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10월 9일 출생. 1966년 오노 요코를 만남’ - 존 레논이 단 한 줄로 표현한 자신의 프로필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이야기는 '운명적 사랑'의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영혼의 동반자'로 받아들였으며,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고,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으니까.
1966년 11월 9일. 전위예술가 오노 요코는 런던 인디카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날 존 레논은 친구의 소개로 전시회 프리뷰를 보러왔었는데, 요코는 그가 그 유명한 '비틀즈'의 멤버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고한다. 당시 요코가 비틀즈 멤버 중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링고 뿐(일본어로 '사과'와 비슷하여)이었다.
"당신이 만약 당신의 '진정한 여자'를 만났다고 생각해 보라. 더 이상 술집에 가서 다른 남자들과 당구를 치거나 축구를 구경하고 싶겠는가. 물론 어떤 남자들은 사랑에 빠지고도 그런 친분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진정한 여자를 만난 순간, 그 동안 맺어왔던 모든 인간관계들이 의미를 잃고 말았다."
-John Lennon
예술과 인생을 공유하기 시작한 두 사람은 1968년 함께 [미완성 음악 1번: Two Virgins] 앨범을 발표했고. 이후 각각의 가정을 정리하고, 1969년 3월 12일 지브롤터에서 결혼한다.
요코는 두번째 남편이었던 영화 감독 토니 콕스와 딸 키요코를 떠나고, 존은 아내 신시아와 아들 줄리안을 뒤로 해야 했다. 특히 존 레논은 이혼을 위해 적반하장으로 신시아의 불륜을 이유로 들어 소송을 걸었지만. 요코의 임신(이후 유산)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시아가 항소하는 등 질펀한 법정 투쟁이 이어지고. 결국 존이 아내에게 10만 파운드의 위자료와 생활비를 내기로 하고 이혼하게 된다.
비틀즈의 멤버이자 존의 절친한 친구였던 폴 매카트니는 아버지와의 이별으로 상처받은 줄리안을 위해 '헤이 주드 Hey, Jude(원제는 줄리안의 이름을 줄인 'Hey Jules'였다고 합니다)'를 만들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가족을 버리고 결합한 것에 대해 많은 비난이 뒤따랐지만, 둘은 개의치 않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 함께 있으면 세상의 다른 목소리 따위 들리지 않았던 것이었겠지.
매일같이 나는 신에게 감사한다. 네가 내게로 온 것을, 운명이 두 영혼을 맺어준 것을. 내가 태어난 건 오직 너를 만나기 위함이었고, 내가 어른이 된 건 너를 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John Lennon
존은 1970년 비틀즈를 공식 탈퇴하고 요코와 함께 '플라스틱 오노 밴드'를 결성하고. 서로를 사랑 뿐 아니라 일도 함께 하는 파트너로 여겼다. 비틀즈의 해체를 오노 요코의 탓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요코는 존이 자신의 뜻을 펼치는 계기로 작용한 것 뿐. 존 레논은 "그녀는 내가 가정보다 더 숨통을 조이던 비틀즈와의 결혼에서 뛰쳐나올 용기를 주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부와 명예, 매스컴의 관심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음악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사업이 되어버린 비틀즈가 존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요코는 그의 손을 이끌어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고. 두 사람은 반전 운동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비틀즈 시절의 존이 꿈과 사랑, 희망을 노래했다면, 요코와 함께한 존은 전쟁반대,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대중스타에서 탈피해 전쟁과 자본주의의 왜곡에 도전하는 반사회적 기수로 떠오른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을 변화시켰지만, 존이 요코를 따라간 부분이 분명 더 많았다. 그에게 요코는 연인 뿐 아니라 어머니이자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고. 그의 음악은 물론 성격과 가치관도 요코를 따라 변해갔다. 페미니스트 운동을 주도했던 요코의 영향으로 자신의 가운데 이름인 '윈스턴(Winston)'을 '오노(Ono)'로 바꿔 '존 오노 레논'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기도 했다.
견고하던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진 시기도 있었다. 레논의 마약과 알코올 중독, 그리고 예술가로서 요코의 자존심이 문제의 계기였다. 존은 반전운동가로서 자신의 활동에 대한 회의를 느꼈고, 떨어지지 않는 '존 레논의 부인'이란 꼬리표는 요코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나는 존 레논의 부인이라는 고정 이미지로부터 도피하고 싶었습니다. 그 전에는 가난하더라도 예술가라는 자부심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었지만, 존과 살게 되면서 사생활이 없어졌어요. 나는 생각할 수 있는 내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오노 요코
1973년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간다. 요코는 뉴욕에서 예술활동을 하고, 존은 둘의 비서였던 메이 팡(May Pang)과 LA에서 살림을 차린다. 재미있는 것은 존과 메이 팡의 동거가 요코의 허락 아래("with Yoko's full knowledge and permission)"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요코는 존을 홀로 둘 수 없다고 판단, 그를 돌보기에 메이 팡이 적격자라고 여겼다.
이 시기의 존은 폐인이나 다름없었다. 폭음과 난동을 일삼았고, 클럽에서 시비를 걸다가 쫓겨난 적도 있다. 후에 존이 요코를 떠나 메이 팡과 보낸 1년 반은 '잃어버린 주말 Lost Weekend'이라고 불려지게 되는데. 메이 팡은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존과 나는 숨어있는 것이 아니었고. 요코는 우리가 어디에서 무얼하는지 알고 있었고, 매일 우리와 통화를 했다"고 회상했다.
마치 어머니가 나쁜 길로 빠진 아들을 버리지 못하듯, 요코는 별거 기간에도 존을 돌보았다. 두 사람은 상식적인 연인 관계를 넘어서 있었던 셈이다.
결국, 서로를 떠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두 사람은 재결합하게 되고, 1975년 요코는 마흔두살의 나이로 아들 숀을 낳는다. 마침 아이가 태어난 날은 10월 9일, 존의 35번째 생일이었다.
존은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아들을 돌보며 전업주부가 되기를 자처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자란 그였기에, 아들과 모든 일상을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5년간, 존은 음악과는 거리를 두고 오로지 가족을 위한 생활을 했다.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요? 세계평화, 나 그리고 우리 엄마(요코)입니다."
-존의 아들 숀 레논
1980년, 존은 긴 칩거 생활을 마치고 다시 아내와 공동으로 앨범을 제작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0년 12월 8일, 요코와 집으로 돌아오던 존은 광적인 팬이었던 마크 데이비드 채프만(Mark David Chapman)의 총을 맞고 사망한다. 5년간의 공백을 딛고 새 앨범 <더블 팬터지’>를 발표한 지 20일 만이었다.
존의 죽음을 돌이켜보며 오노 요코는 이렇게 말한다.
"가끔은, 그의 죽음이 꼭 꿈만 같아요.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처럼 느껴지죠.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냥 나 자신이었어요. 하지만, 그가 나에게 다녀간 후로, 나는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게 됐죠. '너는 변했어.네 삶이 모두 변했어'라고요.
존은 나를 감싸는 커다란 우산이었어요. 나는 아직도 그를 향한 감정이 살아있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이제 그를 그리워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혼자서 꾸는 꿈은 그저 꿈에 불과해요. 하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
서로를 세상의 전부로 여겼던 두 사람.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극적인 러브스토리로 회자된다. 만75세인 오노 요코는 지금도 미술 전시회를 열고 레논 재단을 운영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아마 오노 요코가 독립적이고 자아가 강한 여성으로 자란 것은 가정환경과 교육의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존 레논은 그녀의 이지적인 면에 반했다고 하고, "주변에 외모가 예쁜 여자는 많았지만, 요코처럼 지적인 여성은 없었다" 고 공공연히 자랑하곤 했다고 합니다.
서로 다르게 자란 것이 오히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존은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아들을 돌보며 전업주부가 되기를 자처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자란 그였기에, 아들과 모든 일상을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5년간, 존은 음악과는 거리를 두고 오로지 가족을 위한 생활을 했습니다.
오노요코의 노래
Yoko ono (요코 오노)
요코 오노(Yoko ono)는 33년 일본 도쿄 태생으로 14살에 미국으로 이민한 후 뉴욕의 아방가르드 운동에 열중하게 되었다. 영화 제작자와 구상 예술가로서 명성을 쌓고 있던 그녀는 66년 존 레논(John Lennon)을 만났으며, 이 두 사람의 협력 관계는 일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로도 발전하여 69년 결국 결혼하였다.
레논의 영향으로 록에 입문하게 된 그녀는 전자 음악 또한 이해하게 되었다. 초기에 발표한 [Two Virgins], [Life With the Lions and Wedding] 앨범들은 자유로우면서도 의도적인 모호함이 드러나는 것들이었으나 플라스틱 오노 밴드 더 레논스(Plastic ono Band the Lennons)에서는 흥겨운 쪽으로 음악적 방향을 수정했다.
비틀즈(Beatls)의 파멸을 불러온 당사자라는 오명을 쓴 채 그녀는 ‘Don’t Worry Kyoto’와 ‘Listen, the Snow is Falling’과 같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 뛰어난 일련의 곡들로 창작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레논의 카타르시스적인 솔로 데뷔 앨범의 자매작으로 발표한 [Yoko ono/the Plastic ono Band]는 역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한 앨범으로, 사로잡거나 혹은 반목하는 재능은 앨범 [Fly, Approximately Infinite Universe and Feelings]에 전반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그녀의 음악이 가지는 산재하는 정직성이 당시 유행하던 방종과 대조되는 반면, ‘Men Men Men’과 ‘Woman Power’등 몇 곡에서는 페미니스트적 주장을 펼치고 있다. 레논과 오노 두 사람의 관계는 결별하던 시기에 더욱 적나라하게 대중에 공개되었고 아들인 션(Sean)의 출생과 함께 다시 화해한 후 이들은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더 레논스는 80년 [Double Fantasy]를 발표하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앨범은 두 사람의 공동 작업으로 완성되었으며, 오노의 새로운 싱글을 완성하고 귀가하던 중 레논은 총격을 당했다. 이 작업의 결과로 나온 ‘Walking on Thin Ice’는 신랄함이 담뿍 배어있는 곡이었다.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후속으로 발표한 앨범들은 그 강렬함에 필적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는 비디오, 글, 녹음 등 레논의 미공개작 발표를 총괄했으며 평화주의자로서 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그녀는 비틀즈의 한 멤버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와 레논을 조종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굉장한 무관심과 공격을 받아왔다. 모든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결함과 품위를 유지해갔으며, 92년 발매 20년만에 [the ono Box]는 재평가되었다.
95년 그녀는 20살의 아들인 션과 그의 밴드인 이마(Ima)와 함께 다시 음악으로 돌아왔다. [Rising]은 오노의 강렬하면서도 야릇한 가사에 이마가 만들어 낸 훌륭한 구성으로 세간을 놀라게 했다. 63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멋진 사운드를 들려주었으며 인정을 받을 만한 위치에 올랐다.
비틀즈 해체의 원인에서부터 재능이 없다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심하게 언론에 끌려 다니며 언론매체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구상 및 시각 예술가이자 음악적 재능 또한 뛰어나 뮤지션으로서 많은 포스트 펑크 밴드에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에 익숙하지 않은, 종종 무조(無調)의 팝, 록을 시도하면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지라도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Public Image Limited) 같은 소수의 실험적 포스트 펑크 밴드의 사운드를 예견했다고 할 수 있다.
놀랄 정도로 감동적이며 정직한 팝/록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오노는 팝을 작곡하는데 훨씬 더 재능을 보였다. 그녀의 새된 목소리에 익숙해지고 표면적인 면을 파헤친다면 많은 앨범 중에서 상당히 가치 있는 음악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존 레논
20세기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비틀즈의 존 레논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초등학교 학생들도 알만큼 유명한 예스터데이를 시작으로 해서 클래식하고도 독특한 여러 음악으로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가수, 존 레논. 그의 유명한 노래 중에 반전을 꿈꾸며 불렀던 “imagine” 이란 곡이 있지요. 유명했지만 외롭고 고독해서 마약과 섹스에 빠져 있던 한 예술가가 세계평화를 꿈꾸게 하고, 반전 캠페인을 주도하게끔 만든 여인은 바로 또 한 명의 예술가 오노 요코 입니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처음 만났을 때 존이 스물 여섯, 오노가 서른 여섯으로 오노가 열 살이나 연상이었으며 둘 다 결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모두 공허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당시 유명한 아티스트들이 자주 드나들던 영국의 한 갤러리를 찾은 존과 그 곳에서 “숨을 쉬시오”라는 카드를 내밀며 이벤트 전시회를 하고 있던 오노는 첫눈에 서로에게 빠졌습니다.
<플럭서스>라 하여 영화나 사진 혹은 행위 예술 등 쉽게 이해하기 어렵고, 대중적이지도 못한 예술을 추구하는 오노는 자신의 프로젝트에 존이 도와주기를 자주 요청했고, 그 때마다 존은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점점 존에게 매달리게 된 오노는 그의 집에 불쑥 찾아가거나, 심지어 그가 부인과 함께 있는 차 안에 뛰어들어가기도 하죠.
결국 존의 부인이 인도에 여행을 간 사이 오노는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존의 아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남편의 극성 팬이라고만 생각했던 여자가 자신의 가운을 입고 자신의 식탁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지요. 게다가 그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태연히 “하이” 라고 인사말을 던졌을 뿐이었죠. 그런 그녀의 모습은 존 레논의 가슴에 깊이 박혀버렸습니다. 그 날 이후 그들은 이틀 이상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답니다.
잠시 존이 다른 여자와의 애정행각으로 인해 그들의 관계가 위기에 빠질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노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흔들리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가 바람을 필 수 있는 대상을 자신의 비서로 정해주기도 했답니다. 정말 독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요.
서양인과 동양인, 다른 인종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얼굴은 물론 개성과 기질,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세계관까지 닮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늘 같은 생각과 감정들을 공유하며 서로를 가르치기도 하면서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침대가 아니면 스튜디오에서 모든 시간들을 보냈던 그들이 신혼 여행지에서도 유명한 퍼포몬스를 보여주었지요.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반전 캠페인
자신을 유명인으로 대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주장하는 오노에게 빠져들게 된 존은 점점 비틀즈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틀즈의 해체를 슬퍼한 많은 팬들은 오노 요코를 마녀라고 부르며 분노했습니다. 심지어 그녀에게 수많은 바늘에 찔려있는 인형을 보내오거나 협박을 하는 팬들도 있었구요. 그러나 존은 아들 션 오노 레논이 태어나자 가수로서의 직업을 포기하고 아예 전업 주부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오노가 남편을 대신하여 사업가로 변신하였구요.
1980년 존 레논은 오노와 집에 가던 중 광적인 팬에 의해 총격을 당했고, 병원으로 옮겨지는 동안 숨졌습니다. 그의 죽음에 고통스러워 했던 오노에게 그들의 결실인 아들이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내면에 살아있는 사랑의 열정은 점점 더 빛을 발하게 되었는 지, 이제 그녀는 더 밝고 희망적인 주제의 작품들로 자신의 정신과 예술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노 요코의 작품 (1961)
아침 (1964)
가장 큰 조각이 5센티미터 밖에 안하는 유리병 조각들에 타이프로 친 글자들을 붙여 놓았습니다. 1964년에 작품을 제작하던 그녀는 미래의 시간들을 적어서 유리 조각들 각각마다 붙여 놓고 판매를 하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답니다.
사과 (1966)
오노는 갤러리 좌대 위에 사과를 올려 놓고 그 사과가 점점 부패해가는 모습을 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 사과를 베어 먹게도 하지요. 1966년 전시회에선 존 레넌이 사과를 베어먹기도 했다는 군요. 그녀는 이 사과의 생산, 성장, 쇠퇴, 죽음을 통해 살아있는 것의 삶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진짜 사과로 말이죠.
결혼식 앨범 (1969)
그들이 결혼하면서 함께 제작한 LP앨범의 표지 사진입니다. 이미 이전에 그들은 다른 앨범 표지에 자신들의 누드 사진을 실어서 물의를 빚었던 적이 있지요. 그 둘은 함께 사는 동안 여러 장의 앨범 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예술 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모퉁이 회화 (1971)
기존 회화의 평면성이라는 물리적이고 개념적인 관습들을 다 없애버린 작품입니다. 오노는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특정 모습을 액자 속에 넣어 상상하게 한 후 잊어버리라고 지시합니다. 이에 대해 오노는 “동양에서는 놓인 위치가 삶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될 수 있다 – 삶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방법을 바꾸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기에 없다 (1971)
뉴욕의 한 미술관 전시회를 위한 포스터 작품입니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얼굴 사진을 이용하여 전시회의 주제를 썼습니다. 하나의 문장을 만들기 위해 여러 글자들이 모아져야 하는 것처럼 오노와 레논은 자신들의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 늘 함께 했습니다. 벌써 그들의 얼굴을 닮아 있습니다.
전쟁은 끝난다 (1971)
“우리가 달라는 것은 단지 평화를 위한 기회를 달라는 것뿐…” 오노와 결혼한 그는 영국 여왕의 주었던 훈장까지 반환하면서 12개의 도시를 다니며 반전운동을 했습니다. 도시 곳곳에 전쟁은 끝난다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걸고, 같은 내용의 앨범 작업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크리스마스 기념 앨범의 타이틀로 제작된 것입니다.
살얼음 위를 걷기 (1981)
이 작품은 <살얼음 위를 걷기>라는 비디오 중 한 스틸 컷입니다. 존 레논이 죽기 직전 그녀와 함께 작곡한 음악 <살얼음 위를 걷기> 에 동영상을 입힌 작품이지요. 동영상의 내용은 그들의 아들과 놀거나 호숫가에서 쉬고 있거나 함께 침대에서 포옹하고 있는 장면 등이었습니다.
유리의 계절 (1981)
오노가 제작한 LP 앨범의 표지 입니다. 당시의 그녀는 히로시마 원자탄 투하 50주년과 에이즈로 죽거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을 기리기 위해 <유리의 계절>이란 음악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용기를 가져요. 열정을 가져요. 우리는 일어나고 있어” 라는 희망적인 가사를 담은 음악에 대해 서서히 사람들은 그녀를 인정하는 움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소망나무 (1996)
화분에 심긴 나무에 오노는 소망이 적힌 쪽지를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과 함께 퍼포먼스를 했습니다…. 소망을 비시오. 종이 위에 소망을 적으시오, 종이를 접어서 소망 나무 가지에 다시오.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하시오. 계속 소망을 비시오, 나뭇가지가 소망으로 뒤덮일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