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1992년 어느 날 터키의 한 농촌마을에서 테비크 에센크라는 쇠약한 농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곁에서는 녹음기를 든 언어학자들이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에센크가 숨지고, 그의 묘지에는 이미 8년 전 에센크 스스로 써 놓은 묘비가 세워졌습니다.
- 이곳은 테비크 에센크의 무덤, 그는 우비크라는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최후의 인물이었다.
그로부터 4년 뒤, 미국의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는 붉은천둥구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메리카 인디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역시 사라져가는 언어의 마지막 목소리, 자기 부족의 언어도 함께 무덤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지난 5백 년간,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의 언어들 중 거의 절반가량이 사라졌습니다. 에트루리아어, 수메르어, 컴브리아어, 메로에어, 콘월어, 음바바람어....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곳곳에서 수많은 언어들이 사라져 가고 있겠지요. 그리고 그 소멸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대신 그 빈자리를 가공할 만큼 먹성이 좋은 포식언어 영어와 또 하나의 언어, 그러나 기왕에 존재했던 어떤 언어와도 전혀 다른 종류의 기계어 ‘비트’가 메워 나가는 중입니다.
한 가지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한 집단의 기억이 최후를 맞이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성실한 언어학자들의 노력으로 운 좋게 몇몇 단어가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살아 있는 언어가 아닙니다. 언어는 언어학자의 노트 속에서는 결코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에센크의 자손들이 우비크어를 쓰지 않으면, 그 순간 우비크어는 죽은 언어, 백만 년 전에 멸종된 공룡처럼 단지 화석으로만 남는 화석언어가 되는 것이지요. 에센크의 자손들은 죽은 아버지를 기억하겠지만, 불행히도 그때 그 기억은 우비크어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비크어로 이루어지지 않는 기억 속에서, 우비크어를 사용했던 종족의 생생한 기억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비단 언어의 운명만 이렇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사라져가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사라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진화의 과정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소멸이 너무 광범하게 이루어지고 속도 또한 너무 빠르다는 데 있습니다. 때로는 소멸의 속도를 늦추고자 안간힘을 쓰는 노력 자체가 오히려 속도를 더 빠르게 만들기도 하지요. 20세기에 들어 인간은 천연두를 극복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의 인간은 천연두보다 몇 배나 무서운 질병을 수두룩하게 목격하고 있습니다. 암, 에이즈, 조류 독감, 신종 플루 등등.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지구를 독점하려는 인간의 탐욕 때문이라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한 인디언 추장이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하늘을, 땅의 체온을 사고 팔 수 있습니까. 그러한 생각은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신선한 공기나 반짝이는 물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그것들을 우리한테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땅의 구석구석은 우리 백성들에게는 신성합니다. 저 빛나는 솔잎들이며 해변의 모래톱이며 어두침침한 숲 속의 안개며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은 우리 백성들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 성스러운 것들입니다.”
(우리나라에는 70년대 말 [대화]라는 잡지에 한 해직기자가 처음 번역해 실은 이 글을 이제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후 진위 여부에 대해 논란도 존재합니다만, 저로서는 믿고 싶습니다. 그랬을 것 같으니까요.)
백인들의 ‘개척 시대’가 거의 끝나가고 있던 무렵, 수와미족 인디언 추장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고 사태를 수습하고 싶다는 백인 추장(피어스 대통령)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땅을 팔라는 반강제적 제의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당황했습니다. 너무나 생소했기 때문이지요. 그에게, 그리고 그의 부족에게 땅은 누군가가 소유해서 쓰고 싶을 때 얼마든지 꺼내 쓰고 용도가 다했다 싶으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땅은, 땅의 체온은, 아득한 시간의 흔적이요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아직 오지 않은 추억이기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지나간 그 시간의 흔적과 아직 오지 않은 추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었습니다.
“짐승들이 없다면 인간은 무엇입니까. 만일 짐승들이 사라져버린다면 인간은 커다란 영혼의 고독 때문에 죽게 될 것입니다.”
수와미족의 추장은 수많은 종(種)의 폐허 위에 황홀한 신세계를 건설하려는 열망의 현실적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신생 미국의 추장에게 땅을 건네줍니다. 그가 대가로 요구한 것은 당연히 돈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그 땅을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왔는지 한번만이라도 생각해 달라는 부탁뿐.
“지상에서 마지막 인디언들이 사라지고 오직 광야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구름의 그림자만이 남더라도 이 해변들과 숲들은 여전히 우리 백성들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과연 미국은 그 땅 위에 얼마나 황홀한 신세계를 구축했을까요.
2005년, 재선에 성공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첫 마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연히 이길 줄 알았으며, 지금 너무 행복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참으로 섬뜩했습니다. 나는, 행복하다는 말이 그토록 위험한 말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앞에는 ‘4대강의 신화’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홍수를 막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관광산업을 활성화하고, 강변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조깅을 하게 함으로써 주민 건강을 증진시키고.... ‘녹색성장’이라는 기치 아래 펼쳐지는 4대강의 청사진은 참으로 행복해 보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리고 무수히 많은 내 벗들은 도무지 그런 행복을 누리려 하지 않는 것인지요.
고백할 게 있습니다.
처음 수경 스님과 도법 스님이 3보 1배 먼 길을 떠나기로 했을 때, 그리고 그 곁에서 절친한 벗 박남준 시인과 이원규 시인이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 하기로 했을 때, 나는 크게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때마침 섬진강변에 살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이제 스님들의 무릎은 망가지고, 박남준 시인의 머리는 백발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 ‘[내일을 여는 작가] 2010년 봄 정간호- 거리에서’ 행사를 위해 올라온 박남준 시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사무총장인 나는 그의 시를 잡지에 실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먼 길 올라와 그 시를 읽어달라고 부탁했지요. 원고료도 못 주고, 차비도 물론 못 주었습니다. 뒤풀이 자리에서 박남준 시인은 3만원인가를 보탰습니다. 그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한 달 생활비가 얼마인지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받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그는 마사지기를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어디서 잤을지, 나는 물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어차피 숙소 비용도 주지 못했으니까요. 그가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그 이튿날 여주 남한강변에서 열릴 여강선원 개원식에 참석하는 모습을 그려보았을 뿐입니다.
얼마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만났습니다. 우리 쪽에서는 이사장님과 이경자 자문위원, 고영직 대변인이 저와 함께 참석했습니다. 장관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자리를 갖자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번 사태의 원인이 된, 기획재정부의 [2010년도 예산 및 기금운용 집행지침]을 철회하는 것만이 문제를 푸는 길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거기에 대해 장관이 어떤 대답을 했을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처음 만나 뵌 장관은 아주 활발하고 의욕이 넘쳐 보였습니다. 물론 사심 같은 건 읽을 수 없었지요. 어떤 일이든 일을 잘해 나가실 분 같아 보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나는 그런 모습이 조금 두려웠노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분이 열심히 일하시면 일하실수록, 내가 알고 있던 ‘행복’이라는 단어가 전혀 다른 뜻으로 번역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뚝거리면서 서울의 화려한 밤거리 뒷골목 어디론가 사라지는 내 벗을 떠올리며, 나는 기꺼이 그 ‘행복’이라는 단어를 내 생의 사전에서 지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확인서니, 보조금이니, 문예위원회니, 문화체육관광부니, 예산지침이니, 그 따위 것들,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장, 강이 처참하게 망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아주 빠르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망가지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나마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것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예의로 강을 기억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합니다.
저항한다면, 이제,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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