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아와 무아 (열반경2)

미송 2023. 12. 7. 23:56

 

'나라고 하는 것을 손가락이나 겨자씨처럼 실체적인 것으로 알기 때문에 무아라고 한다. 그리고 진정한 '나'가 없음은 아니다.

 

사법인에서는 '나'가 없다는 무아를 가르치던 부처님이 열반의 특징을 나타내는 상락아정에서는 왜 다시'나'를 가르치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제자가 부처님에게 여쭌다.

부처님께서는 진정한 상락아정을 누리고 계신데, 어째서 일 겁 동안만이라도 이 세상에 더 머무시면서 더 많은 가르침을 중생들에게 펴지 않으시고 열반에 들려고 하십니까?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전에 '모든 사물은 실체적인 나가 없으니 이것을 배워서 나에 대한 관념을 버려라. 나라는 생각을 버리면 교만심이 없어지고 교만심이 없어지면 곧 열반에 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다시 상락아정을 누리시는데 그중에 아라는 것이 바로 나에 대한 관념이 아닙니까?  어떻게 나가 없다는 무아와 진정한 나가 있다는 아를 동시에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옛날에는 무아를 가르치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즈음에는 다시 '나'라는 관념을 열반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누린다니, '나'가 없다는 것과 '나'가 있다는 정반대의 말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겠느냐는질문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을 직접 들어보자.

네가 중요한 것을 물었다. 내가 이제 비유로써 너에게 일러주리라. 어느 나라의 국왕 밑에 한 엉터리 의사가 있었는데 그 의사는 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느니라. 그 의사는 누가 아프다고 하면 병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으므로 무조건 우유로 만든 약을  썼느니라. 그 의사가 병을 진찰한다고 해도 다른 수는 없을 것이니라. 왜냐하면 그 의사는 아무 병에나 우유 약을 쓰기 때문이니라. 그 나라의 왕도 그 의사의 약 쓰는 법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느니라.

그러던 중 한 지혜로운 양의가 왕을 만날 기회가 있었느니라. 새 의사는 모든 병에 우유로 된 약을 똑같이 쓰는 것이 옳지 않음을 설명하였느니라. 왕이 들어보니 새 의사의 말이 옳은 것 같았느니라. 왕은 먼저 의사를 파면하고 새 의사를 채용함과 동시에 전국에 엉터리 의사가 조제한 우유로 된 약을 모두 폐기하도록 명령하였느니라. 새 의사는 그 후로 가지가지 좋은 약을 조제하여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쳤느니라. 그런데 어느 날 국왕이 병으로 드러눕게 되었느니라. 국왕의 병세를 진찰해 본 새 의사는 이 병은 우유로 만든 약을 써야 된다고 국왕에게 말했느니라. 국왕은 어이가 없었느니라. 새 의사 자신이 엉터리의사의 조제법으로 만든 우유 약은 잘못되었으니 모두 폐기해야 한다고 말해놓고 이제 와서 왕 자신이 병이 들었는데 다시 우유로 만든 약을 써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었느니라.

"네가 미쳤느냐, 정신이 빠졌느냐? 아니면 나를 속이거나 놀리는 것이냐? 그전에는 우유로 만든 약을 쓰면 안 된다고 하더니 우유로 만든 약이라야 나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니 도대체 무슨 말이냐?"

"국왕이시여, 벌레가 나뭇잎을 파먹다가 글자의 형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벌레는 그것이 글자인 줄을 모릅니다. 대왕이여, 그전 의사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가지 병을 구별하지 못하고 그저 우유로 만든 약만 먹게 하여 그 약이 듣는지 아니 듣는지도 모릅니다. 벌레가 자신이 파놓은 글자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우유로 쓰는 약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독약도 되고 양약도 됩니다. 대왕의 병에는 이 우유로 만든 약이 필요합니다."

왕은 새 의사의 말대로 우유로 조제한 약을 먹고 병이 나았느니라.
비구들아, 여래도 이 의사와 같느니라. 큰 의원이 되어 이 세상에 나타나서 모든 엉터리 의원을 항복받고 중생을 조복하여 무아의 도리를 설하였느니라. 범부의 마음과 외도의 마음이 만드는 '나'는 벌레가 만드는 글자와 같아서 아무 의미가 없는 까닭이니라. 나는 저 어진 의원이 우유가 해가 될 때와 약이 될 때를 알아서 우유를 쓰는 것과 같이 '나'라는 아가 해가 될 때와 이익이 될 때를 알아서 '나'를 설하는 것이니라.

범부의 외도는 '나'라고 하는 것을 손가락이나 겨자씨처럼 실체적인 것으로 알기 때문에 내가 무아라고 하느니라. 그러나 진정한 '나'가 없는 것은 아니니라. 만일 깨달음의 법으로서 진실로 상주하고 자재불변하여 있다면 이것은 나라고 이름 할 것이니라. 너희들은 진실한 나의 법을 닦도록 하여라.

부처님은 나'가 없음을 가르치다가, 반대로 '나'가 있음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두 가지의 비유를 한꺼번에 든다. 벌레가 나뭇잎을 파먹다가 글자를 만들지만 그것이 글자인 줄을 모르듯이 엉터리 의원이 무조건 우유로 만든 약이 좋다고 하면서 우유 약을 조제한다면 그 약은 양의가 조제한 약과 재료와 모양과 이름이 비슷하지만 그 엉터리 의원은 우유약이나 병에 대해서 알지 못함과 같다.

마찬가지로 욕망에 찬 중생이나 삿된 외도들이 '나'가 있다는 것을 말할 때 그'나'가 있다는 말이 부처님이 열반사덕으로 설하는 '나'라는 말과 같기는 하지만 중생이 말하는 실체로서의 '나'와 부처님이 말하는 진리로서의 '나'가 전혀 다르고, 중생들은 자신이 말하는 '나'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부처님이 가르치는 '나'는 더욱이 헤아릴 수도 없다고 한다.

먼저 무아를 공부할 때 두 종류의 '나'를 정리했었다. 한 가지는 편의상으로 부르는 호칭으로서의 상식적인 '나'와 다른 한 가지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실체적인 '나'이다. 부처님은 호칭으로 부르는 임시적인 '나'는 인정하지만, 영원불멸의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두가지의 '나'라고 하지만, 한 가지의 '나'는 내용이 없는 '나'이기 때문에 없는 것이요, 또 한 가지의 '나'는 실체적인 것으로 인연법이나 공사상에 의해서 부정되기 때문에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열반경>에서 부처님은 열반의 덕으로 '나'를 내세운다. '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처님이 있다고 하는 '나'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나'는 우리가 보통 경험하는 그런 종류의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나'는 인간의 불성을 믿는 '나'이다.

얼마 전에 필자는 결혼식의 주례를 섰다. 결혼하는 신랑은 오랜 기간 동안 극악무도한 깡패의 집단에 속해서 많은 폭력을 휘두르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 바닥을 떠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전형적인 폭력배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경우를 따지려고 해도 그 말을 듣는 시늉도 아니 하고 오직 억지로 윽박지르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필자에게 실토했다. 자기의 의식이 아무리 듣지 않으려고 해도 자신의 심층의식은 옳고 그른 것을 끊임없이 판단하다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이 폭력을 휘두르던 동료들의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래서 누가 좋은 말을 할 때에 상스러운 말을 내뱉어서 상대의 말을 막거나, 다른 장소에서 동료들끼리 옳고 그름에 대해서 관찰을 교환하거나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마음의 한구석에는 자신을 관찰하는 눈이 있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밤 2시가 넘은 뒤에도 생수를 담기 위해서 절 마당에 고성을 내면서 들어오는 이들을 불친절하게 대한 적이 있다. 부처님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이,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는 이 등에 대해서 짜증스러운 태도로 대한 적이 있다. 그런 경우, 그 당시의 상황에만 취해서 상대가 불성을 가진 부처가 될 수 있는 사람임을 깜빡 잊은 것이다. 부처님이라면 부드러운 음성과 태도를 보이면서도 그들의 마음에 큰 글씨를 또렷하게 새겨 놓는 방편을 쓰셨을 것이다. 함부로 행동하고 고성을 지르는 사람들도 그들의 심층의식 한구석에서는 자신과 남의 깊고 옅은 마음을 계속해서 관찰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느 순간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보살의 마음을 가지고 보살의 행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열반의 한 덕으로서의 '나'는 나와 남을 가르고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는 사람과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르는 그러한 분열된 '나'가 아니다. 남에게서 '나'를 보고 '나'에게서 남을 보는, 중생의 병을 자신의 병으로 앓는 그러한 '나'이다.

그래서 상락아정이 단순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것이 아니라 법신이 항상하고 열반이 즐겁고 여래가 '나'이고 정법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소갈머리 없는 변덕쟁이 '나'가 아니라, 존재의 실상을 그대로 보는 여래로서의 '나'이다. 진리를 행동하는 자로서의 '나'라는 말씀이다. 이 같은 '나'는 인연법, 무아, 공사상, 참사상, 일체중생 실유불성 등의 정신과 그대로 일치한다.


석지명<인간의 완성> p457-463




'철학과 신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하지 않는 성품(능엄경2)  (1) 2023.12.31
삼성(해심밀경2)  (0) 2023.12.13
번뇌의 삶과 여래법신  (2) 2023.12.06
오쇼의 장자 강의『관계로부터의 자유』  (0) 2023.08.10
여래장과 열반  (0) 2023.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