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과거 역시 변화한다 (앙리베르그송)

미송 2010. 5. 11. 07:33

과거 역시 변화한다 (앙리베르그송)

 

누군가 시를 암송한다. 여러번 반복하여 외웠기 때문에 그 시를 기억하는 것이다. 기계적 암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그 시를 암송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이란 자동 기계작용(motor mechnism)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 또 하나의 진짜 기억이 존재한다. 그것은 시를 낭송하던 때, 제각기 특징이 있는 날들의 개별적 사건들에 대한 기억이다. 예를들어 그 사람에게는 그 시를 자신의 사랑을 위해 그날, 배위에 앉아 지는 해를 보고 낭송했었다는 그 달콤한 기억이 그 시 자체 보다 더 중요한 기억일 것이다.  사건은 발생한 즉시 인상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어떻게든 정신에 축적되지만, 대체로 유용한 사건만 우리의 의식에 떠오른다.  그러므로 과거는 자동기계작용에 의해 작동되며, 상상에 의해 재생된다.  즉 과거는 상상되지 않으면 않된다.

 

과거에 대해 말할 때, 과거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현재의 기억을 의미할 뿐이다. 과거 자체는 그것이 발생했을 때는 현재의 지각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이고, 활동적이었으나' 우리는 실재하는 과거는 이내 잊게 마련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과거란 과거에 대한 현재의 관념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 현재란 늘 바뀌는 것이므로, 과거 역시 늘 같지 않다. 현재의 의식 수준의 변천에 따라, 과거 역시 끊임없이 재해석된다. 과거란 과거 자체로 존재하는 ‘이미 발생하여 고정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늘 현재에 의해 재생되고 변화하는 상상의 대상이라는 것이 재미있다.

 

/ 구본형 칼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