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작가들

최하림

미송 2010. 4. 25. 14:23

詩人 최하림 부부가 부르는 '사랑의 終章'

 

 

"봄이 오면 꽃피는 나무 아래 둘이 함께 있고 싶어요"
"가난은 神과 소통하는 길…시는 곧 기도입니다"
갑자기 詩 정리하고 싶어져 450여편 가다듬다 보니 몸무게가 쑥…
말기 암이란 소리 듣고도 담담… 칠십까지 살면 된 거 아닌가

 

비가 눈으로 변했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가는 길이었다. 3월 첫눈이 서설(瑞雪)은 아니었다. 내비게이션도 찾지 못한 산속 집 앞에서 헤맬 때였다. 정확한 위치를 물으러 전화를 했는데 가슴 철렁한 말이 흘러나왔다.

 

 

"20분 이상 이야길 할 수 없어요…." 시인 최하림(崔夏林·71)은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 간암 4기인 그에게 의사는 세 번 고비를 예고했다고 한다. 작년 6~7월과 연말, 최근에는 올 2월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아픈 그를 붙잡고 20분쯤 이야기했다. 최하림은 "누워도 되겠느냐"고 했다. 그렇게 끊어질듯 끊어질듯 하던 대화가 어느덧 2시간을 넘겼다. 항암제가 앗아간 다리 힘 때문에 걷지 못하는 그는 후배의 요구에 2층 서재로 올라갔다.

 

 

사진 촬영까지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눈은 끊이지 않았다. "지난주 문 기자의 전화가 오기 전까진 괜찮았는데…"라는 시인의 되뇜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마감'을 앞둔 그에게 기자는 '마감시간'을 말해야 했던 것이다.

 

 

시인은 김현·김승옥·김치수와 '산문시대(散文時代)' 동인으로 1964년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강단(서울예전)에 섰고 언론계(전남일보)에서 일했으며 '최하림 선생님의…'라는 타이틀의 어린이를 위한 옛 이야기 책도 여러 권 썼다.

 

 

문필가에겐 없는 게 많다. 부(富), 명예, 지위다. 있는 건 자존심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끝은 외롭다. 김수영(金洙暎)의 삶은 글쟁이들의 그런 전형을 보여준다. 사망 전까지 불우(不遇) 그 자체였다.

 

 

런 세계에서 최하림은 하나의 '완성'이 됐다. 존경할 이 없는 각박함 속에 솟은 스승의 상(像)이 바로 시인이었다. 계속 연기됐던 선고(宣告)가 언제 불쑥 찾아올지 모를 시인과, 시인을 떠나보내는 아내를 구태여 찾은 이유였다.

 

 

 

부두

시인은 1939년 전남 신안군 안좌면 원산리에서 2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 호남(虎男), '호랑이 같은 사내'라는 뜻이었지만 주어진 팔자(八字)는 가난을 벗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33세로 요절했다.

빈곤은 학업을 방해했다. 어머니와 싸워 목포 명문 목포중·목포고에 진학했지만 그는 교실 대신 부둣가를 헤매야 했다. 등록금 못 낸 학생은 수업을 들을 수도 없었다. 그는 대학중퇴로 알려졌지만 끝까지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장남에 대한 가족의 바람이 돈을 벌어오라는 것이었나요.

"신문배달 해가면서 학교를 다녔어요. 공부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옛날 이야긴 지금도 안 하는데…."

―그렇게 못살면서 어찌 글 쓸 생각을 하게 됐나요.

"등록금 못 내 학교에 못 가고 해안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목선(木船)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광경이 나옵니다. 이 배 저 배 타고 다니면 문학이 자연적으로 떠오르지요. 당시 목포라는 항구에는 문학적 기운이 왕성했습니다."

나무들이 일전(日前)의 폭풍처럼 흔들리고 있다
먼 들판을 횡단하며 온 우리들은 부재(不在)의 손을 버리고
쌓인 날들이 비애처럼 젖어드는 쓰디쓴
이해(理解)의 속 계단의 광선이 거울을 통과하며
시간을 부르며 바다의 각선(脚線) 아래로
빠져나가는 오늘도 외로운
발단(發端)인 우리 

 

 -빈약(貧弱)한 올페의 회상(回想)·신춘문예 당선작


―그럼 책은 어떻게.

"헌책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면에선 제가 운이 좋아요.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작품부터 카프카, 발레리, 릴케 같은 대가(大家)들의 작품을 그곳에서 만났거든요. 헌 책 한 권 사면 며칠 동안 점심을 굶어야 했지만."

―동인지 '산문시대'가 꽤 유명했지요.

"신춘문예 당선 축하회가 있었어요. 축하회라고 해봐야 차 한잔 마시는 자리인데, 고 선우휘(鮮于煇) 조선일보 주필께서 제게 '산문시대 동인은 어떤 사람들이냐'고 묻더군요. 목포에서 만든 동인지를 서울에 계신 분이 알면 대단한 거지요. 책방에서 동인지가 팔렸을 정도니까요. 광주의 한 책방에선 책 판 돈을 받아본 적도 있어요."

―동인지 첫 권에 쓴 글을 기억합니까.

"'바다시집'이란 소설과 '성(城)'이라는 희곡이었습니다."

―시인이 될 분이 왜 소설과 희곡을?

"저 자신이 시만 쓰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당시 문학한다는 사람은 시, 소설, 희곡처럼 다방면의 글을 썼지요."

―시와 산문 가운데 어떤 게 더 우위에 있습니까.

"시지요. 예술이라는 게 시로부터 시작됐거든요. 예술정신은 곧 시 정신입니다."

―왜 대부분의 시인들은 가난할까요.

"가난은 신(神)과 소통하는 길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야 경건해지니까요. 기도할 때 모두가 가난한 마음으로 하잖아요. 시는 기도입니다."

―선생의 일생을 전해들으니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는데 후회해본 적은 없습니까.

"특별히 후회하지도, 그렇다고 환영하지도 않은 삶이지요."

―가족 중엔 글 쓰는 분이 없나요.

"1남2녀를 뒀는데 아이들도 아버지를 이으려 하지 않고 나도 아이들에게 내 뒤를 잇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요즘 잡지사에 다니던 둘째가 글 쓰는 쪽으로 선회하는 것 같아요. 말은 안 하는데 책을 들고왔어요. '아홉개의 숲'이라는 소설이었어요. 그 아이 본명이 최승린인데 필명은 최린으로 쓰더군요."

―선생이 사용하는 '하림 '이란 필명(筆名)은 언제부터 쓴 겁니까.

"스무살 무렵부터입니다. 부르기 쉽고 글자 쓰기도 좋지요. 젊을 때니 여름이 좋기도 하고."

교유(交遊)

―등단하면 팔자가 달라집니까.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인사할 때 악수하면서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소개하는 것 외에는. 제 어머니는 신춘문예가 뭔지, 시인이 뭔지도 몰랐어요."

―올페가 누굽니까.

"프랑스어로 오르페우스를 올페라고 하지요. 오르페우스는 예술가였어요. 애인을 구출하기 위해 지옥의 문(門)으로 들어갑니다. 결국 실패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서 지옥에 갔다 나오는 건 거룩한 일이지요."

―올페가 자신을 말하는 겁니까.

"전적으로 그렇진 않지만 '나'라는 부분이 상당히 투영된 건 사실입니다."

―이 시가 1980년대까지 신춘문예 응모생들의 모범답안 같은 하나의 전형(典型)이 됐지요.

"허허."

―산문시대 동인 가운데 김현은 나중에 평론가의 전설이 됐습니다. 어떻게 만나게 된 건가요.

"스물세살 무렵 겨울방학으로 생각됩니다. 목포의 다방 4층에 앉아 니체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톱밥으로 불 때는 난로가 있던 다방이었습니다. 그때 머리가 부스스한 청년이 들어오더니 제 옆에 앉아 니체 이야기를 하더군요. 저보다 니체를 더 많이 읽은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러다 카프카로 넘어가고 발레리로 넘어가고…."

―산문시대 동인 가운데 4K가 유명하지요. 김현 김승옥 김치수 김주연….

"원래는 김현 김승옥 김치수와 저 4명으로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박광수 염무웅이 들어왔지요. 김주연도 나중에 왔고요."

-시인이 최근에 낸 '최하림 시 전집'의 연보(年譜)를 보니 1966년부터를 '직장의 타성에 빠짐. 시를 거의 폐업하고 미술과 역사에 몰두함'이라고 써놓았더군요.

"생계 때문에 시사영어사에 취직했습니다. 시사영어사 안에 세계사라는 잡지 만드는 회사에서 1년 남짓 교정(校正) 일을 봤지요. 그 뒤 삼성출판사로 옮겼고요."

―당시 월급이 기억납니까.

"그때만 해도 출판사는 월급이 적지 않았어요. 1만2000원쯤 탔는데 충분히 살 만한 돈이었어요. 원동석이란 친구와 장위동에서 자취했지요."

―갓 등단한 시인이 왜 미술과 역사에 경도(傾倒)됐습니까.

"4·19가 일어났고 5·16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감옥에 갈 만큼 직설적이진 않았지만 역사 공부야말로 우리 젊은이들이 그 시대에 가야 할 길을 찾는 것이었고 부조리, 독재와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습니다. 당시 우리 역사엔 현대사가 아예 없었어요. 근대사도 똑바르게 가르치지 않았고 중세사도 공부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역사 공부를 하다 자연스레 미술사 공부도 하게 된 겁니다."

―우리 역사교육이 그 모양이 된 게 일제 식민지 경험 때문인가요.

"전반적으로 형편없었지요. 역사교육뿐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동아출판공사라고 옛 종로 2가 종로서적 밑의 건물에 서점이 문을 열었을 때였습니다. 알고 지내던 일본 교도(共同)통신 기자가 이러더군요. '일본에는 이런 곳이 예닐 곱개가 되는데 한국에선 무슨 의미냐'고. 우릴 깔보는 것이었지만 우리의 그때 수준이 그랬습니다."

―그 뒤 '미술평론 유종열(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한국 미술관'(1973년)과 미술산문집 '한국인의 멋'(1979년)을 썼지요. 그러면서도 1976년엔 첫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를 내기도 했고. 왔다갔다 한 겁니까.

"미술평론을 하다 보니 제가 미술보다는 시를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인 이제하가 그려준 최하림의 초상화

 

 

현실

―역사와 미술도 역시 독학(獨學)으로?

"청계천 헌책방 거리는 우리 세대에겐 축복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싼값에 좋은 책들을 구할 수 있었으니."

―'시인에게'라는 시를 보니 '그대여 그대여 어떻게 저 먼 밤을 뚫고 가겠는가'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 시인이 선생인가요?

"그건 지하를 두고 쓴 겁니다."

―지하라면 김지하?

"김지하도 목포가 고향이니까. 대학생 때 알게 됐습니다."

―작년에 그분 인터뷰를 하다 크게 다툰 적이 있습니다.

"(싱긋 웃으며) 성질이 칼칼하지요. (욕도 왕창 먹었다고 하자) 욕을 안 하면 누구나 술을 마실 수가 없지요. 그만큼 입심이 세야 술 마시는 것이고요."

―취비강이 어느 나라에 있는 강(江)입니까.

"신안에 가면 밀물 때면 바닷물에 잠기고 썰물이 되면 걸어서 섬까지 가는 길이 있어요. 그걸 취비강이라고 부릅니다."

―연보에 보니 '정치학자 최장집과 친교'라는 부분도 나오던데.

"삼성출판사를 그만두고 1969년 '세대(世代)'라는 월간지로 옮기니 최 교수가 거기서 편집부 기자로 일하고 있더군요. 저도 편집부 기자를 했고요."

―그는 어떤 분인가요.

"저와 여러모로 생각이 같았어요. 한글전용 문제도 그랬고. 그를 두고 여러 말이 있었지만 다 쓸데없는 소립니다. 그는 진보학자일 뿐이에요."

―시를 등지고 현실참여를 할 정도면 돈과는 거리가 멀었을 텐데 1969년 결혼도 했군요.

"그 이야기도 해야 합니까? 아내(장숙희·70)는 서울대에서 교직원으로 일하다 그만둔 상태였어요. 친구 소개로 만났지요."

―일설에는 시인이 독학으로 공부하고 결혼해 아이 셋을 낳으면서 집을 마련하기 위해 점심을 10년간 굶었다는데….

"그거 낭설인데…, 밥 안 먹고 어떻게 견뎌요? 제가 젊어서 고생 좀 했다는 이야기였겠지요."

―거 참 이상하군요, 그 에피소드를 전해준 이에 따르면 선생은 김수영과 기형도를 잇는 중간다리 같다던데.

"하하. 김수영 선생은 모더니스트이면서도 우리 것을 파헤치는 분이었어요. 명동의 다방에서 그와 교유한 적이 있긴 해요. 나중에 그분 평전(評傳)을 쓰게 됐는데 그건 출판사 권유 때문이었어요. '당신이 쓰면 잘 쓸 것 같다'길래 쓴 겁니다."

―월간지 '세대'이후에도 기자로?

"독서신문이라고 지식산업사에 만든 신문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지식산업사 주간(主幹)까지 지냈지요. 1984년부터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서 시 창작을 강의했고 1988년부터 전남일보 편집국에서 문화담당 부국장으로 일했습니다. 그때가 전남일보가 창사할 때였는데 몇몇 주축들이 함께 일하자고 해서."

전원(田園)

시인의 삶에서 전성기가 서울예대 시절이다. 당시 배출한 제자가 장석남·박형준·이원·함민복 등이었다. 스승도 필요에 따라 선택하는 시대다. 그런데 유독 그의 제자들은 그를 정신적 지주로 여긴다. 수업을 안 받은 제자도 있다.

한 제자의 말을 옮겨본다. "선생님은 이렇게 하라, 그런 말을 절대로 안 해요. 넌지시 암시만 하시지. 제자들이 어려울 때 신도(信徒)들이 부처님 보러 가듯 그냥 가는 거야. 갔다 오면 맘 편하고…, 그런 삶을 흉내내기도 힘들고."

―1988년 전남일보로 내려간 지 3년 만인 1991년 고혈압으로 쓰러졌지요.

"쉽게 말해 중풍이었어요. 한 달 동안 병원에 있다가 다음해 봄부터 출근했어요."

―96년 정년퇴직 후 왜 가족이 있는 서울로 올라오지 않고 충북 영동군 호탄리로 갔습니까.

"광주에 있던 사람들이 함께 살자고 했는데 아이들도 있으니까 서울과 광주의 중간쯤이 어딜까 하고 생각하다 호탄리를 택했어요. 당시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시골에 문화주택이라는 걸 대거 지었지요. 아내도 아이들도 반대했지만 제가 고집을 부렸어요. 건강 문제도 있었고."

하늬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밤 그이는
하마 취비강을 건너갔을까
보내는 이들이 밤을 설치며 그리는 그 얼굴 그 눈동자가
가슴에 불붙어 타오르는데
그이는 수많은 노두(露頭)를 건너서
바람과 눈보라를 헤치고
무사히 자유에 발 디뎠을까 

-설야(雪野)


―전원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인지 유독 꽃과 나무, 새를 좋아한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장인과 꽃서리를 했다는 건 뭔가요.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지? 귀한 꽃나무를 보면 밤에 잠이 안 오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럴 때 장인과 함께 꽃을 서리해왔지요. 여러 그루는 아니고 딱 한 그루만. 장인은 망보고 사위인 전 그걸 파와 집 마당에 심었어요."

―지금 뜰에 보이는 저 나무도 다 서리해온 건가요.

"꽃서리는 오래전에 그만뒀어요. 한때 그게 꽃을 사랑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집에 심어놓으니 산에서만큼 곱지 않더군요. 정원의 나무들은 사다 심은 겁니다."

―개도 좋아한다면서요.

"시골에 살면 강아지가 필요하지요. 지금 보이는 '똘똘이'(스피츠 믹스)는 20년 가까이 된 것이고 원래 보더콜리라고 좋은 개가 있었는데 시골 노인들에게 혼이 난 뒤 제자에게 줬어요. 전 개 목에 줄을 안 매는데 그분들은 '왜 개를 그냥 데리고 다니느냐'고 했어요."

―개에게 자신이 먹는 것보다 더 좋은 걸 먹인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식빵하고 북어를.

"북어? 아닌데. 사람보다 더 좋은 걸 먹이는 건 아니고 외출나갔다 오면 개들이 가여워서 가끔 족발을 사주긴 합니다. 개들이 족발을 무지 좋아해요."

―개 좋아하는 분들은 보신탕을 안 먹습니까.

"먹긴 했지만 지금은 안 먹어요. 제가 중풍 맞은 게 보신탕 먹은 직후였거든요."

―문호리로 옮긴 게 2002년입니다.

"호탄리는 뭐랄까, 마을 분위기가 외지인들에겐…. 그래서 경기도 여주(驪州)로 옮겨볼까 하고 가봤는데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어요. 그냥 서울로 올까 하다 이왕 나선 길이니 양수리쪽으로 가보자고 하다 여길 지나게 됐습니다. 옛날에도 몇번 지난 곳이었는데 그날따라 풍경이 달라 보이더군요. 다음날 부동산중개업소에 전화해 전세를 얻고 지금 터를 구입해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선생의 시를 보면 청년 때는 4·19와 '10월유신'을, 장년에 이르러선 80년 광주를 다룹니다. 문단에는 이른바 '문지(문학과 지성)'와 '창비(창작과 비평)'란 큰 두 세력이 있지요.

"저도 창비에서 시작해 문지로 왔지만…, 그건 새로운 장르이니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다만 80년 광주가 제겐 이중의 의미가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제 고향을 짓밟은 것이기도 하고 민중의 가슴을 짓밟은 면도 있었으니까요. 당시 고대 앞에 사는 친구 집에 갔을 때인데 48대의 탱크가 나오더군요. 그걸 보면서 '저것이 광주로 가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착잡했지요."

―문단 정치란 게 필요한가요.

"나쁘다고 단언할 순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 마을 단위로, 회사 단위로, 직업 단위로 살잖아요. 시인의 세상도 그것과 비슷하지요. 추하게 보이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봅니다. 다만 과거 시인이 희소할 때는 저처럼 문단정치와 무관한 사람도 살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시인이 몇 천명인 시대에는 술 마시고 악수하고 자기 존재를 알릴 필요도 있지요."

―돌이켜보면 선생은 가난했고 상업적 명성은 얻지 못했지만 가족과 시단(詩壇)에서의 명성은 남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인은 불행하다'는 말이 선생에겐 통하지 않는 것 같은데….

"열심히 살았을 뿐입니다."

작별

시인으로, 도서 저술가로, 스승으로,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재작년 갑자기 자기의 시를 정리하고 싶어졌다. 450여편을 가다듬다 보니 어느새 68㎏이던 몸무게가 51㎏까지 빠졌다. 그때 그는 그게 뭘 뜻하는지 몰랐다.

아들이 분당 서울대병원에 신체검사 예약을 해놓았다. 아내가 했다면 거절했겠지만 아들의 성의를 무시할 순 없었다. 의사는 그에게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진단을 내렸다. "간암 4기…, 입원해도 소용없는 상태입니다."

―자신이 쓴 모든 시를 재정리하고픈 마음이 든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70이 되니 어지간히 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려 했던 거고. 말기 암이란 말을 들었을 때 담담했습니다. 그 이전부터 '칠십까지 살면 됐다'는 생각을 했었고요."

―가족들의 생각은 다르겠지요.

"가족들이 제게 사실을 숨긴 걸 나중에 알았어요. 처음엔 작년 6~7월을 못 넘긴다고 했고 두 번째는 작년 연말을, 세 번째는 올 2월을 이야기했으니까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지요. 선생은 '끝'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돌아보면 순간순간 시에 투신(投身)했어야 하는데 너무 허술하게 했다는 아쉬움은 있지요. 끝을 맞이해 마무리를 해야 되겠지만 그럴 수 있는 그릇이 못되니 그 순간 흘러가는 것이기도 하고요. 제 스스로 몰상식하게 산 사람은 아니었고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내 식(式)이었지만 성의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친구들에게도 그런 편이었고…."

―말기 암과 투병(鬪病)하면 아무래도 매일 아침이 예사롭지는 않겠지요.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한다면 거짓말일 테고…. (아내를 가리키며) 저 친구가 건강하게 이 국면을 헤쳐나가야 할 텐데. 내 앞에선 우는 모습을 안 보이지만 안 봐도 알지요."

―'산문시대' 동인 김현씨도 간암으로….

"제가 광주에 있을 때 사망했어요. 제가 아파 보니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걸 어떻게 이겨냈을까, 새삼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제가 나쁜 놈이었어요. 광주에서 일한다는 핑계로 가보지도 못했으니."

이 대목쯤에서 시인은 견디기 힘들어했다. 시인의 아내도 '이 정도에서 마쳐달라'고 했다. 중풍에 걸린 남편을 회복시킨 아내는 이제 암을 맞아 싸우면서도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냉혈한(冷血漢)은 다시 아내에게 물었다.

―이렇게 사는 제가 싫습니다.

"41년을 함께 살았는데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 중 한명이었어요."

―좋은 분 중 한명이라면 다른 좋은 분이 있다는?

"세상엔 좋은 사람이 많잖아요. 남편은 모든 면에서 성실하고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어요. 서로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신혼 초부터 고생했지만 지금까지 잘 버텨왔고요."

―소설가 C씨, 수녀 L씨, 스님 B씨도 암으로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한동안 '암'이란 단어를 입에 올릴 수가 없었어요. 어디가 아프다고 할 정도지, 지금도 그 단어가 입에서 잘 나오지 않습니다. 시를 재정리하면서 자꾸 수척해져 '저 이가 뭔가 예감이 있었나'하는 생각을 요즘 합니다만, 자기도 잘 몰랐다고 하니 알 도리도 없고요."

―작별의 순간이 온다면.

"전 작별이라는 생각을 아직 안 해요. 다만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이런 소리는 안 하려 해요. 마음 편하게 그냥 가시라고…."

아내가 말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인이 말했다. "한 달에 한 번 병원 갈 때를 제외하곤 항상 집에 있으니까. 아내와 이런 약속을 한 적은 있어요. '봄이 빨리 와서 꽃이 피고 나무에 새싹 나면 그 아래 같이 있고 싶다'고…."

산속 집 위에 계속 빗방울인지 눈인지 모를 것들이 떨어지고 있다. 집은 정적에 싸여 있었다. 그 속에서 시인은 웃고 있었고 시인의 아내는 그런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자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사람과 가족, 사랑을 생각했다. 

 

2010 3. 6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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