명의 씨앗이 된다. 따라서 윤회란 우주적 생의가 염오의 생동심을 벗어나 다시 우주적 생의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열반이 윤회와 같다는 것은 본래부터 지니고 온 우주심이 다시 우주심으로 현현하여 본래대로 되돌아간다는 우주심의 윤회 즉 순환을 뜻한다. 그러므로 무여열반은 마음의 변화 상태라기보다는 존재의 다른 차원이다. 즉 염오의 생동심을 여윈 근본심으로서 우주적 존재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중략]

 

보통 열반(nirvana)은 진화의 영원한 그침, 즉 영원한 죽음으로 본다. 그러나 이 열반은 무여열반으로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의 씨앗이 되는 새로운 연기 관계로 이어진다. [중략]

 

죽은 잔해에는 성인(聖人)도 없고 범부도 없고, 선인(善人)도 없고 악인(惡人)도 없다. 별이 죽으면서 흩뿌린 잔해에서 새로운 별이 탄생하여 우주를 밝히듯이, 인간도 죽은 후 남은 잔해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어 화엄세계를 영구히 이어가도록 자비를 베풀며 순환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주심으로서 근본심을 남기는 죽음이 얼마나 청정하며 신성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죽음 앞에서 몸부림치며 요란스럽게 울부짖어야 하는가? 이것은 산 자의 집착에 따른 생동심의 발로일 뿐이다.

 

불교는 부정(否定)의 종교이다. 불교에서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고()도 낙()에 대한 부정이고, 염오는 청정에 대한 부정이다. 이런 부정을 긍정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불교의 근본 원리이다. 공성(空性)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긴 것이다. 생동심(아뢰야식)과 근본심을 가진 중생의 마음에서는 무아, 무상, , 부정(不淨)이 나타나지만, 해탈한 대열반에서는 이런 부정(否定)이 긍정으로 되어 상, , , 정으로 바뀐다. 즉 부정이 긍정으로 끌어올려진다. 한편 부정과 긍정이 분리되지 않고 융합되기 때문에 불교에서 부정은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을 위한 부정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화엄의 세계이다.

 

에리히 프롬은 종교체험은 존재의 신비나 우주와의 합일 같은 신비체험을 바탕으로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존재는 연기관계의 한 양식일 뿐이며, 그리고 우주 만물은 우주적 존재 원리에 따라서 적합한 여건이 주어지면 언제나 알맞은 사물의 존재가 발현 가능하다. 또한 우주와의 합일사상은 사사무애事事無碍와 이사무애理事無礙에 따른 화엄사상에 기반을 둔 우주적 연기사상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우주적 불교체험은 단순한 신비체험이 아니라 현실적이며 존재론적 체험이다.

 

 

 이시우<천문학자, 우주에서 붓다를 찾다>136~143쪽 일부. 타이핑 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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