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과 희극의 차이
[김석만의 '연극 창작 노트'] 한강 개발과 <순우삼촌>
인생은 느끼는 사람에게는 비극(悲劇)이요,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희극이란 말이 있다. 고전 그리스 시대가 그러했듯이 연극은 비극과 희극으로 나뉜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의 직접참여 민주주의가 완성된, 소위 태평성대에 비극이 완성되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도시국가가 와해되기 시작할 때 희극이 나타났다. 이래서 태평성대에 비극이 사회가 불안할 때 희극이 나타난다는 얘기가 성립된다.
비극은 슬픈 연극, 희극은 즐거운 연극인가. 비극은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연극이고 희극은 웃음을 안겨주는 연극인가. 보통 비극의 결말은 죽음으로 비장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으며 희극은 결혼이나 재회 등 환한 잔치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더 중요한 차이는 작품에서 주인공이 해결해야하는 문제의 처리방식에 따라 나타난다. 비극은 갈등의 해결책이 없을 때 일어난다. 대신 희극에서는 갈등이 해결된다. 비극이 주로 죽음으로 끝을 맺는 것은 문제해결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주인공은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이 해결책이 아니라 어떤 해결책도 얻을 수 없는 상황이 닥치기에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한다. 해결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비극이 발생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프스 왕>은 이를 잘 나타낸다. 오이디프스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선왕의 살인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가 약속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어머니이자 아내는 자살하고, 자신은 스스로 두눈을 찌르고 두 딸과 유랑의 길을 떠난다.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해결할 수 없는 상황으로 작품은 끝난다.
한편 희극에서는 문제가 해결된다. 그래서 희극에서 결말은 결혼, 재회, 회복, 용서와 화해 등을 다룬다. 용서하고 화해함으로 질서가 회복된다.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에는 세 쌍의 연인이 결혼을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도 비밀이 밝혀지거나 몰랐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풀린다. 당연히 희극의 끝은 잔치로 이루어지게 된다.
안톤 체홉의 <바냐 삼촌>에서 영감을 받아서 번안과정을 거친 창작작품 <순우삼촌>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우선 안톤 체홉의 희비극적인 분위기를 거론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체홉은 자신의 연극이 비극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원했다. 그렇다고 희극적으로 연출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체홉의 희곡은 어디까지나 체홉적으로 연출되어야 한다. 체홉의 연극은 위에서 말한 기준으로 비극이거나 희극이라고 말할 수 없는 독특한 세계를 지닌다. 등장인물들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바뀔지라도 그들은 전과 다름없이 살아간다. 아무런 문제도 해결나지 않는다. 등장인물도 변하지 않는다. 모든 등장인물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전과 다름없이 살아간다. 다만 처음과 다른 적막감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체홉은 연극에서 늘 그렇게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지속적이고 변함없는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순우삼촌>에도 <바냐삼촌>처럼 순박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농부 순우와 조카 지숙, 순우의 어머니 문자, 이모, 뱃사공 철구, 시골의사 석준등이 나온다. 이들은 그저 자연에서 농사를 짓고, 배를 저어 사람을 실어나르고, 시골 사람을 해주고 산다. 순우 어머니 문자씨는 문학박사 사위를 두었기에 이해하지도 못하는 문학지를 구독하며 사위의 평론을 읽고 이해하려 애를 쓸 뿐이다. 이렇게 천진난만하게 사는 시골 마을에 미국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은 최종길이 젊은 연인 민다정을 데리고 나타난다. 이들의 존재는 시골마을 사람을 뒤흔들어 놓는다. 농부 순우와 시골 의사 석준은 미국에서 살다온 민다정을 다 함께 좋아한다. 민다정을 좋아하는 시골의사 석준은 이들이 미국에서 귀국한 이래 이집을 매일 찾아온다. 의사를 좋아하는 순우 조카 지숙은 시골의사 석준을 짝사랑한다. 이들 사이에 짝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해서는 안 될 사랑이 얽히고 섥히어 가슴아픈 일들이 벌어진다. 잠실섬 주변, 한강일대를 개발하는 도시개발사업이 진행되자 미국에서 온 최종길이 가족을 모두 모이게 한 다음에 땅을 팔고 서울로 이사를 가자고 하면서 갈등이 벌어진다. 한편, 시골의사 석준은 도시개발 사업현장에서 일하던 인부가 사고로 죽자 한강개발을 반대하고 나선다.
민다정 : 숲을 가꾼다, 너무 단조롭지 않아요?
최지숙 : 선생님은 숲과 강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시는데요.
선생님 말씀이 숲하고 강은 지구를 아름답게 꾸며서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법을 사람들한테 가르쳐 준대요. 한강처럼 아름다운 강과 잠실섬의 울창한 숲은 사람을 잘생기게 만들고 감수성도 풍부하게 만들어 줘요. 말씨도 우아하게, 행동도 점잖게 만들어줘요. 학문과 예술이 번창하고 철학도 어둡지 않고, 남자들이 여자들을 대하는 태도도 고상하고, 부드럽게 만들어 준대요.
전순우 : 강이 좋은 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물을 주고 숲이 좋은 건 땔감을 주기 때문이지, 자연은 그냥 사는 거야.
강석준 : 지금 문제가 바로 그 삶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거야. 나무를 필요에 의해 베는 건 이해하지만 일부로 깎아버리는 건 정말 미치겠어요. 몇 년 사이 한강 주변 울창했던 숲을 생각하면 속이 뒤집힐 때가 너무 많아요. 그 많던 나무는 다 없어져가고 새와 짐승들은 갈 곳을 잃고 멋진 경치는 없어지고...
전순우 : 그놈 경치 타령은...
▲ 순우삼촌의 한 장면 |
지난 4월 8일, <순우삼촌> 기자 간담회에서 한 기자가 물었다. <순우삼촌>은 비극인가, 희극인가라고. 단장인 나는 잠시 말성이다가, "서양의 경우, 나라가 망해갈 때, 희극이 나타나고 나라가 융성할 때 비극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이 작품이 희극인지 비극인지는 관객이 지금을 어떤 시대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라는 취지의 답을 했다. <순우삼촌>의 마지막은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않은 채 미국에서 살다온 최종길 박사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순우와 지숙은 여전히 전과 같이 농사를 짓고 사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한강개발은 계속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지금 4대강개발사업을 두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순우삼촌>은 1974년을 배경으로하는 얘기지만, 오늘날 들어도 귀를 기울여야할만한 내용이 가득차있다. 이 작품은 결코 환경보호나 자연보호를 주장하는 연극이 아니다. 변하는 상황에서 변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애정에 관한 작품일 뿐이다. 작품의 결말을 두고 어떤이는 눈물을 어떤이는 미소를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관객의 몫이다. 다시금 인생은 느끼는 사람에게는 비극이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희극이라는 가르시아 로르카의 말이 새삼스럽다.
/ 김석만 (서울시극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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