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덜린의 <반평생> 과 내 詩作에 관한 노트
반평생 / 휠덜린
노란 배 열매와
들장미 가득하여
육지는 호수 속에 매달려 있네
너희 사랑스런 백조들
입맞춤에 취하여
성스럽게 깨어 있는 물 속에
머리를 담그네
슬프다, 내 어디에서
겨울이 오면, 꽃들과 어디에서
햇볕과
대지의 그늘을 찾을까
성벽은 말없이
차갑게 서 있고,
바람결에
풍향기는 덜컥거리네
휠덜린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내 20대 후반 서양철학사를 들여다보다가 피히테 쉘링 헤겔의 독일 관념론에 눈이 머물렀을 때다. 이들과 동시대를 살고 교류했던 휠덜린의 시들은 20대의 짦은 지식으로는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 잘 접근이 안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반평생」을 우연히 읽어보고 내 생각을 수정했다. 비감어린 정서와 상황이미지가 뛰어난 시여서 나에게 깊은 호소력으로 다가왔다.
이 시에는 한국의 좌절시인 김삿갓의 시처럼 자신의 비극적 생애가 이미 시속에 들어있다. 좌절과 고독에 살아야 했고 후반생을 정신착란의 징후에 시달렸던 휠덜린은 정신력이 깊은 시편들을 남겼다. 휠덜린은 두 살 때 친 아버지가 죽었으나 재혼한 어머니의 남편이 훌륭한 사람이어서 성장을 의지했다. 의붓아버지 역시 시장으로서 홍수재난을 구조하다가 폐렴으로 죽었다. 의붓동생들 세 명도 일찍 죽어 휠덜린은 비감(悲感)에 기우는 성격으로 자랐다고 한다. 모친의 희망으로 수도원학교에서 목사교육을 받았으나 휠덜린은 문학에 대한 야심으로 시를 썼다
튀빙겐 학창시절에는 헤겔과 쉘링과도 교유를 했는데 헤겔은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어떤 고양된 감동이 당시를 지배하고 있었다. 정신의 열정주의가 세계를 바라보면서 마치 신적인 것과 세계사이의 실제적인 화해가 다가온 듯이 생각하고 있었다.’ 당대 독일문학의 대가였던 쉴러나 괴테는 젊은 휠덜린을 격렬한 이상주의에 빠져 구체적인 현실을 도외시한 시인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사후 휠덜린은 독일문학의 신 지평을 연 시인으로 재평가 받았다.
하이데거는 《휠덜린 시의 해명》에서 횔덜린 시의 본질이란 ‘성스러운 것에 있다’고 규정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그의 예술관도 휠덜린 시에 대한 경도와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하이데거는 예술이란 사물을 통해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보았다. ‘존재’란 개별 사물의 형태인 ‘존재자’를 성립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실체인데 개별 사물을 초월해 있으며 은폐되어있다. 하이데거는 예술이 재현대신 상징과 알레고리를 차용하는 이유는 사물의 배후에 있는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함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입장에서 예술은 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에 대한 진리를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이 시는 사물이 ‘존재자’로서 조화와 아름다움 속에 잠겨있는 1연의 외부풍경과 그 사물에서 소외된 시인의 비감이 드러난 2연의 내면풍경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순수한 자연상태의 이상적인 정신에 대한 동경과 그에 다가가지 못하는 시인의 실존이 원망어린 시선으로 드러나 있다. 내 생각이지만 짧은 시형(詩型)안에 일반적인 해석을 넘어서는 미묘한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하이데거 식으로 표현하면 이 시는 ‘존재’에 대한 시인의 진리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예술가가 대가가 되는 일은 결국은 그의 사유의 깊이에 달려있다. 예술가가 예술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무엇인가’의 내용과 형식이 창조력과 결합해서 예술작품의 질을 결정한다.
흴덜린의 시편들을 보면 이상세계에 대한 강한 심정의 불길이 있다. 그의 데몬과 영혼이 사물에 투사되고 있고 시선은 사물에 배후에 있는 ‘정신의 순수’를 바라보고 있디는 느낌을 받는다. 예술작품에서 혼의 불길이 느껴지지 않는 작품을 나는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예술이란 내용과 형식 양 측면에서 심정의 발화(發話)이자 발화(發火)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유리된 자의 비감은 외부사물의 이상화와 내면풍경의 고독에 대한 색다른 시선을 불러온다. 약한 정신소유자는 자폐와 자학으로 현실을 도피하지만 강한 정신은 창조력으로 나타나 종교와 예술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이런 몽환적인 시선을 나도 청소년기에 경험한 적이 있다. 나에게는 사춘기가 중학교 이학년 때 찾아왔다. 휠덜린처럼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이상화가 일어났는데 고등학교 때 더 심해졌다. 학교에서의 규율과 학업의 중압감이 힘들어서 교실에서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에 의지했다. 헤세나 지드의 성장소설과 화집에서 본 인상파 화가들의 풍경화도 현실과는 다른 몽환세계를 바라보는데 일조했다. 철학가나 예술가의 상상세계가 열악한 현실과는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보여주어 위안을 받았다. 이상한 고독과 소외감에 갇혀 나는 6개월 동안을 하루에 말 서너마디로 보낸 적도 있었다. 50대 다시 시를 쓰면서 본 시「반 평생」의 풍경이 내가 처했던 그 시절의 심정을 강하게 환기했다. 40대에 시인이 되기를 단념하고 현실의 여러 굴곡을 거쳤지만 내가 시인의 길로 다시 온 것은 내 내면에 이런 시의 풍경이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런 내면의 풍경을 나는 다음과 같은 시로 써본 적이 있다.
시 숲 / 김백겸
가죽나무와 오동나무가 있는 울타리에서 평상에 누워 구름을 보며 낮잠에 들던 어린 시절에도 시 나무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바람에 날리는 이파리들이 푸른 침묵을 뒤집어 보여주는 흰 배때기들이 웅얼거리는 아기의 입술 같다는 생각을 했을 뿐.
같은 울타리를 사용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정을 메운 플라타나스를 아침노을과 저녁노을사이로 매일 창 밖으로 쳐다보았다. 청소년기의 짙은 우울과 몽상은 이파리를 따라 피고 지었으나 시 나무가 플라타나스의 모습으로 안개 속에서 희미한 검은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음을 그 때도 몰랐다.
심장으로 피가 몰리기 시작하고 가슴에 웅덩이로 패인 검은 상처가 시간을 빨아들였으며 현실로 향한 마라톤경주의 출발선에 있었던 대학말년에 시 나무는 갑자기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나무는 가죽나무와 오동나무와 플라타나스였으며 동시에 샤먼들의 하늘밧줄인 자작나무와 모세가 무릎을 꿇어 야훼의 음성을 들었던 가시떨기나무였다.
세상 나무들의 모든 뿌리가 어두운 지하에서 얽히고 나무의 잎맥마다 스며든 수액들이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번개와 바람이 불 지르던 꿈과 환상은 이파리마다 웅얼거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숲의 길보다는 세속도시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입사시험을 보러 다녔고 컴퓨터와 계산기로 거래를 관리하는 행정원이 되었다.
생과 죽음 사이에 경계를 친 붉은 담장 같은 황혼이 인생의 종착역이 가까웠음을 일깨워 주었다. 시 나무는 갑자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파리를 가진 모든 나무들이 은빛 갈기를 빛내면서 나무는 나무이상의 존재임을 몸으로 증명했다. 시 나무가 나에게 사랑하는 눈길을 보낸 마지막 편지였으며 최후의 통첩이었다.
나는 시의 숲으로 가기 위해 내가 걸어온 먼 길을 되돌아서 가야했다.
휠덜린의 시와 내 시를 비교하면 암시와 설명에 의한 시적구조의 차이가 확연함을 알 수 있다. 시란 짦을 수록 좋다. 그러나 긴 이야기가 짦은 시행에 들어간 경우에 한한다. 나는 시를 비교적 길게 쓰는 편이다. 짧은 표현의 암시에 서툴러서 짦은 시를 못쓰고 있으나 휠덜린의「반 평생」같은 시를 언젠가는 꼭 써 보고 싶다.
휠덜린의 생애 전반은 예술적 창조의 불길에 휩싸여 정서적 고양이 강한 작품들을 남겼다. 휠덜린은 목사직을 포기하고 생계를 위해 가정교사로 입주했던 콘타르트 집안의 부인 주제페에게 그리스적인 미와 조화의 아름다움을 투사하고 사랑에 빠진다. 주제페는 당대의 조각가 온마하느가 흉상모델로 만들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스캔들로 콘타르트 집안에서 쫒겨난 후 심정의 격렬함으로 쓴 시들이 독일 문학의 주옥편이 되었다. 주제페는 4년 후 풍진에 걸려 사망하는데 소식을 접한 휠덜린은 머리를 쥐어뜯고 집기를 창밖으로 내 던지며 발광했다 한다. 그 후 신경쇠약이 심해진 휠덜린은 남은 반생 36년을 병원신세를 지내며 현실과는 유리된 삶을 산다. 시「반 평생」은 휠덜린의 후반 삶이 시참(詩讖)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실존’이란 말이 철학계에서 너무 유행가처럼 쓰여서 기피하고 싶은 말이지만 이 시에서는 써도 괜찮을 것 같다. 시인의 실존이 절절하게 드러난 풍경이 아닌가.
김백겸(시인. 웹진 시인광장 主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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