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분노, 환경과 가이아 여신
이 정문
최초이고 불멸의 원리이며 최초의 힘이고 무엇이든지 터뜨려낼 수 있는 불멸의 에너지인 카오스는 그 혼돈 속에서 암흑의 남신 에레고스와 밤의 여신 닉스를 결합시켜 최초의 빛, 낮의 신 아이테르와 공기의 신 헤메라를 낳았다. 그러자 가벼운 물질은 위로 떠올라 하늘이 되었고 무거운 물질은 서서히 가라앉아서 만물의 어머니이며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Gaea)가 되었다. 대지의 여신은 스스로가 생산하여 모두가 나누어 갖게 하는 자비로움의 상징이다. 또한 종족을 만들어내고 번성시키는 다산의 여신이다. 모든 신화에 산재한 처녀출생의 기원은 가이아가 스스로 우라노스(Uranos)라는 아들을 잉태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라노스는 하늘의 신이 되었고 자기를 낳아준 가이아와 결혼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어머니인 가이아의 시련과 분노가 시작된다.
태양이 고단한 행보를 마치고 서쪽 지평선에 몸을 뉘일 즈음, 하늘의 신 우라노스는 대지로 내려와 가이아와 한 몸이 된다. 잉태의 밤이 또 시작된다. 그리하여 둘 사이에는 티탄(Titan)신인 여섯 명의 아들과 여섯 명의 딸이 출생하고, 그 뒤를 이어서 성질이 포악하고 외모마저 흉측한 외눈박이 키클롭스 삼형제가 태어났다. 또한 한 몸에 백 개의 팔이 달린 헤가톤케이레스 삼형제가 태어나니 이들의 성질 또한 포악하고 무자비하여 아버지인 우라노스와 어머니인 가이아도 어찌해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우라노스는 말썽쟁이에다가 외모가 이상한 여섯 자식들을 미워하고 구박하다 못해 타르타로스라는 무한지옥에 가두어 버렸다. 타르타로스는 빛줄기 하나 없는 음습한 땅 속에 있다. 이는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의 뱃속에 다시 아이들을 집어넣는 결과였다. 만물을 포용하고 키우는 자비의 여신인 가이아는 그가 가진 자비만큼 분노했다. 아무리 못나고 말썽꾼이라도 그렇지, 다 제 핏줄을 가지고 태어난 자식들이 아닌가. 괴물처럼 태어난 흉측한 모습도 안 됐고 서러운데 뻑 하면 그들에게 욕지거리나 퍼붓고 쥐어박다 못해서 이제는 영원한 지옥 속에 가두어버리다니, 더구나 퀴클롭스 삼형제는 각각 천둥, 벼락, 번개를 휘두르는 괴력을 가졌고 헤가톤케이레스 삼형제는 각각 백 개의 팔을 가졌기에, 이들이 살려달라고 뱃속에서 휘두르는 천둥과 벼락과 번개, 그리고 삼백 개의 억센 팔매질에 어머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태양이 고단한 행보를 마치고 서쪽 지평선에 몸을 뉘일 즈음, 여전히 우라노스는 대지로 내려와 분노에 찬 가이아를 끌어안았다. 가이아에게는 모멸의 밤이었고 두려운 잉태였다. 견디다 못한 가이아는 남편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이는 자신의 사랑과 잉태를 포기하고 모정을 선택한 자비로운 여신의 본질이었다. 가이아는 자신의 몸 속 광맥에서 쇠붙이를 취하여 번쩍번쩍 빛을 발하는 낫을 만들어 티탄(Titan)신인 열두 자식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엄숙하지만 간절한 표정으로 도움을 구했다.
“태양이 행보를 마치고 서쪽 지평선에 몸을 뉘일 즈음, 하늘의 신 우라노스가 내 몸으로 내려와 잉태의 밤을 시작한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네 형제인 퀴클롭스들과 헤가톤케이레스들이 이 어미의 몸속 지옥에 갇혀 있지 않느냐, 귀한 너희들과 같은 네 형제들이 지금도 내 뱃속에서 구해달라고 아우성들이기에 어미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라노스는 밤마다 그 짓거리나 하려고 대들지 이런 아픔을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그러니 할 수 없다. 이제는 원수 같은 우라노스를 밤마다 맞아들여 더 이상 잉태하기도 싫으니 누가 네 아비의 거시기를 잘라 거세해 버리겠느냐?”
가이아의 말에 열두 티탄 신들은 입을 못 열었다. 아버지인 우라노스가 어떤 신인가, 하늘을 지배하는 신의 제왕이며 그 눈에 벗어나면 무지막지한 주먹에 얻어맞아 죽음뿐이다. 머뭇대는 자식들 앞에서 가이아는 하나의 협상카드를 제시했다.
“너희들에게 거저 해달라는 말이 아니다. 아버지를 거세하고 내 뱃속에 갇힌 퀴클롭스들과 헤가톤케이레스들을 빛의 세계로 이끈 자에게 나는 아버지의 권좌인 신의 제왕자리를 물려주겠다.”
그래도 자식들을 굽어보는 가이아의 눈빛만 번들거릴 뿐 좀처럼 누가 썩 나설 기미가 없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 구석에 앉아있던 막내가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 크로노스(Cronos)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어머니의 손에 들린 낫을 주십시오.”
태양이 고단한 행보를 마치고 서쪽 지평선에 몸을 뉘일 즈음, 밤마다의 사랑에 흡족하여 오늘도 하늘이 어둠을 몰고 내려와 대지에 맞닿는 저녁, 숲속에서 낫을 들고 숨어있던 크로노스는 몸을 날려서 사랑을 취하려는 우라노스의 거시기를 단숨에 잘라버렸다. 그러자 우라노스의 피가 몸을 눕히려는 태양에 분수처럼 뿜어져 석양이 되었고 대지에 떨어져 복수의 정기가 되었고 바다에 떨어져 사랑의 정기가 되었다. 거세를 당한 우라노스는 더 이상 가이아의 남편이 아니었고 신의 힘마저 다 잃어버려 세상 끝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모든 티탄 신들을 다스리는 제2대 신의 제왕은 이렇게 탄생했다.
가이아 여신은 기뻐했다. 이제 더 이상 모멸의 밤을 맞이할 일도 없을뿐더러 지옥에 갇혀서 울부짖는 퀴클롭스 삼형제와 헤가톤케이레스 삼형제를 구할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고심했다. 어머니는 약속대로 자기에게 신의 제왕자리를 주었다. 하지만 형제들 중에서도 성질이 괴팍하고 포악하기로 이름난 퀴클롭스 삼형제와 헤가톤케이레스 삼형제를 지옥에서 빼내 온다면, 그들은 비록 증오스럽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인 우라노스를 죽인 자기에게 어떻게 나올지 그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태도를 돌변하여 죗값을 묻는다면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크로노스는 어머니에게 한 약속을 저버리기로 결심했다. 가이아는 통분했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더니, 자기가 남편을 거세하면서까지 원했던 소원을 거절당할 뿐만 아니라 자기는 약속을 다 지켰는데 이 놈의 자식이 단 것만 쏙 빼먹고 쓴 것은 어미의 가슴에 탁 뱉어버리다니,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그리하여 가이아 여신은 자기 아들에게 가장 잔혹한 저주를 내리게 된다.
“너도 네 아비처럼 너의 권좌를 네 자식에게 빼앗길 것이다.”
위와 같은 이야기의 줄거리를 뒤집으면 그리스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떠오른다. 어찌 보면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는 가이아 여신의 신화를 패러디한 것도 같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왕비인 이오카스테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패륜의 신탁을 받는다. 이에 라이오스는 갓 난 오이디푸스의 발목에 쇠못을 박아 산에 갖다 버렸지만 신의 예언을 벗어나지 못한다. 목동에 의해 구조된 오이디푸스는 먼 나라 코린토스에서 성장했지만 델피 신전에서 자기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또 받게 된다. 그러자 오이디푸스는 자기를 키워준 코린토스의 왕과 왕비가 친부모인 줄을 알고 궁궐을 떠나 방랑을 시작했으니 이는 신이 내린 운명을 피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방랑 중에 산속에서 만난 노인이 테베의 왕이며 자기 친부인 줄을 모르고 죽였으며, 괴물을 물리치면 테베의 왕이며 자기의 남편으로 삼겠다는 이오카스테의 선언에 따라 스핑크스를 죽인 일 등이 모두 예언의 실현과정으로서 어머니와 결혼하여서 자식까지 두었던 것이다. 후에 이 일이 밝혀지자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으로 방랑하다가 죽는다. 어머니와 결혼한 우라노스, 아버지인 우라노스를 거세한 크로노스, 크로노스에 대한 가이아 여신의 저주스런 예언, 똑같은 그리스 신화지만 이런 주제들이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의 모티브가 아닐까 한다.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의 저주를 받았다는 일처럼 큰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크로노스(Cronos)는 뇌리에 박힌 가이아 여신의 저주에 떨며 지냈다. 그리하여 아내인 레아(Rhea) 여신이 낳은 자식들을 낳는 족족 자신의 입 속에 처넣었다. 레아 여신에게는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시어머니인 가이아 여신은 남편이 자식을 지옥에 보낸 일만 가지고도 시퍼런 낫을 만들어서 아들을 시켜 거시기를 잘라 버렸는데, 크로노스가 아무리 신의 제왕이고 무서운 남편이라도 이를 묵과하고 지낼 수만은 없었다.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 등 자식들이 크로노스에게 먹혀 버리자 막내인 제우스(Zeus)를 낳을 때 레아는 아기 대신에 강보에 쌓인 돌을 아들이라고 속여서 크로노스에게 주었다. 그리고 아기를 멀리 동방의 이데산으로 피신시켜 아말테여이아 요정들로 하여금 돌보게 했다. 제우스는 산양을 먹고 자랐기에 나중에 “산양을 먹고 자란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성장한 제우스는 잔인한 아버지를 제거하고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지혜로운 조언의 여신이자 자기의 첫사랑인 메티스(Metis)를 찾아갔다. 메티스는 제우스에게 어머니인 레아를 찾아서 아버지인 크로노스의 음식을 돌보는 시종으로 들여보내달라는 부탁을 하라고 조언을 했다. 성장하여서 눈부신 모습으로 찾아온 아들 제우스의 청을 레아가 마다할 리는 없었다. 더구나 제우스는 메티스 여신이 일러준 크로노스의 퇴치법이 있었으니, 크로노스의 음식에 먹은 것을 모두 토하게 하는 약을 넣는 일이었다. 그러면 레아 여신의 자식이며 제우스의 형제들이 모두 밖으로 토해져 나올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죽이고 싶도록 얄밉기만 한 남편인데 더구나 크로노스는 자기 아들인 제우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레아 여신은 희색이 만면하여 제우스를 음식을 주관하는 시종으로 들여보냈다.
신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어야 산다. 그러나 신은 땅의 소득을 취하지 않는다. 밀, 보리, 옥수수, 과일, 고기 등등 이런 음식은 다 필멸의 산물로서 필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먹는 음식이고, 신은 천상의 음식인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라는 음식을 취하여 영생을 얻는 것이다. 어느 날 저녁에 진기한 신의 음식인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를 먹던 크로노스는 별안간 토악질을 시작했다. 제우스가 몰래 넣은 약 때문이었다. 그러자 제우스의 형제들이 하나씩 크로노스의 입에서 튀어나왔고 지금까지 먹었던 불멸의 음식까지도 모두 토해냈으니 크로노스는 신의 제왕이 갖는 모든 힘을 잃고 말았다. 어머니 가이아 여신의 저주가 실행된 순간이었다. 이렇게 하여 제우스는 아버지인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제3대 신의 제왕자리에 오르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날 밤 제우스는 메티스 여신에게 이 사건이 몰고 올 엄청난 전쟁의 예언을 듣게 된다. 크로노스의 형제들인 티탄 신들의 보복 공격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제우스만큼 여복이 많은 신도 없다.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제우스가 많게는 24명의 여신 또는 인간들하고 연애를 했다고 한다. 이 중에 제우스의 첫사랑이 바로 메티스 여신이고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제우스가 가장 귀여워하여 자기가 쓰던 방패까지 내려준 아테나 여신이다. 메티스는 지혜로운 조언으로 제우스를 도왔는데 문헌상에 가장 두드러진 예가 바로 크로노스를 물리치는 법과 티탄 전쟁에서 이기는 비법인 것이다. 메티스는 티탄 신들의 공격을 예언하면서 바로 가이아 여신이 가장 가슴 아파했던 외눈박이 키클롭스 삼형제와 각각 백 개의 팔을 가진 헤가톤케이로스 삼형제를 지상으로 이끌어내어 이용하라고 조언을 한다. 무한지옥에 갇힌 이들에게는 제우스가 조카뻘인 것이다. 이들의 형제인 크로노스가 가이아와의 약속대로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이들을 구해냈다면 패륜아라고 그에게 대들었을지 모르지만 조카뻘인 제우스에게는 그럴 염려가 없었다. 제우스에게 할머니뻘인 가이아 여신도 좋아할 일이었다. 제우스가 신의 제왕이라는 권위로 가이아 여신의 뱃속, 즉 타르타로스 무한지옥에 오랜 동안 갇혀있던 키클롭스 삼형제와 헤가톤케이로스 삼형제를 구하자 그들은 기뻐하여 티탄 신들과의 전쟁에 동참하기로 했다. 키클롭스 삼형제는 그들이 가진, 천둥, 벼락, 번개를 제우스에게 주었으며 포세이돈에게는 바람, 폭풍, 비를 몰고 오는 삼지창을 선물했다. 그리고 헤가톤케이레스 삼형제는 각각 백 개의 팔을 휘두르며 산에 매복하기로 했다. 드디어 자기의 형제를 제거한 조카인 제우스에게 보복하기 위해서 티탄 신들이 올림퍼스 산으로 몰려들었다. 당대의 세력으로 봐서는 제우스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우스 뒤에는 티탄 신들의 계열에 속하는 키클롭스 삼형제와 헤가톤케이레스 삼형제가 있었다. 키클롭스 삼형제가 준 천둥, 벼락, 번개를 제우스는 휘둘렀다. 사방에 불벼락이 떨어졌다. 이에 우왕좌왕하는 티탄 신들의 머리위에 헤가톤케이레스 삼형제가 삼백 개의 팔을 휘둘러 던지는 바위가 소나기처럼 떨어져 그들을 계곡에 묻어버렸으니, 포세이돈은 비와 바람과 폭풍을 몰고 오는 삼지창을 휘둘러서 많은 티탄 신들을 키클롭스 삼형제와 헤가톤게이레스 삼형제가 갇혔던 무한지옥으로 몰아가 가두고, 그 주위를 쇠도 녹여버리는 스틱스(Styx) 강물을 끌어와 빙 둘러 버렸던 것이다.
1914년 4월 영국 사우샘프턴항에서 뉴욕으로 항해하던 4만 6천톤급 유람선 타이타닉(Titanic)호가 대서양에서 빙산에 충돌했다. 이 배는 ‘신도 침몰 시키지 못한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크고 우람했지만 단번의 충돌로 바다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15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이 사건을 신화적으로 조명한다면 조카들의 세력을 우습게보고 제우스를 습격한 티탄 신들의 불행이, 이 유람선에 타이타닉이라는 티탄들의 이름을 붙인 순간에 운명으로 쥐어졌다고나 할까, 만약 티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제우스의 이름을 땄다면 그런 사고도 없지 않았을까.
제우스가 티탄 전쟁에서의 승리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기억의 여신 뮈네모시네와 결혼하여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우리의 영원한 어머니이며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는 가슴을 치며 통분하고 있었다. 제우스가 전쟁을 위해서든 아니면 무한지옥에 갇힌 삼촌들이 불쌍해서든 그들을 구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제는 더 많은 자기 자식인 티탄 신들이 자신의 뱃속에 들어와 구해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었다. 이런 몹쓸 놈의 팔자, 자기 몸에서 태어난 후손들이 서로 다독거리며 잘 살지는 못할망정 뻑 하면 치고 박고 싸우고, 그것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그렇지, 누가 이기건 지건 싸우다가 뒈지면 땅 위에 곱게 누워서 눈감을 일이지 왜 자기의 뱃속에는 그렇게 처넣어 매일 배앓이를 하게 만드는가 말이다. 편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라고 자식을 낳은 것도 죄가 된다는 말인가? 눈에 시퍼런 불이 오른 가이아 여신은 남편인 우라노스가 자기 위에 흘린 복수의 정기를 이용하여 제우스와 그 부스러기인 올림퍼스 신들을 응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바다에 몸을 담그면 배꼽뿐이 차오르지 않고 산을 단숨에 들어 올릴 팔뚝을 가진 거인들, 가이아가 보낸 기간테스(Gigantes)들의 습격이었다. 그러나 제우스에게는 변함없는 첫사랑인 메티스 여신의 조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의 힘이 있어야 기간테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일반적으로는 위의 예언을 “알 수 없는 신”에게서 내려진 것으로 보지만 제우스를 꾸준히 도와 준 메티스 여신으로 봄이 더 좋을 듯 하다. 하여튼 쿵쿵 지축을 울리며 기간테스들이 올림퍼스 산으로 오르고 있을 때 나타난, 신을 살해한 유일한 인간, 신을 구한 최초의 인간이 바로 12가지 모험으로 잘 알려진 헤라클레스(Heracles)였던 것이다.
제우스는 여신과의 사랑뿐만 아니라 인간 여자들하고도 연애를 즐겼는데 눈에 들었다 하면 처녀건 유부녀건 가리지 않았다. 헤라클레스는 남편을 가진 알크메네라는 유부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무예와 음악이 출중했으며 용감한 모험가였다.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와의 인연도 남다르다.
헤라(Hera) 여신은 제우스의 정부인으로서 신성한 결혼을 관장한다. 아르고스지역의 카노토스 샘에서 목욕을 함으로써 매일 처녀성을 회복하지만 남편인 제우스의 바람기에 늘 골머리를 앓았다. 결혼 전부터 헤라는 여자관계가 복잡한 제우스를 싫어했다. 다른 여신들은 제우스의 눈짓 하나로 몸을 허락했지만 헤라는 요지부동하여 제우스의 프러포즈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몇 번의 고백이 거절당하자 제우스는 엉뚱한 계획을 세워 헤라를 정복하고자 했다. 그 작전은 바로 헤라의 심성에 깃든 모성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었는데, 헤라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게 황금의 사과를 물려받아 지극한 자비심을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우스는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날 뻐꾸기로 변신하여 헤라가 있는 방의 창으로 날아들었다. 창문을 닫으려는 순간 헤라는 비에 홀딱 젖어서 날갯짓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뻐꾸기를 발견하곤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뻐꾸기는 이 측은한 마음의 틈을 비집고 헤라의 가슴에 날아들었다. 헤라가 뻐꾸기를 껴안는 순간 제우스는 결혼에 성공한다.
제우스와 연애를 한 상대방이 여신이든 사람이든 요정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가혹한 보복을 하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까지도 죽여 버리는 무서운 헤라 여신이지만 그의 본바탕은 자비와 순결이기에, 헤라클레스가 제우스와 엘크메네라는 유부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임에도 그녀답지 않은 실수를 범하게 된다. 이는 꾀가 많은 제우스 전령의 신이요 달변과 상업의 신인 헤르메스(Hermes) 때문이었다. 제우스와 엘크메네 사이에 소생이 있다는 사실을 안 헤라는 그 아기에게 독사 두 마리를 보내어 죽이려 했다. 그러나 제우스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기는 한 손에 한 마리씩 독사를 쥐어 죽여 버렸다. 또한 제우스는 유독 이 아기를 총애하여 보호하려고 애썼다. 이에 헤르메스는 헤라가 산책하는 시간을 골라서 올림퍼스 정상 신들의 산책로에 아기를 놓고 숲속에 숨어버렸다. 헤르메스의 생각대로 헤라는 그 시간에 산책을 하고 있었고 마침 배가 고파서 응앵 하고 터뜨린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헤라가 깜짝 놀라서 아기를 보는 순간 모성과 자비심이 발동했다. 헤라는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벌려 아기에게 젓을 물렸다. 힘차게 젓을 빠는 모습에 홀린 헤라는 자기 남편과 인간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불륜의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으니 바로 ‘헤라의 영광’ 헤라클레스였던 것이다. 나중에 헤르메스의 꾀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안 헤라는 분노하여 사사건건 헤라클레스를 괴롭혔음은 물론이다.
하여튼 헤라클레스는 무방비 상태의 신궁을 공격하는 기간테스의 우두머리를 활로 쏴서 죽이고 올림퍼스 신들을 구했으니, 헤라의 시기와 질투에 쩔쩔 대면서도 제우스가 헤라클레스를 총애한 이유가 있을 법도 한 일이다.
기간테스들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가이아 여신은 무한지옥 타르타로스와 티폰(Typhon)이라는 괴물을 만들어서 다시 공격케 한다. 티폰의 몸은 기간테스보다 더 컸고 상반신은 인간, 얼굴은 용, 하반신은 뱀이 휘어 감는 모습이고, 손가락 대신에 독사 백 마리가 달렸으며, 날개를 달았다. 티폰이 입에서 불을 내뿜으며 올림포스 신궁을 공격하자 모든 신들은 혼쭐이 나가 뿔뿔이 흩어져 사방에 숨었다. 얼마나 겁이 나고 놀랐는지 제우스는 산양, 헤르메스는 부엉이, 헤파이스토스는 황소, 아폴론은 솔개로 변신하여 이름 없는 산이나 먼 곳, 심지어는 이집트에까지 도망가서 숨어버렸던 것이다. 얼마 후에 정신을 차린 올림퍼스 신들은 온갖 지혜를 발휘하여 티폰을 물리치고 신궁을 회복하지만, 가이아 여신의 분노와 응징은 오늘날 환경정책과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대지의 여신은 견딜 만큼의 영역에서는 자비와 순종이지만 그 한도를 넘으면 꼭 무자비한 응징을 가해 온다는, 환경철학에 있어서의 부메랑 효과 또는 가이아 이론(Gaea Theory)은 어머니의 분노라는 그리스 신화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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