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학 제22강 : 원인의 검토, 연(緣)
마음으로 짓는 인과
우리는 하늘이 무너지는 사태를 목격한 적도 없고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러므로 하늘이 무너질까 봐 불안에 떠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모두들 그 사람의 황당한 불안을 우스갯소리로 삼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안고 있는 불안이나 걱정은 그처럼 터무니없는 것이 아닌 확실한 근거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어쩌면 그 불안이나 걱정의 원인도 따지고 보면 하늘이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상념으로 귀착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갖고 있는 어떤 생각의 원인이 반드시 실제의 사실에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전 열자에 나오는 한 일화의 내용을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그로부터 유래한 말은 즐겨 사용하고 있다.
기나라 어떤 사람은 하늘이 무너지면 몸 둘 곳이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이를 딱하게 여긴 다른 사람이 "하늘은 기운으로 가득 차서 이루어진 것이니 어찌 무너져 떨어지리오"라고 깨우쳐 주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해와 달은 떨어지지 않겠느냐고 걱정했다. 이에 그 조언자는 "해와 달도 기운이 쌓여 있는 가운데 빛이 있는 것이고, 설사 떨어지더라도 맞아서 상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라고 깨우쳐 주었다. 그는 다시 땅은 무너지지 않겠느냐고 걱정했다. 그는 "땅은 기운이 뭉쳐서 이루어진 것이니 어찌 무너지는 것을 근심하리오"라는 말을 듣고서야 안도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기 나라 사람의 경우와 같은 부질없는 걱정을 기우라고 일컫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도 다른 사람의 터무니없는 걱정을 기우라고 일축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근심 걱정이 기우일 수 있다는 사실은 별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듯하다. 자신의 그것에는 그럴만한 원인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긴 원인이 없는 근심 걱정이 있을 리가 없다. 이 점에서는 기 나라 사람의 걱정도 마찬가지다. 기 나라 사람의 걱정과 내가 지금 안고 있는 걱정의 차이는 그 원인이 실제로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데 있겠지만, 그 걱정이 엄연히 나를 괴롭히는 효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보면, 실재했던 원인이든 마음으로 지어낸 원인이든 어떤 결과를 낳고 변화를 초래하기로는 동일한 힘을 지닌다.
기우를 낳는 것과 같은 원인은 어떤 마음이 다른 마음을 낳는 것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원인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원인은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서 작용한다. 예를 들면, 나팔꽃 씨는 봄이 되어야만 반드시 땅속에서 싹을 틔운다. 그러나 마음으로 짓는 원인은 그렇지 않다. 유치했던 어린 시절에 간직했다가 잊어 버렸던 어떤 생각이 노인이 된 먼 훗날에 그대로 연결되어 구체적인 행동으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몇 십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다시 보게 되면, 그동안 그 친구가 마지막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로 변했을 수도 있음을 고려하지 못하고, 그때의 인상으로 그 친구를 대하게 된다. 또 이제 같이 늙어가는 나이로 졸업 후에 처음 만난 초등학교의 은사는 말썽꾸러기였다는 그때의 생각으로 전혀 달라진 나를 대한다. 고국이 아닌 외국에서 만났더라도 그렇게 대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마음으로 짓는 원인은 시간과 장소가 달라지더라도 직접 연결되어 구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진즉 고향을 떠나 인생 막바지에 접어든 한 노인에게 어느 날 문득 어릴 때의 염원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림으로만 보았던 이국의 어느 바닷가에 가서 망망한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싶다는 염원이었다. 고향에서의 그 염원은 진즉 잊혀졌다. 이제 불현듯 그 염원을 떠올린 노인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자식들을 보채거나 직접 여행사를 물색하러 나선다.
이처럼 우리의 삶과 세계를 지배하는 원인이 반드시 눈으로 목격했거나 실제로 발생했던 사실인 것만을 아니다. 오히려 마음의 어딘가에 간직되어 있거나 발동하는 상념들이 더 강력한 원인으로 작용하여 우리의 삶과 세계를 지배해 왔다. 이 같은 마음 작용을 포괄적으로 원인이라고 분류할 수는 있지만. 그냥 원인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하기는 곤란하다. 그렇게 이해하는 데 그치면, 원인이라는 것이 너무 복잡 다양하고 모호해짐으로써 원인을 규명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무의미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원인을 그 역할에 따라 분류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불교적 사고의 독창성과 진가는 바로 원인에 대한 각별한 이해에 있다. 이 이해는 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의 근간을 형성한다.
인연과 연기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잘된 일의 원인을 이해하여 같은 결과 또는 보다 나은 결과를 얻고자 하고, 잘못된 일의 원인을 파악하여 나쁜 결과가 되풀이되는 사태를 예방하고자 한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서 지식이 형성되고, 그 관계를 잘 활용하는 데 삶의 지혜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파악하여 이해해야 할 원인이 '이 결과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라는 식으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고 있듯이, 아주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시비를 가리다 보면 사태는 전혀 바라지 않은 상태로 악화되기도 한다. 시비를 가리는 일은 곧 원인을 끌어내어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밝히는 것인데, 이 같은 인과의 연결에 서로 공감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일쑤이다. 그 이유는 인과의 연결이 다른 방식으로 성립될 수 있다는 사실, 또는 그 결과를 초래한 다른 주요 원인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데에 있다.
봄이 되면 담장 밑에는 여러 가지 풀이 돋아난다. 새싹이 돋는 것은 봄이라는 원인 때문이라고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새싹이 돋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언제나 봄이 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겨울에도 봄과 같은 날씨에는 간혹 매화나무에 꽃이 피기도 한다. 그러므로 새싹이 돋아나는 원인이 반드시 봄인 것은 아니다.
담장 밑에 돋아난 풀 중에는 나팔꽃도 있다. 그런데 나는 나팔꽃 씨앗을 심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팔꽃이 다른 씨앗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리는 없다. 내가 씨앗을 심은 적도 없고 다른 사람도 심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나팔꽃은 지난해에 떨어진 씨앗에서 나왔을 것이다. 나팔꽃은 오직 나팔꽃 씨라는 원인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어떤 결과의 원인을 오직 하나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한 가지 원인에서는 오직 한 가지 결과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하나뿐인 원인만으로는 결과를 낳지 못하므로, 생성과 변화와 소멸의 현실에서 보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나팔꽃 씨라는 하나의 원인이 있고, 봄과 같은 온도와 습도와 햇볕 등의 다른 원인이 있을 때, 씨는 싹과 줄기를 내어 꽃을 피우게 된다. 다른 원인이 갖추어졌더라도 나팔꽃 씨가 없을 경우에는 결코 나팔꽃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원인에는 필수적인 것과 보조적인 것, 또는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어떤 사태에 대해 직접적이거나 필수적인 원인만을 고려하거나 거기에 집착하기 쉽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어렵고 복잡하게 된 것은 간접적이거나 보조적인 원인이 거의 무수할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이 간접적인 원인들을 잘 헤아려 냄으로써 우리는 어떠한 사태의 진상에 더욱 접근할 수 있으며, 그릇된 결과를 피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
불교는 직접적이거나 필수적인 원인을 인(因)이라 하고 간접적이거나 보조적인 원인을 연(緣)이라 하여, 세상의 모든 변화가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그리고 인연에 의한 세상의 이치를 연기(緣起)라고 표현한다. 연기는 단독의 직접적인 원인에 의해서만 어떤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 경우의 '연'은 어떤 사태를 일으키는 조건 또는 발단으로서 작용함을 의미한다. 씨앗이 적당한 온도와 습도와 햇볕 등에 의해 발아하여 꽃과 열매를 맺을 때, 씨앗과 온도와 습도와 햇볕등이 모두 '연'이다. 다만 씨앗을 직접적인 원인으로서 작용하는 조건이라는 의미에서는 '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예로 든 기우의 경우에는 "하늘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하나의 발단 또는 조건이 되어, 해와 달이 떨어질 수도 있다든가, 땅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다른 생각과 걱정을 결과로 초래했다. 여기서 앞의 생각은 뒤의 생각이나 걱정에 대한 '연'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은 '연'이 일으키는(起)것이라고 파악하는 연기의 이치는 타당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온통 '연'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세상의 모든 것은 그러한 연들이 이리저리 결합한 조작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연들의 결합 또는 조작에 의해 성립된 모든 것을 불교에서는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한다. 연들의 결합이나 조작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무위법이다.
모든 존재의 근거, 이유, 원인이 되는 연들은 무수하고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리학에서는 그 연들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즉 인연, 등무간연, 소연연, 증상연이 그것이다. 다만 유식학의 관점에서는 주요한 기능을 발휘하는 연들이 모두 마음 작용의 범위 안에 있다.
*출처 : 알기 쉽게 풀어 쓴 불교 유식 '상식에서 유식으로' / 정승석 (정우서적)
*타이핑 : 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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