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의 작품

그러한 줄 그런 줄 모르고

미송 2010. 4. 12. 23:44

그러한 줄 그런 줄 모르고 / 이정문

 

 

법당 앞에 서면 험한 봉우리가 겹겹이 어깨를 포갠 풍광이 눈에 들어오고 좌우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물기 오른 철쭉이 벌써 꽃망울을 머금고 있다. 대지는 바야흐로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다음 계절의 행보를 또 준비하는 모양이다. 촉촉한 나뭇가지가 바쁘게 보인다. 계단을 내려와서 뜰을 바라보니 완성은 되었으나 아직 세워지지 않은 비석이 누워 있었는데 ‘o o o 공덕비’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절을 세운 사람의 공덕을 기리는 뜻일 것이다. 뜰을 돌아 걸어가니 돈황의 석굴처럼 동굴을 파고 입구를 바위로 둘러 친 삼성각이 보인다. 산신과 칠성님 그리고 홀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나반존자를 모시는 이곳에는 91세가 된 할머니 한 분이 하얀 거적 데기 모양 엎드려 있다. 느린 걸음에도 한 여름의 강아지처럼 숨을 껄떡거리는 할머니의 꼭뒤에는 벌써 저승사자가 와 붙은 느낌이다. 영험한 산신령도 명줄을 관장하는 칠성님도, 천태산에서 독각하여 한 손에 불로초를 쥐고 있는 독성님도 이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자고로 사람의 수명이란 그 끝이 분명한 법이다. 누워 있는 공덕비는 세워 질 날을 기다린다.

 

할머니가 젊었을 때에는 제법 총명하고 기민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옛날에는 외딴집 조그만 식당에 불과했었던 이 건물을 인수하여 수리하고 보수하고 터를 넓히고 이층으로 만들어서, 그 위에 대웅전을 짓고 뒤로는 료사채와 삼성각을 들이고, 또 조그만 연못도 파고 주차장도 닦아서 제법 절다운 모습을 갖추게 했으니, 보통 여자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인 것이다. 더구나 할머니는 혈혈단신이라서 피붙이라곤 찾아 볼 수도 없다하니 원래 돈이 많아서 절을 들인 것도 아니요, 누구의 도움이 특별해서 이룩한 일도 아니니, 짐작컨대 허름한 건물에 스님을 초빙하여 여러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이리저리 엮어서 불사에 필요한 돈을 마련했을 터이다. 귀가 어두워서 큰 소리만 알아듣고 자주 오는 신도들의 얼굴도 깜빡깜빡 잊어버리지만, “내 귀가 이제 안 들리고, 사람들의 얼굴도 자꾸 잊어버려서 알아보지를 못해.”라고 자기 몸의 상태를 전달하는 것으로 봐서는 아직 총명기가 여전하다. 나는 할머니와 마주 앉아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어루만지듯 그녀의 앙상한 손을 붙잡아 쓰다듬었다. 손마디마다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었음을 의식했을까, 약간 수줍은 듯, 뭔가를 숨기려는 듯, 할머니의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오늘 죽는가 하여 눈을 감았다가 뜨면 또 해가 뜨고, 빨리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눈을 뜨면 또 해가 중천이고... 정말 사는 게 힘들고 징그러워.”라고 할머니는 푸념을 한다. 그러나 스님을 비롯하여 절에 기거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냉랭하였다. 저 말이 다 거짓말이라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날마다 법당이나 삼성각에 들어앉아서 오래 살게 해 달라고, 제발 죽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통곡하는 그 모습이 안 됐다 못해서 처연하기까지 하다는 말이었다.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말, 장사꾼이 본전에 판다는 말, 그리고 노인이 빨리 죽어야 하겠다는 말은 삼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 모친상을 치룬 친구가 하염없는 표정으로 어머니의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 했다. 평소에 입만 열면 빨리 죽어야겠다던 어머니가 막상 죽음을 선언한 의사의 손을 꼭 붙들고는 “제발 살려 주세요. 목숨만 살려 주세요.”라며 매달리더라는 것이다. 팔순을 훌쩍 뛰어넘어 살만큼 산 분이, 더 이상 살아봐야 병마에 시달릴 일뿐이 없는 분이, 죽음에 의연하여 어서어서 죽겠다고 공공연히 말하시던 분이, 한 순간에 무너지며 초라한 모습을 연출하자 자식의 마음도 먹먹했던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모든 의견은 내일 곧 죽을 염려가 없는 사람들이 나누는 식탁의 대화일 뿐이다. 죽음에 임박한 자들에게는 의견이 없다. 선택의 여지도 없다.

 

할머니에게는 죽음 외에 다른 고민이 있었다. 처연하다면 이것이 더욱 처연하여, 내 짐작이 맞는다면 평생을 고생하여 이룩해 놓은 절에 대한 소유권이다. 절이라는 팻말을 입구에 갖다 붙였던 옛날에는 볼품이 없었지만 도시가 팽창하여 턱밑에까지 차 들어오자 부동산 값이 치솟았고 운영에 따라서는 지금보다 몇 배나 더 큰 사찰로도 번창할 수 있기에, 그냥 손 놓고 훌쩍 떠나기가 어려울 테니, 떠난다 해도 절을 마땅히 물려줄 피붙이 하나 믿을 사람 하나 없을 테니, 날마다 뜨는 해가 점점 흐릿해가기만 하고 산신령도 칠성님도 독성님도 다 벽지의 그림에 불과한 것 같으니, 이야기 끝에 붉어지는 할머니의 눈시울과 깊은 밤의 통곡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닌 것이다. 삶은 집착의 결과이고 집착의 행로인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이 사람에게 내 절을 물려주겠다, 저 사람에게 물려주겠다, 또는 이 스님이 내 아들이다, 저 스님이 내 아들이다, 라고 마치 절을 곧 물려줄 것처럼 여러 사람을 현혹시켜 왔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절에 헌신하여 봉사하기도 했으나 얼마 후에 떠나버렸고, 아직도 할머니는 상속자를 정하지 못하여 이번에는 밥하는 공양주에게 절을 물려주겠다고 말한다. 물론 할머니의 변죽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 모습이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인 원숭이 같아서 자못 서글퍼지는 것이다.

 

재산이나 명예가 하나도 없다 함은 홀가분하기가 그지없어 아무리 돈을 뿌려도 재산이 바닥이 나지 않는 부자와 같을 수도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무 재산이나 명예가 없다는 자체마저도 의식치 못한다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이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마음으로까지 확대되어 할머니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도, 어떤 죽음의 자세가 좋겠는가를 분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애착에 매달려 울고불고 하다가 끌려가건 법정스님처럼 초연하게 눈을 감던 죽음은 완벽한 소멸이고 끝장이라서 입을 한 번 열었다 다물면 적막강산인 것이다. 석가는 제자에게 긴 설법을 하였다. 그런 후에 물었다. “내가 너에게 행한 설법이 있느뇨?” 현명한 제자는 대답했다. “스승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석가는 기뻐했다. “나는 너에게 전한 법도 없고 설법을 한 사람도 없고 그것을 들은 사람도 없다.” 이는 집착과 분별을 없앤 궁극의 경지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깨달음을 준 자도 없으며 깨달은 자도 없고, 깨달음도 없는 것이려니, 나는 절을 내려오며 먼 산을 바라봤다. 가끔 내가 읊조리는 “저 산이 너무 좋다.”라는 말. 어찌 죽어도 좋으니 뼛가루를 저 산에 뿌려달라는 내 유언임을 아내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알아챘을 것이다. 가난마저도 가난한 줄 모르게 살다가 죽음마저도 죽는 줄 모르게 받아들여, 여름날의 나무 그늘 아래 한 점 시원한 바람이 되고 싶은...

 

(2010. 사월 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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