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번뇌의 삶과 여래법신

미송 2023. 12. 6. 23:24

 

 

여래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좋은 환경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환경이든 상관없이 여래법신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승만경>은  생사와 번뇌가 모두 여래장에 의지한다고 한다. 우리가 미혹하거나 깨닫거나에 상관없이 우리에게 여래장이 있다고 한다면 왜 우리가 여래장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으며 왜 우리가 힘들여서 선근공덕을 쌓거나 수행을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떠오른다. 여래장은 지혜를 닦는 면과 자비로 보이는 면에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그러면 먼저<승만경> <자성청정장>의 중요한 부분을 읽어 보자.  승만 부인이 부처님 앞에서 고백한다.

부처님이시여, 태어나고 죽는 것은 여래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세간의 말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태어남이 있습니다. 여래장 자체에는 태어남과 죽음이 없습니다. 여래장은 상주불변하여 변하거나 소멸됨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래장은 귀의할 곳이며 간직해야할 것이며 세우고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만약 여래장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일을 아예 시작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첫째, 여래장이 생사의 바탕이된다. 둘째, 중생이 미혹으로 보았을 때 생사가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여래장에 있어서는 태어남과 죽음이 없다. 여래장은 상주불변한다. 셋째, 우리 중생들에게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중생들이 윤회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려는 생각을 낸다.

먼저 우리가 만들었던 질문을 생각해 보자. 여래장이 상주불변으로 있다면 왜 우리가 여래장에 대해서 알려고 해야 하느냐는 물음이다. 여래장이라고 하니까 무슨 값비싼 보석 같은 것이 우리의 가슴속 어느 곳엔가 박혀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여래란 인간존재의 진리를 인격화해서 말하는 것이다. 가장 참되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깨달음의 잠재성을 말한다.  그래서 여래장을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지금 어떤 존재 상황에 있고 어떻게 하면 괴로움이 생기고 어떻게 해야만 열반의 길이 되는가를 아는 것이 된다.

인간이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존재의 실상을 알지 못하면 얼마나 불행한가를 설명하는 예문을 본 바 있다. 여러분들도 한번 이상 보거나 들었을 것이다. 한 할머니가 33세 때에 6.25전쟁이 터졌다. 할머니는 인민군에게 쫓겨서 집으로 들어온 한 국군 병사에게 옷 한 벌을 주었다. 국군에게 옷을 준 사실이 인민군에게 옷을 준 것으로 모함을 받았고, 따라서 빨갱이로 취급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다.    
군사재판에서 그 할머니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3년간의 옥살이를 했다.

KBS 제1텔레비전의 'TV 신문고'에 출연한 그 할머니는 "과거의 억울한 옥살이는 이제 어쩔 수 없지만 누명이라도 벗을 수 있도록 자신에게 옷 한 벌을 받은 분이 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면 연락을 해달라."는 호소를 했다. 그런데 그 방송을 보고 한 노인이 방송사에 찾아왔다. 그 노인은 그 할머니에게서 옷을 얻어 입은 적이 있다는 당시의 사실을 증명했다. 그때의 23세 군인은 지금 노인이 되었다.

그런데 나라에서 그 할머니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과거의 재판 기록을 조사해 보니 그 할머니의 죄목은 옷을 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하숙집에 살고 있던 3명을 인민군에게 신고했다는 것이라고 한다. 재판기록을 볼 때 그 할머니는 억울한 분이 아니었다. 그 할머니가 억울함을 허구로 만든 셈이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억울한 환경을 가정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지어낸 억울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여래장을 설명하는 데 쓰겠다.

여러분은 필리핀 숲속에서 30여 년 혼자 살아온 한 일본군 병사의 이야기도 들었을 것이다. 필리핀에 파견된 한 일본군 병사는 1945년에 일본이 항복한 뒤에도 전쟁이 끝난 사실을 알지 못했다.  10여 년 전까지도 전쟁중인 것으로 생각한 그는 혼자서 30년이 넘도록 필리핀에 있는 한 산속에서 숨어 지냈다. 그 병사는 무엇인가 먹을 것을 구하려고 인가에 몰래 드나들다가 사람들에게 들켰다. 그래서 마침내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옷 한 벌을 쫓겨온 군인에게 주었다는 이유로 23년 간 감옥에서 보냈다고 하는 할머니의 꾸며낸 이야기나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르고 이국의 산속에서 30년 이상 혼자 살아온 일본군 병사의 이야기는 어떤 개인의 무지보다는 온 인류 전체의 미혹무명이 만들어낸 기막힌 비극이다.

우리는 세계 모든 인류의 미혹에 찬 삼독심에 대해서 우선 당장 어찌할 수 없다. 여래장을 공부하고 있는 우리의 문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할머니나 일본군 병사의 처지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이다. 현재의 우리는 그 할머니처럼 불행한 외형을 살고 있지는 않다.  23년간 감옥살이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불행을 구태여 끄집어내기로 말하면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불행한 처지의 사람들이다.

한 면에서 행복하다고 하더라도 다른 면에서 불행한 처지일 수가 있다.  우리가 할머니처럼 23년 동안 육체적으로 감옥살이를 하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감옥의 처지에 있을 수도 있다. 태평양전쟁이나 6.25전쟁 기간에만 불행의 처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곳에 불행의 요소는 상존하고 있다. 다만 그 할머니가 겪은 불행한 처지에 비해 우리는 상대적으로 보다 좋은 처지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아무래도 좋다. 우리의 물음은 우리가 할머니에 의해 꾸며진 불행한 처지에 있다고 가정할 때 환경이 우리를 몰아붙이는 대로 불행하게 살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여래법신을 품고 있는 우리는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야 할 처지가 좋지 않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도 같이 불행해질 수는 없다. 행복과 불행의 결정은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하는 것이다.''        

불행한 환경을 억지로 좋다고 생각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처해 있는 환경을 있는 그대로 여실히 보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할머니의 경우처럼 아무리 억울하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한다.

필자는 그 할머니가 꾸며낸 삶이 불행했다고만 단정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 그 할머니는 극적인 삶을 이야기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았다. 우리가 연극이나 영화나 소설이나 드라마를 만들면서 어떤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자 한다면 태어나서 유복하게 잘 자라고 시집 잘 가고 애기 낳고 잘살다가 돌아가신 할머니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옷 한 벌 때문에 23년간을 감옥에서 사신 그 할머니를 선택할 것이다.

여래장이 우리에게 갖추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여래가 될 성품이 있다는 말이다. 여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환경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환경이든 상관없이 시시처처에서 삶의 실상을 보고 자신에게 항상 있는 여래법신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외형적 환경에 얽매이거나 의존해서 자신의 평화를 얻을 수는 없다.  최후의 평화는 오직 내면으로부터 얻어질 수밖에 없다.

외형에 의해서 얻어진 행복은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 곧장 무너져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여래장이 있다는 말은 궁극적인 행복의 열쇠가 바로 나 자신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에게 본래로 갖추어진 여래장을 알아야 할 이유는 최종적인 평화가 안으로부터 얻어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여래장을 얻어야만 외형을 찾아서 방황하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내적으로 여래장의 잠재능력을 발휘하게 함으로써 열반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현실생활 환경의 개선을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여래의 법신을 중생이 볼 수 있도록 선근공덕을 짓는 것이 바로 전법이요, 자비이다.

수행의 면에 있어서는 내부로부터 찾아야 하지만, 자비와 전법의 면에 있어서는 형상이나 이름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물질적 역사로 보여야 한다. 그래서 승만 부인은 한편으로 여래장은 태어남과 죽음이 없이 상주불변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래장이 생사의 바탕이 된다고 한다. 수행 면에서 생사를 지우고 자비의 역사 면에서 생사를 펼쳐야 한다는 뜻이다.

필자와 모든 사람들이 저 할머니가 겪은 비극을 슬퍼하고 해탈의 이상을 꿈꾼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본래로 여래장이 갖추어져 있음을 증명해 준다.

석지명<인간의 완성> P44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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