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자료실

반경환 <독서에 대하여>

미송 2022. 2. 13. 10:16

 

 

소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확보해 나간다는 것이 소비 사회의 이데올로기라면, 머릿 속을 텅비게 하는 쾌락 추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가 있다는 것이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더 많이, 더 빨리, 더욱 더 탐욕스럽게 소비를 하는 것이 미덕이 되던 시절도 있었고, 다른 한편, 더 많이, 더 빨리, 더욱 더 요염하게 자극적으로 퇴폐적인 쾌락을 추구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덧 소비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들이 잠잠해지고, 그 현란했던 목소리와 몸짓들을 죽여가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나는 소비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매우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것들의 현란했던 목소리와 몸짓들이 그리워지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반응으로부터 그리움으로의 변모는, 그러나 소비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상과 이념과 취향의 변모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IMF 사태로 지칭되는 한국 사회의 위기의 반영일 뿐이며, 보다 풍요롭고 행복한 사회에 대한 열망 때문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진정으로 한국 사회가 풍요롭고 행복했던 사회일 수는 없었지만, 이제 보다 풍요롭고 행복했던 사회에서 모든 것이 부족하고 풍요롭지 못한 사회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한국인들의 운명일는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의 위기의 본질은 여러 가지 사정과 그 요인들이 중층적으로 겹쳐져 있겠지만, 기초 과학의 튼튼한 토대가 없는 경제 성적표가 IMF 사태를 초래한 것처럼, 서구의 사상과 이론만을 제멋대로, 무자비하게 베껴 먹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기초 과학의 튼튼한 토대가 없는 학문이 경제의 IMF 사태를 초래했고, 서구의 사상과 이론만을 제멋대로 무자비하게 베껴먹은 학문이 정신의 IMF 사태를 초래했다. 한국 사회의 위기의 본질은 이처럼 앎의 투쟁에서 처절하게 패배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위기의 징후를 발견하지도 못한 채, 호화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모두들 다 같이 즐겼기 때문이다. 물리, 수학, 화학 등의 기초 과학도 국제경쟁력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문학, 역사, 철학 등의 인문 과학도 국제경쟁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뿐만 아니라, 부정 부패와 사기를 일삼고, 쓰레기 불법투기는 물론, 기초 생활 질서를 제멋대로 무시하는 한국인의 의식 수준도 국제경쟁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우리 학자들이 한국 사회의 파산 상태의 주범이며, 우리 한국인들이 그 공범들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 후손들에게 진정으로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물려 주어야 한다면, 모두들 다 같이 뼈를 깎는듯한 반성과 함께 속죄자의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천양희, [단추를 채우면서] 전문

 

 

천양희의 [단추를 채우면서]라는 시를 우의적으로 읽으면 한국 사회의 위기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 위기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장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한국 사회의 위기의 본질은 기초 교육이 잘못되어 있다는 데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위기의 책임은 잘못된 교육을 받고 잘못된 삶을 살아온 우리 한국인들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첫 단추를 잘못 채웠다는 것은 기초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기초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주입식 교육의 폐해 속에서 도대체가 독창성이라고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독창성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교육을 배웠다는 것을 말하고, 독창성이 없다는 것은 죽어 있는 교육을 배웠다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살아 있는 교육이 아닌, 죽어 있는 교육을 배운 한국인들이 첫 단추를 잘 채우고, 첫 연애, 첫 결혼은 물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의 실패를 뼈저리게 인식하면서도 그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 것이 천양희 시인의 장점이듯이, 우리 한국인들 역시도 “누군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라는 속죄자의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그럴 수 있을 때, 우리 한국인들은 초 중고등학교의 어린 학생들에게 하나의 모범답안이 아닌, 살아 있는 독서 교육을 가르치게 될 것이고, 가까운 미래에 세계 속의 선진 국민이 될 수 있는 길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모범답안만이 있는 교육은 죽어 있는 교육이며, 학생들 스스로가 독창적인 해답을 찾아낼 수 있는 교육만이 살아 있는 교육이다.

 

나는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고 아무런 기득권도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어쨌든 한 사람의 학자인 만큼 그 죄의식에서 자유롭지가 못하다. 나는 뼈를 깎는듯한 반성과 참회의 심정으로, 대학도서관의 책들과 나의 책들이 음산하고 불길한 대화를 나누느냐, 아니면 밝고 생기 있는 대화를 나누느냐가 그가 속한 사회와 민족의 운명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을 읽지 않는 민족은 사색하지 않는 민족이며, 사색하지 않는 민족은 생존경쟁이라는 세계의 무대에서 소외되거나 소멸해 갈 수밖에 없다. 일본,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등, 모든 선진국들에서는 독서 생활이 문화적으로 습관화되어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독서 생활이 문화적으로 습관화되어 있기는 커녕, 오히려 경시되고 무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기형도, [오래된 書籍]에서

 

 

한국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독서를 사랑하고 앎을 육화시켜 나갔던 시인, 하지만 너무도 일찍 절망을 하고 그 절망의 벼랑 끝에서 요절해 갔던 시인의 [오래된 書籍]이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에서는 대학도서관의 책들과 나의 책들이 밝고 생기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기는 커녕, 음산하고 불길한 대화만을 나누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독서하지 않고 어떻게 사색을 할 수가 있으며, 사색하지 않고 어떻게 세계적인 앎의 투쟁의 무대에서 살아 남을 수가 있겠는가?

 

한국 사회의 위기를 타개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이제부터라도 책을 읽고, 사색하는 습관을 배양하는 길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책은 우리 인간들에게 자기 자신과 인생을 재발견하게 해주는 안내자가 되어주기도 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 즉, 문명과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자극제가 되어주기도 한다. 책은 지혜의 요술단지이며, 인생의 어머니이다. 염세주의자는 이 세상을 비방하고 증오하고 헐뜯기에 앞서서 이 세상을 찬양하고 긍정하는 방법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책들을 읽고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 것인가?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생존했던 모든 철학자, 즉 타인의 견해를 해석하고 그것을 제공해준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각을 짜낸 사람들의 책”을 읽으라고 말한 바가 있고(1:27), 니체는 “나는 항상 똑같은 책에서 마음의 안식을 구하는 데, 그것은 소수의 책이다. 그 책들은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책으로 증명된 책이다. 잡다하게 이 책, 저 책을 다독하는 것은 나의 독서 방법이 못된다. 새 책에 대한 경계심, 심지어 적대감을 가지는 것이 다른 ‘인내’, ‘아량’, 또 ‘이웃 사랑’보다 나의 본능에 잘 어울리는 것 같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2:218). 잡다하게 이 책, 저 책을 읽지 말고 자기 자신의 생각을 짜낸 사람들의 책을 읽으라는 것, 항상 새로운 책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자기 마음에 드는 책을 여러번 되풀이 읽으라는 것----, 이러한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말을 종합하여 검토해볼 때, 그것은 “고전을 열심히 읽으라/ 참으로 고전다운 고전을 열심히 읽으라”는 독일의 문예비평가인 슐레겔의 견해와도 일치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전은 시대를 초월해서 살아 있는 책이며, 그 저자만의 독특한 사상이 완성되어 있는 책이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 {성경}, {불경}, {희랍비극}, {희랍희극}, 셰익스피어, 괴테, 단테, {일리어드}, {오딧세우스}, 발자크, 톨스토이,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의 세계적인 대 작가와 대 사상가들의 책을 읽는다는 것을 뜻하며, 그들이 주도 면밀하게 전개한 사상을 배우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 철학적인 문맥 속에서 자기 자신만의 사상을 전개시켜 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의 서문에서,

 

무화과 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지고 있다. 그 열매의 달콤함, 그리고 향기로움이란! 그 열매가 떨어지면 붉은 껍질은 터진다.

나는 무르익은 무화과 열매를 떨어뜨리는 북풍일지니.

그러하니 무화과 열매처럼, 나의 가르침이 너희들에게 떨어지리라. 나의 벗이여, 그것의 즙과 그것의 향기로운 살을 먹어 보아라. 맑은 하늘 어느 오후에, 그것이 우리 곁에 떨어지고 있다(2:192)

 

라고, 절규를 할 때, 우리는 그의 책이 위대한 고전의 전통 속에서 탄생되었음을 알 수가 있게 된다.

 

니체의 자기 과시적인 현학과 그 오만방자함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그의 책을 읽지 않아도 되고, 더군다나 그의 가르침 따위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것이, 천재의 징표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인류의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의 저서를 외면하는 과오를 범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천재들이 있었기 때문에 불후의 고전들을 문화유산으로 물려받고 있는 것이며, 그들의 사상의 즙과 향기로운 살을 먹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타인의 말과 사유에 깊이 있게 공감하고 그 공감을 통하여 새로운 것을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고전이란 수천 년, 혹은 수백 년의 역사를 통하여 모든 인류의 심금을 울려 왔기 때문에, 어떠한 비판이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의 의의를 상실하지 않는 책을 말한다.

 

이러한 고전들의 공통점은 다양한 해석만이 있을 뿐이지, 그 정답이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의 인생이 마치 풀어도 풀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도 같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고전의 공통점은 한 두번 읽고 그칠 수 있는 성격의 책이 아니라, 수없이 되풀이 읽고 또 읽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사건의 전개 과정도 다양하고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성격이 저마다 독특하고 사건의 전개 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삶의 상징적 축도로써 그만큼 흥미가 진진하다는 것을 뜻한다. [햄릿]이나 [일리어드]나 [오딧세우스]가 그 좋은 예에 해당된다. 왜 햄릿은 아버지의 망령이 부과한 복수를 이행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던 것일까? 니체는 그의 {비극의 탄생}에서 “무서운 진리에의 통찰이 행동을 유발시키는 모든 동기를 말소시켜 버린다”라고 해석한 바가 있고, 프로이트는 외디프스적인 욕망의 삼각 관계 속에서 창백한 지식인의 전형으로서 햄릿을 묘사해낸 바가 있다. 무서운 진리에의 통찰을 니체의 권력의 의지에 비추어 해석해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아버지--왕을 살해하고 그 왕의 지위를 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또한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에 비추어 햄릿을 살펴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동침하려는 욕망임을 알 수가 있다. 니체의 입장에서 햄릿의 숙부는 권력 욕망을 성취한 인물이지만, 햄릿은 그 욕망을 실현하지 못한 인물에 불과하고,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햄릿의 숙부는 성적 욕망을 성취한 인물이지만, 햄릿은 그렇지 못한 인물에 불과하다.

 

왜 햄릿은 아버지의 망령이 부과한 복수를 이행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숙부와 내가 동일한 욕망----그것이 권력 욕망이든, 성적 욕망이든 간에----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고, 우리 인간들의 삶과 존재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니체의 권력 욕망과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은 그들의 학문 분야와 세계관의 차이만큼이나 매우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하이덱거와 사르트르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의 철학이 배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니체의 권력 욕망과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에도 공감을 하고 있고,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가 된다라는 실존주의자들의 목소리에도 공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돈, 명예, 권력 등, 그 모든 것이 비록, 무의미하고 부질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쓸데 없는 염세주의자의 산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햄릿은 오딧세우스와는 대척적인 인물이며, 어디까지나 창백한 지식인의 전형일 뿐이다. 그에게는 어떠한 삶의 목표도 있을 수가 없고, 어떠한 의미도 있을 수가 없다. 아마도 그에게는 니체의 권력 욕망이나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 이전에, 어떠한 위기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거세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오딧세우스와도 같이 수많은 불행, 곤경, 위험 앞에서도 두 눈 하나 껌뻑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살아가기에 알맞은 곳이지, 햄릿과도 같이 우유부단하고 창백한 지식인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우리들은 위대한 고전들을 수없이 되풀이 읽고, 또 읽어야 하지만, 마침내 자기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제시해 놓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것을 창조적인 독서라고 부른다.

 

1

절망한 자들은 대담해지는 법이다

----니체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

 

(최승호, [인식의 힘], {고슴도치의 마을}, (文學과知性社, 1985) )

 

 

2

‘절망한 자들은 대담해지는 법이다’라는 니체의 경구를 에피그라프로 하고 있는 최승호의 2행시는 臨濟의 喝(할)의 그것처럼 힘이 있다. 힘, 힘, 인식의 힘!

 

“사자가 한번 부르짖으니,

여우의 머리골이 찢어지도다.”

 

이건 {西翁演義 臨濟錄}(東西文化社, 1974) 중의 [到明化]에 대한 서옹 스님의 ‘着語’이다

----박남철, [인식의 힘] 전문

 

박남철의 [인식의 힘]은 최승호의 [인식의 힘]에 대한 패로디이면서도, 그것을 넘어서서 새롭게 변용시킨 창조적인 패로디의 수일한 예에 해당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절망한 자들은 대담해지는 법이다라는 니체의 경구를 통해서,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라는 것은 최승호의 [인식의 힘]이지만, 니체의 경구와 臨濟의 경구를 겹쳐 놓으면서, “사자가 한번 부르짖으니/ 여우의 머리골이 찢어지도다”라는 [인식의 힘]은 박남철의 시가 된다. 아니, 니체의 경구와 臨濟의 경구가 박남철의 [인식의 힘]으로 녹아들고, 전반부의 최승호의 시와 후반부의 박남철의 시가 그 [인식의 힘]으로 녹아든다.

 

거기에는 절망한 자의 자기 초극의 정신이 배어 있고, 자기를 초월한 자의 놀라운 힘의 위용이 또한 펼쳐지고 있다. 진정으로 용기 있는 자는 햄릿과 반대 방향에서 절망을 해야 될 때조차도 절망을 하지 않는 자를 말하고, 그 위기를 최선의 기회로 삼을 줄을 아는 자를 말한다. 또한 진정으로 용기 있는 자는 “날개 돋친 도마뱀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를 말하고, 그 자유로운 존재론적 근거를 통해서 “사자가 한번 부르짖으니/ 여우의 머리골이 찢어지도다”에서처럼,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자를 말한다.

 

최승호가 그 ‘인식의 힘’을 통하여 “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했다면, 박남철은 그 ‘인식의 힘’을 통하여 날개 돋친 도마뱀을 사자로 변용시키고, 백수의 왕인 사자의 위용을 유감없이 드러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박남철의 [인식의 힘]을 피상적으로 읽을 때, 거기에는 니체, 臨濟, 최승호의 사유만이 있을 뿐, 그의 사유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는 시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독서일 뿐, 니체와 臨濟의 사유를 대비시키고 최승호의 사유와 자기 자신의 사유를 대비시키면서, [인식의 힘]의 공간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변용시킨 그의 독창성을 보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절망한 자들은 대담해지는 법을 알고 있는 자들이고, 그들은 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날개 돋친 도마뱀처럼 자유로운 자들이고, 백수의 왕인 사자처럼 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들이다. 박남철의 [인식의 힘]은 그의 앎에의 의지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권력의 의지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앎과 권력의 상관 관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자는 백수의 왕인 사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박남철의 시적 전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박남철은 이러한 [인식의 힘]을 쓰기 위하여 니체를 읽고, 臨濟錄을 읽고, 최승호의 시들을 읽는다. 그는 이러한 책들을 머리맡에 두고 走馬看山格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자다가도 읽고, 잠들기 전에도 읽고, 깨어나서도 또 읽는다. 그 읽기가 되풀이 되고 극단화될 때는, 아마도 그는 그것을 되풀이 베껴보고, 또 베껴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박남철은 이러한 읽기의 힘, 혹은 창조적인 독서의 힘을 통하여 여러 시인들과 철학자들의 사유를 종합하고, 자기 자신만의 사유를 새롭게 펼쳐보인다.

 

박남철이 한국시문학사상, 최초로 새롭게 펼쳐 보이고 있는 ‘메타 시’, 혹은 ‘비평시’는 자기가 속한 역사 철학적인 문맥을 아는 최선의 방법이며, 창조적인 독서의 가장 모범적인 예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명수의 [檢車員]에 대한 시에서처럼, 그의 시집을 머리맡에 두고, 읽고 또 읽으며, 시의 原音을 듣고자 했던 시인, 감태준의 {몸 바뀐 사람들}을 머리맡에 두고, 읽고 또 읽으며, “구부러진 못 하나에도 집이 보인다”라는 시구에 입을 맞추며 철거민들과 함께, 눈물을 흘러야만 했던 시인, 그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와 바슐라르와도 같이 느릿느릿 책읽기의 대가이며, 행복한 책읽기의 대가이다. 나는 박남철의 비평시집, {龍의 모습으로}(청하, 1990)를 읽으면서, 김수영 이후, 한국에는 단 하나의 시인 ‘박남철’이 있을 뿐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 독서만이 그대의 무지를 일깨워 주고, 독서만이 그대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독서만이 그대에게 용기와 희망을 가져다 주고, 독서만이 어떠한 미로와 함정----그것이 남북분단이든, IMF 사태이든지 간에----마저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독서만이 날개 달린 천사의 옷을 입혀 줄 수가 있고, 독서만이 우리 인간들의 불완전한 한계를 극복하고, 전지전능하신 신이 되어주게 해준다. 아아, 무식하고, 또 무식한 우리 한국인들이여, 이제는 제발 책을 읽는 방법부터 배워라!

 

   우리 인간들의 삶은 해답이 없는 삶이며,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가 겹쳐져 있는 삶이다. 성공이 있기 때문에 실패가 있고, 실패가 있기 때문에 성공도 있다. 승리가 있기 때문에 패배도 있고, 패배가 있기 때문에 승리도 있다. 언제, 어디서나 성공과 승리만이 보장된다면, 그것처럼 무의미하고 권태로운 삶도 없을 것이다. 한, 두번 책읽기로 모든 것 다 해결된다면 그것은 위대한 고전이 될 수가 없다.

 

코란을 7만번이나 읽었다는 어느 이슬람교 박사의 말도 있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과 존경하는 철학자의 책들을 수십번씩, 수백번씩 되풀이 읽고 그것을 베껴 본 좋은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 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발견하였고, 마호메트 역시도 뿔뿔이 흩어져 쓸데 없는 우상숭배에 시달리고 있는 아랍 민족들의 삶을 발견하였다. 자기 민족이나 백성들의 삶을 발견해야만 위대한 지도자라고 할 수가 있듯이, 위대한 철학자는 자기 자신만의 비평방법과 문학 이론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주제비평의 부재’, ‘철학의 빈곤 아닌 부재현상’, ‘독창적인 비평방법론의 부재현상’ 등, ‘제3세계의 문화적 풍토병’과 ‘비평의 만장일치제도’에 신음하고 있는 한국문학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지적으로 세련되고 노련한 名醫가 암적인 종양을 제거하듯이, 한국문학의 인식론적 장애물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무도 인정을 하지 않고, 또 인정을 해줄 수도 없겠지만, {행복의 깊이}와 {한국문학비평의 혁명}은 매우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의 소산이며,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한국인 최초로 문학이론의 정립과 낙천주의의 철학을 전개할 수가 있었다. 앞으로 한국문학의 현대성의 기점은 그 두 권의 저서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 우리 한국인들의 미래는 없게 될 것이다. 나는 스스로, 자발적으로, 우리 한국인들의 미래의 희망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인간들은 음식물을 통해서 육체적으로 살고, 독서를 통해서 자양분을 흡수하며 정신적으로 살아간다. 전자는 모든 동식물들의 공통점이지만, 후자는 사색할 줄 아는 우리 인간들의 특성에 해당된다. 우리는 독서를 통하여 새로운 사상을 완성하고 이 세계를 제멋대로 손질을 할 수 있는 특권을 향유하게 되었다. 이 사색인의 권리,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특권을 향유하려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지적인 쾌감을 맛보아야 하고, 호머,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셰익스피어, 괴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니체 등으로부터 그 아름답고 신성한 숲의 향기를 맡아보지 않으면 안된다. 고전은 우리 인간들의 삶의 터전이자 영원한 휴식처이기도 한 것이다.

 

토마스 칼라일에 따르면 이러한 고전들은 우리 인간들만의 선택받은 소유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금속활자를 최초로 발견하고 한글의 우수성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출판 과정의 도구일 뿐, 책 그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책들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사유와 행동, 성격과 취향, 전통과 문화유산, 풍습과 도덕, 사회 질서와 법과 제도 등, 그 모든 것이 요술단지처럼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한국인들은 영국의 셰익스피어, 이탈리아의 단테, 그리스의 호머, 독일의 괴테처럼, 말하고,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 수많은 책들을 다 읽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읽지 못하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 부지런히 쓰고 또 쓰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쓰지 못하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 이제 우리 한국인들은 문화 이전의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나 어느 누구도, 시간도, 우연도 폐위시킬 수 없는 대 작가들을 배출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대 작가들은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는 황제이며,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이고도 객관적인 전범(人神)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왜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 갔는지, 그 이점들을 너무나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처 자식을 거느리지 않고 살아가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무서울 정도로 정신을 집중시킬 수가 있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여기 저기 군살이 더럭더럭 붙은 퇴물 권투선수처럼, 그럴 수가 없다. 아이들의 병과 교육 문제, 야외놀이와 영화구경, 장인 장모의 생신, 아내의 투정과 잦은 말다툼, 허례허식 투성이인 관혼상제 따위 등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서양의 철학자들은 모든 사사로운 인간 관계와 우리 인간들의 성적 욕망마저도 억제를 하고 학문을 위하여 출가를 했지만, 나는 아내의 덕을 보고 그 덕 가운데서 공부를 하기 위해 결혼을 했다. 이것이 억지 춘향이와도 같은 기구한 나의 인생인 것이다. 나는 결혼을 한 것을 너무나도 뼈 저리게 후회하고 있고, 그에 대한 반 작용으로써 어쨌든 죽자사자 학문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화두는 어디까지나 햄릿의 문제일 뿐, 나의 심금을 울리지는 못한다. 나는 하루에도 수없이 “내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고 되풀이 외쳐보고 있을 뿐이다. 아이들의 병, 학교, 야유회를 나는 모르고, 장인 장모의 생신이나 아내의 투정 따위를 나는 모른다. 진정으로 학문을 위해 출가를 할 수밖에 없었던 위대한 스승들을 떠올려 보면서 나는 나의 일과표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아침 06:00시 기상; 06:00시부터 08:00시까지 공부(2시간); 08:00시부터 09:00시까지 아침 식사; 09:00시부터 12:00시까지 공부(3시간); 12:00시부터 14:00시까지 산책, 점심식사, 오침; 14:00시부터 17:00시까지 공부(3시간); 17:00시부터 19:00시까지 오후 산책 및 저녁 식사19:00시부터 21:00시까지 공부(2시간). 총 10시간 공부.

 

예전에는 하루에 열 두 시간씩, 열 네 시간씩, 밥 먹는 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도 아까워하면서 공부를 한 적도 있었지만, 요즈음에는 도저히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여러 가지 사정과 요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제일 문제점인 것은 역시 체력일 수밖에 없다. 하루에 열 시간씩 공부를 한다는 이 일과표 역시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때가 많고, 술을 마시거나 등산을 하고 그밖의 잡다한 사건들에 소비된 시간들을 제한다고 하더라도 하루에 평균 5--6시간씩은 꼬박꼬박 공부를 하는 셈이 된다. I.Q가 200이라도 둔재가 있는가 하면, I.Q가 120이라도 천재가 있다. 천재의 길은 I.Q의 높고 낮음의문제가 아니라,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삶의 투신에의 문제이다. 이러한 투신은 모험이라고 부를 수가 있으며, 그 모험의 위험성만큼이나 열정의 강도가 그 천재성을 뒷받침해준다. 이러한 자기 헌신과 자기 희생의 노력 없이는 어느 누구도 천재의 삶을 살아 갈 수가 없다. 독자 여러분들을 위해서, 아니, 독서를 할 줄 모르고 공부를 할 줄을 모르는 우리 한국인들을 위해서, 내가 공개해야 될 또 하나의, 나의 재산목록1호가 있다. 나는, 틈틈히, 내가 읽고 좋아하는 책들을 자그만 수첩에 필사해두는 좋은 습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1,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2, 니체, {우상의 황혼); 3, 니체, {비극의 탄생}; 4, 니체, {즐거운 지식}; 5, 니체, {서광}; 6, 니체, {선악을 넘어서}; 7,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8, 니체, {이 사람을 보라}; 9, 니체, {반 시대적 고찰}; 10, 니체, {도덕의 계보}; 11,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2, 크리스토퍼 라쉬, {나르시시즘의 문화}; 13, 김현 편, {수사학}; 14, 모리쇼 블랑쇼, {문학의 공간}; 15, 질베르 뒤랑, {상징적 상상력}; 16, 마르크스, {자본론 1 2 3}; 17,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18, 괴테, {파우스트}; 19, 롤로 메이, {창조와 용기}; 20, 마키아벨리, {군주론}; 21,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2,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23, 피터 버어거, {사회학에의 초대}; 24, 미셀 푸코, {감시와 처벌}; 25, 라키토프, {컴퓨터 혁명의 철학}; 26,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27, 융, {심리학}; 28, E,H, 카아, {역사란 무엇인가}; 29, 칼 포퍼, {열린 사회와 적들}; 30, N, 프라이, {비평의 해부}; 31, 루카치, {소설의 이론}, 32, 쿠르트 휘브너, {신화의 진실}; 33,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34, 신오현, {자유와 비극--사르트르의 인간 존재론}; 35, E, 라이트, {정신분석비평}, 36, 엘리아데, {종교형태론}; 37, M. 토케어, {탈무드}; 38, 스피노자, {에티카}; 39, 들뢰즈/가타리, {앙티 외디프스}; 40, 움베르트 에코, {장미의 이름}; 41, 엘리아데, {상징, 신성, 예술}; 42, 몽떼뉴, {수상록}; 43, 길희성 역, {바가바드기타}; 44, 로제 카이와, {놀이와 인간}; 45, 베르그송, {사유와 운동}; 46, 플라톤, {국가론}; 47, 플라톤, {플라톤과의 대화} 등.

 

우리 한국인들의 나이로 마흔 다섯 살이나 된 지금, 하루 평균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을 공부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많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다섯 시간이나 여섯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정신과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느냐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좋아하는 학문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생략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어떤 사람은 나의 일과표나 수첩목록을 보고 마치, 대학 입시를 준비 중인 수험생과도 같다고 비웃을는지도 모르고, 또 어떤 사람은 얼마나 머리가 둔하면 그처럼 빡빡한 일과표와 그처럼 무모한 짓을 되풀이 하겠느냐고 비웃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비웃음 따위는 전혀 의식조차도 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수첩들이 나의 재산목록1호가 된 것은 거기에는 수많은 시간과 학문에 대한 열정과 나의 성실성의 때가 거울과도 같이 맑고 반들반들하게 묻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첩들 중 어느 하나만 있으면 시내버스가 한 두 시간 쯤 막혀버려도 좋고, 꼭 만나보고 싶던 사람이 한 두 시간쯤 늦게 나타나도 문제가 없다.

 

답답한 서재를 뛰쳐나와 맑고 상쾌한 공기를 마셔가며 양지 바른 언덕에서 공부를 할 수가 있어서 좋고, 또 이부자리에 누워서도 간편하게 읽고 넘길 수가 있어서 좋다. 대부분이 위대했던 천재들은 언제나 연구실과 서재만을 오고 갔던 공부벌레들이며, 무리를 이룬 다수로부터 떨어져 나온 외롭고 고독했던 개인들일 뿐이다. 그들의 비사교적인 몰취미가 그들의 성실함의 증거이며 위대함의 징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박세리 선수에게는 언제나 똑같은 일과와 똑같은 퍼팅 연습이 중요하듯이, 앎의 육화된 사람에게도 반복은 모든 학문과 진리 탐구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루를 쉬면 그것을 만회하는 데 이틀이 걸리고, 이틀을 쉬면 그것을 만회하는 데 나흘이 걸린다. 1년을 쉬면 그것을 만회하는 데 2년이 걸리고, 2년을 쉬면 그것을 만회하는 데 4년이 걸린다.

 

나는 나의 서재에 ‘모든 천재는 인류의 스승이다’라는 좌우명을 붙여놓고 있다. 타인의 말과 사유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그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론은 안경과 같은 것이 아니라 총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도 나는 ‘모든 천재는 인류의 스승이다’라는 그 좌우명을 향하여 전진을 하고, 또 전진을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어떠한 책들을 읽고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 것인가라는 서두의 질문들이 모두 해결된 지금, 나는 여러 독자들에게 좋은 문장, 좋은 문체를 만나면 끊임없이 되풀이 암기하고, 또 베껴볼 것을 권하고 싶다. 문체를 보면 그가 제일급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는 것처럼, 좋은 문체는 그의 앎이 육화될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획득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시 한 구절에 우주 전체를 담으려고 노력하는 시인, 시 한 구절을 쓰기 위해서 동시대의 역사 철학적인 문맥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는 시인, 니체처럼, 남들이 열 권의 책으로도 말하지 못한 것을 단 한 줄의 시구로 표현하려고 하는 시인 등----. 이러한 모든 시인들은 펜이 아닌, 붉디 붉은 피로써 자기 자신만의 문체를 구축해 놓고 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제일급의 인사들의 문체는 “설득력 있고 화려”하기도 하고, “비교의 재능과 자유분방한 표현”을 구사할 줄도 알고 있다. 또한 제일급의 인사들의 문체는 “날카롭고 경쾌”하기도 하고, “간결하고 기지가 있기”도 하다(3:354). 니체의 문체는, 예컨대,

 

“짐승의 무리 중에서 많은 짐승들을 꾀어내기 위해----그러기 위해 나는 왔다. 군중과 짐승의 무리들은 내게 화를 내리라. 목자들에겐 짜라투스트라는 강도라고 불리우리라.

나는 목자들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선한 자, 의로운 자들이라고 부른다. 나는 목자들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올바른 신앙을 가진 신도들이라고 부른다.

 

보라, 저 선한 자들, 의로운 자들을! 그들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그들의 가치 표(表)를 부수는 자, 파괴자, 범죄자이다. ----허나 그는 창조하는 자인 것이다.

보라, 온갖 신앙을 가진 신도들을! 그들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그들의 가치 표(表)를 부수는 자, 파괴자, 범죄자이다. 허나 그는 창조하는 자인 것이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시체를 구하는 게 아니고 또한 짐승의 무리나 신도들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表)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4:62)

 

라는 글에서처럼,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압도적으로 인식시키고 있고, 쇼펜하우어의 문체는, 예컨대,

 

“제일급의 정신에 어울리는 특징은 그 판단을 모두 자신이 직접 내렸다는 것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의견은 모두 그들이 사색하여 얻은 결과이며, 그 말하는 솜씨만을 보아도 언제나 제일급의 사람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독일 제국의 제후처럼 정신의 제국에 직속되어 있다. 이에 반해서 범용한 우리들은 모두 배신(倍臣)이다. 이것은 독자적인 특징을 나타내지 않는 그 문체로 알 수 있다. 진정한 사색가는 이런 점에서 군주와 같다. 그는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독자적인 지위를 유지하며, 자기 위에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 판단은 군주가 결정할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절대적 권력으로서 행하며, 자기 자신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즉 군주가 타인의 명령을 승인하지 않는 것처럼 사색가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 자신이 시인한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승인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서 유행하는 각종 의견, 권위, 편견에 사로잡힌 속된 두뇌의 소유자는 법이나 명령에 묵묵히 복종하는 민중과 비슷하다”(3:23)

 

라는 글에서처럼,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압도적으로 인식시키고 있다.

 

니체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모두 루터교 목사였지만, 철두철미하게 반 기독교주의자로서 그의 일생을 마친 인물이었다. 그가 기독교 사상에 반발했던 것은 그것이 모든 것을 하향적인 평준화----예컨대 고귀하고 위대한 귀족의 가치관에 반하여 자유와 평등과 사랑이라는 천민의 가치관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로 깎아내린 것은 물론, 쓸데 없는 이상론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칭, “선한 자, 의로운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있는 기독교 신자들을 “짐승의 무리”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가치기준표를 파괴하는 범죄자가 되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하늘 나라의 천국이나 이상이 아닌, 이 땅에 두 발을 튼튼히 내린 짜라투스트라, 즉, 고귀하고 위대한 초인의 상을 제시하면서, 비록, 아무런 실현 가능성도 없는 일이지만, “새로운 표(表)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함께 창조하는” “길동무”를 구했던 것이다. 모든 창조자는 위대한 단독자이지, 짐승의 무리가 아니다. 또한 위대한 단독자는 그 모든 가치기준표를 파괴하는 범죄자이지, 언제나 자비롭고 친절한 사제가 아니다. 모든 문체는 개성화의 표지이자, 자기 자신의 존재의 증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니체의 문체는 자기고백적인 에세이 문체이자, 잠언적이며 경구적인 문체이다. 그는 그의 언어를 날카로운 검객의 칼날처럼 사용하고 있으며, 그 멋진 문체를 위하여 대학 선생 따위는 과감하게 던져버릴 줄----그는 자기 투신의 대가이다----도 알고 있었다. 니체의 문체는 어떠한 논쟁마저도 사양을 하지 않고 있는 문체이며, 그만큼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문체라고 할 수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이기적인 욕망과 우리 인간들의 삶의 의지마저도 부정했던 염세주의의 창시자이긴 하지만, 끝끝내 우리 인간들의 삶으로부터 도피를 하거나 허무에만 의지를 하지는 않았다. 전제 군주와도 같이 모든 것을 제멋대로 평가하고 명명할 수 있는 자는 절대로 염세주의자가 될 수 없으며, 그는 그 아름다운 염세주의의 창시자가 되기 위해서, “유행하는 각종 의견, 권위”, “법이나 명령” 따위를 절대로 인정을 하지 않았다.

 

제 일급의 정신의 소유자가 타인의 말과 사유 앞에서 노예적인 복종 태도를 지닌 ‘배신’(倍臣)이 될 수는 없으며, 그는 언제나 멋진 신세계 속에 자기 자신만의 “정신의 제국”을 건설해 놓았던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문체는 자기 고백적인 에세이 문체이자, 어디까지나 단호한 내면적인 독백의 문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절대로 화려한 수사를 앞 세우지도 않고 있고, 자기 기만적인 허황된 포즈나 체제 전복적인 감수성을 내세우지도 않고 있다. 하지만 그의 문체는 그 역시도 대학 선생 따위는 과감하게 던져버린 것처럼, 그의 삶의 진실이 담겨 있고, 어떠한 환경이나 물리적인 압력에도 결코, 타협을 하지 않을 만큼의 대쪽같은 선비 정신이 담겨 있다.

 

이제는 한국의 현대 시인들의 문체를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황지우의 문체는, 예컨대,

 

현실: 꼼짝못함. 체형: 부동형 자세. 경제: 빚더미. 교육: 무지몽매. 예술: 신성한 거품의 OB 맥주. 아, 삶: 입구멍, 똥구멍, 오줌구멍만 뚫려 있음. 여기저기에 핀 포인팅. 종교: 없음이라는, [그대의 표정 앞에서]처럼, 싸늘하고 냉소적인 문체이며, 송찬호와 기형도의 문체는, 예컨대,

 

마른 번개 널름거리는 캄캄한 아가리 속 꿈틀거리는

욕망이여, 온몸 징그러운 무늬의 삶이여

예서 길이 끝나는구나 벼랑 끝에 서고 보니

길없는 깊은 세상이 더 가까워 보이는구나

마지막 한걸음, 뒤에서 등을 밀어

그래, 가자 가자

 

신 한 켤레 놓여 있는 물가

멀리, 깁고 기운 물갈퀴 하나

또 한세상 힘겹게 건너가고 있다

 

----송찬호, [門 앞에서]에서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기형도, [病] 전문

 

라는, 시들에서처럼, 밑바닥 모를 심연으로만 끊임없이 침잠하고 있는 절망적인 내면의 독백문체라고 할 수가 있다. 황지우의 문체 속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지는 못한다.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는 커녕, 황지우가 쳐놓은 그물, 혹은 마침표 속에 갇혀서 싸늘하고 냉소적인 한숨만을 덧보태게 된다. 그의 마침표 속에는 무지몽매한 교육과 빚더미에 올라 앉은 경제도 들어 있고, 입구멍, 오줌구멍, 똥구멍만이 있는 삶과 신선한 OB 맥주의 거품같은 예술도 들어 있다. 또한 여기 저기에 핀 포인팅된 부동형의 자세도 들어 있고, 종교의 자유가 아닌 무신론의 자유마저도 들어 있다. 어떠한 희망도 없고 아무런 출구도 없다는 점에서는 송찬호와 기형도의 문체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른 번개 널름거리는 캄캄한 아가리 속 꿈틀거리는/ 욕망이여, 온몸 징그러운 무늬의 삶이여/ 예서 길이 끝나는구나/ 벼랑 끝에 서고 보니/ 길없는 세상이 더 가까워 보이는구나”라는 시구가 그렇고,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라는 시구가 그렇다.

 

황지우의 문체는 호전적이고 전투적이라기보다는 어느 것에도 긍정을 표시하지 않는 회의주의자, 혹은 냉소주의자의 문체이며, 송찬호와 기형도의 문체는 날카롭고 예리한 비판 정신과 부정 정신보다는 실존의 고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염세주의자로서의 처절한 울림의 문체에 가깝다. 황지우의 문체는 체제 전복적인 감수성과 결부될 때, 더욱 더 그 빛을 발하게 되고, 송찬호와 기형도의 문체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자포자기와 체념에 결부될 때, 더욱 더 그 빛을 발하게 된다. 나의 취향을 말한다면, 나는 자기 자신의 언어를 날카로운 검객의 칼날처럼 사용하는 시인을 더욱 더 사랑하고, 그만큼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문체의 소유자를 더욱 더 사랑한다. 가령, 예컨대,

 

내 지나는 곳에는 고독만이 깔려 있고

내 지나는 곳에는 후회만이 몰아치고

씨양 지나가는 곳에는 분노만이 뒤덮인다

분노가 뒤덮이고 오기가 뻥 터지면서

끄으윽 지나는 곳에는 술이

비처럼 내린다

 

비야 비야 오지 마라

이 내가 젖으면 비극이 되잖아

 

우후 내가 지나갈 때에는 약속과 외상만 깔린다

 

라는, 박남철의 [나그네]가 그 좋은 예에 해당된다.

 

박남철은 그의 문체 속에서 고독하게 살고 있기도 하고, 후회를 되씹으면서 살고 있기도 하다. 또한 그는 그의 문체 속에서 분노와 오기를 뻥 튀기면서 살고 있기도 하고, 그 분노와 오기가 부르는 ‘술의 비’에 젖어서 살고 있기도 하다. 그는 무리를 이룬 다수와는 언제나 대척적인 삶을 살고 있고, 그러한 나그네의 자유를 위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단호하게 대처할 줄을 알고 있다.

 

“지금도 그녀는 자면서도 싱긋 웃으면서 난 닭이 되고 싶어......(암탉이 울면......) 무슨 계란 같은 개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다”

의 [그리고 貪妻]도 그의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의 산물에 해당되고,

 

“학교라는 場은 개인의 교육장이며 선생님들도 배우는 곳입니다----이거봐 깨졌잖아 그건 깨진//나는 정말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동시에 사랑하지 않습니다(바로 이게 중요합니다)”의 [卒業 또는 담배], 그리고

 

“나야 뭐 돈이 없어서 그냥 어머니의 x지를 박차고 나왔지 뭐!”

라는, [第一聲]도 그의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의 산물에 해당된다.

 

박남철의 문체는 니체의 문체에 가깝고 그만큼 호전적이고 전투적이다. 언제, 어느 때나 그의 문체는 야유, 독설, 기지, 위트, 그리고 천둥과 번개와도 같은 섬뜩함과 그 울림을 간직하고 있다. 박남철의 문체는 김수영의 문체처럼, 장중하고 울림이 큰 문체이며, 모든 천재, 바보, 기인, 미치광이, 범죄인들의 혈통이 여기에 속하게 된다. 황지우의 싸늘하고 냉소적인 문체, 송찬호와 기형도의 절망적인 내면의 독백 문체, 박남철의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문체는 한국 사회에서 제일급의 문체임을 말해 줌과 동시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지도 오래되었다. 그의 문체를 보면 그가 제일급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고, 그가 자기 자신의 붉디 붉은 피로써 글을 쓰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다. 또한 그의 문체를 보면 그가 진정한 창조자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고, 그가 언어의 외관을 뚫고 들어가 언어의 심장을 움직일 수 있는 마술사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시를 쓴다. 모든 문체는 그의 개성화의 표지이자, 자기 자신의 존재의 증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진정으로 고전다운 고전을 읽고, 그것을 수십번씩, 수백번씩 되풀이 읽고, 또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좋은 문체, 좋은 문장을 만나면 그것을 끊임없이 되풀이 암기하고, 또 베껴보기를 권하고 싶다.

 

하지만 좋은 문체와 좋은 문장은 위대한 대작가들의 필수적인 조건일 뿐, 그것 자체로 위대한 고전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고전이 그 작가만의 대범한 관점과 저마다 독특하고 새로운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면, 좋은 문체와 좋은 문장이란 그 사상의 외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좋은 문체와 좋은 문장이란 형식을 말하고, 사상이란 그 내용을 말한다. 좋은 문체와 좋은 문장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되면 형식주의의 함정에 빠져들 염려가 있고, 작가의 사상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되면 경직된 현실주의의 함정에 빠져들 염려가 있다. 내가 좋은 문체와 좋은 문장을 강조한 것은 어디까지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된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된다는 말 속에는 그 내용과 형식의 문제가 변증법적으로 지양되어 있고, 따라서 더 이상의 쓸데 없는 논쟁을 불러 일으키지는 않는다. 좋은 문체와 좋은 문장이 새로운 사상을 담고 있지 않을 리가 없고, 새로운 사상이 좋은 문체와 좋은 문장 속에 전개되지 않을 리가 없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이냐는 식의 해묵은 논쟁을 떠나서, 제일급의 문체의 소유자는 선악을 넘어서서 대범한 관점과 새로운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부와 근친상간의 문제를 다룬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프스 대왕]을 생각해보고, 팔라스 아테네의 성상을 훔치고 그 신전의 여사제를 학대했던 댓가로 머나 먼 이역 만리에서 10여년 동안을 떠돌아 다녀야만 했던 호머의 {오딧세우스}를 생각해보라!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실존적 고뇌를 다른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생각해보고, 기상천외하게도 여인들의 성적 스트라이크를 통해서 날이면 날마다 전쟁만을 일삼던 남성들을 굴복시키고 마침내 평화를 쟁취해내는 아리스토파네스의 [류시스트라테]를 생각해보라! 나는 [외디프스 신화의 수용 양상과 재해석]이라는 짧지 않은 글에서 외디프스 신화를 해석할 수 있는 여러 관점들----神正論的 관점, 신성모독적 관점, 성적 욕망의 관점, 모방 욕망의 관점, 정체성 회복 욕망의 관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과 외디프스 신화는 무엇을 감추고 있는 신화인가----지배 계급 내의 권력 투쟁의 역사를 감추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라는 것과 외디프스의 파멸은 성적 욕망이나 모방 욕망에 의한 파멸이 아니라, 정체성 회복 욕망에 의한 파멸이란 사실을 천착해낸 바가 있고( 5 ), {햄릿}의 해석의 문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류시스트라테]와 {오딧세우스} 중, 호머의 [오딧세우스}를 살펴보기로 하자. 오딧세우스라는 인물은 왜 오딧세우스이며, 무엇 때문에 호머의 {오딧세우스}는 그의 {일리어드}와 함께, 그리스 민족의 대 서사시만이 아닌, 모든 인류의 대 서사시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인가? 호머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무엇이며, 그는 또한 어떠한 인물인가? 우리가 대 작가, 혹은 대 서사시인 앞에서 이러한 질문들을 던진다는 것은 그의 명예를 훼손하자는 불순한 의도도 아니고, 더 더군다나 무조건적인 찬양과 숭배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독서의 전제 조건은 타인의 의견과 타인의 사상에 이의를 제기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고,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 자기 자신만의 사상을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만의 독자적인 생각과 독자적인 판단으로 숭배를 해야될 대상에는 숭배를 해야되고, 그렇지 못할 때는 가차 없이 숭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

 

오딧세우스는 이 세상에 나올 때, 마악 성을 내고 나왔음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욕을 잘하고 거짓말을 잘했던 그의 외할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 오딧세우스의 이름의 어원이 ‘성을 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예사롭지가 않고, 그의 외할아버지의 이름짓기 능력이나 그의 전력도 예사롭지가 않다. 그것은 모두가 오딧세우스가 특별한 표지를 지니고 태어났다는 것을 말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악을 넘어서서 위대한 문화적 영웅의 표지를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오딧세우는 이 세상에서 가장 거짓말을 잘하고 교활했던 자이기도 하고, 어느 누구보다도 진실하고 지혜로웠던 자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위선자이자 신성모독자이기도 했고, 어느 누구보다도 선량하고 독실한 신자이기도 했다. 요정 칼립소가 제의했던 영생불사의 삶도 거절하고 수많은 모험과 고통을 찾아 나섰던 사나이, 미래의 운명의 주인공이 되기 위하여 지하의 세계인 하데스를 방문하고 결코, 들어서는 안되는 사이렌의 노래 소리를 듣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돛대에 묶고 미칠듯이 발광해야만 했던 사나이, 위기를 수습하는 능력과 무서운 보복 능력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인 트로이 성을 함락시키고 수많은 청혼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던 사나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목사는 살려주지 않고 신성한 노래를 부를 줄 알던 시인은 살려 주었던 사나이----.

 

오딧세우스는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이며 수수께끼와도 같은 인물이라도 해도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그 수수께끼와도 같은 사나이도,

 

“제우스 신의 후예 라엘테스의 아드님 지혜 많은 오딧세우스여, 지금 이 시간에라도 그리운 고토로 돌아가실 것이 진정 그대 소원이십니까? 그렇다면 행운이여, 그대와 함께 있으소서. 그대여, 얼마나 큰 재난이 그대 앞에 놓였는지, 또 언제 그대가 집에 돌아갈지 아시오? 그대 날마다 소원인 그리운 부인 생각에 못 견디시겠지만, 여기에 머물러 나와 함께 삽시다. 이 집을 지킵시다. 불사의 영생을 맛봅시다. 내 단언하오니, 용모나 태도나 진실로 부인께 떨어지지 않으리다. 사파의 여성이 어찌 용모나 태도에 있어 불사의 신과 비길 수 있으리오”(6:342)

 

라고, 요정 칼립소가 제의했을 때, 그 요청을

 

“여신이여, 여왕이시여, 이제사 노하지 마소서. 또 내 자신 페넬로페가 아무리 영리하지만 미에 있어서나 체구에 있어서나 그대를 따르지 못함도 아옵니다. 그는 죽음의 인간이오, 그대는 나이를 모르고 죽음을 모르는 분. 그래도 이 몸은 날이면 날마다 고향 길이 그립고 귀국의 날이 보고 싶으니 어찌하리오. 아니 그 뿐이리오. 비록 어느 신께서 검푸른 바닷 속에서 나를 해칠지라도 내 속에 정신이 고난과 싸워 이겨 보리다. 왜? 내 이미 고난에 썩고 썩은 사람, 파도와 전쟁에는 시달리고 시달려 온 터, 고난이여, 재화여, 올테면 오라”(6:342)

 

라고, 정중하게 거절하지 않았던가?

 

오딧세우스는 날이면 날마다 그리운 조국(이타카)과 사랑하는 아내(페넬로페)와 아들(텔레마커스) 때문에 요정 칼립소와의 영생불사의 삶도 거절하고, 또한 그녀와 함께 사는 행복도 거절하지않았던가?

 

비록, 신화(허구) 속에서의 일이기는 하지만, 유한한 존재자인 인간이 영생불사의 삶을 거절하고 인간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것은 호머의 인생관에 해당되고, 내 “고난에 썩고 썩은 사람, 파도와 전쟁에는 시달리고 시달려 온 터, 고난이여, 재화여, 올테면 오라”는 것은 그의 세계관에 해당된다. 호머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를 원했지, 신으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는 고통에 고통을 가중시키면서 살아가기를 원했지, 무사안일한 생활과 나태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우리 인간들의 인생이란 유한하고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 그렇다면 바로 그 고통과의 싸움 속에 우리 인간들의 행복이 있다는 것, 이것이 호머의 인생관이자 세계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딧세우스의 조국애와 처 자식에 대한 사랑도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도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호머는 인류의 역사상, 최초로 전지전능한 신과 맞서서 휴머니즘을 옹호하고 그의 대범한 관점과 새로운 사상을 전개한 인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이 인간을 옹호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서 소멸하지 않는 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름다움이 오랜 노역의 결과인 것처럼, {오딧세우스}나 그것을 창조한 호머라는 인물은 결코 우연의 소산일 수가 없다.

 

반 고호나 폴 고갱의 작품이 오랜 노역의 결과인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예술작품들은 결코 우연의 소산일 수가 없다. 한 작가의 뛰어난 천재성은 엄청난 자기 희생과 자기 헌신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천재와 둔재의 차이는 백지 한 장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자기 희생과 자기 헌신의 결과에 따라서 하늘과 땅 차이보다 더 크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천재가 될 수는 있지만, 천재의 삶을 살다가 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한국의 작가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쓰기 위해서 글을 쓴다. 명예와 돈은 같은 무대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만, 그들은 다만 돈과 명예를 위해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글을 쓴다. 그들이 전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도 같은 행운이며, 눈 앞의 사소한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도로아미타불과도 같은 무모한 노력을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다 같이 글을 쓴다는 것을 너무도 쉽게 생각하고 어떠한 희생의 댓가도 지불하려고를 하지 않는다. 글을 쓴다는 허황된 포즈나 멋진 사기는 한국의 작가들의 외관이 되어버린지도 오래되었으며, 그 무모함과 야만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해 버려야 할 배우가 되어버린지도 오래되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려고 하지를 않는다.

 

새로운 물이 유입되지 않거나 썩어버린 물이 그 배수로를 찾지 못할 때, 호수는 이미, 어떠한 생명체도 살 수가 없는 호수가 되어버린다. 돈과 명예만을 위해서 글을 쓴다는 것, 동시대의 사회 역사적 토대 위에서 가장 심각하고도 중요한 문제점들을 찾아내지 못하고 새로운 전망을 개진하지 못한다는 것은 모든 학자들이 문둥병을 앓고 있는 것과도 같다. 눈썹이 다 떨어져 나가고 손마디를 쥐가 다 갉아먹어도 아무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문둥병 환자들은 이 세계와 모든 지식인들을 문둥이의 천국으로 인도할 뿐, 그 사회 전체를 건강하고 튼튼하게 가꾸어 나가지 못하게 한다. ‘제3세계의 문화적 풍토병’과 ‘비평의 만장일치제도’가 바로 그것들이다. 그들이 글을 쓰면 쓸 수록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되고, 화려한 독버섯처럼 허황된 포즈와 멋진 사기가 더욱 더 빛을 발하게 된다. 한국의 작가들은 문둥병 환자들이며, 불후의 고전을 모르는 날품팔이, 즉 위대한 저널리스트들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진정으로 위대한 작가는 허황된 포즈나 멋진 사기를 모르는 인간이며, 글을 쓰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사색을 하고 글을 쓴다. 그는 호수의 오염원인이 무엇인가를 파악하여 여러 지류나 하천에 정화시설을 설비하고, 호수 밑의 대양이나 주민들을 위해서 더욱 더 맑고 깨끗한 물을 흘려 보내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 그에게는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되어 돈과 명예가 거기에 끼어들 틈새도 없게 된다. 그는 동서고금의 위대한 책, 그 위대한 저자들의 비극적 운명에 더욱 더 깊은 애착을 느끼며, 부처, 예수, 마호메트 같은 종교의 안출자들이 겪었던 비극적 운명에도 깊이 있게 공감을 하고 있다.

 

이제는 그가 충분히 사색을 하고 글을 쓴다는 말도 수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삶 자체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나 명예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그는 어떠한 행운의 여신의 손길도 거절하면서 우연의 쳇바퀴를 필연의 힘으로 돌려가고자 노력한다. 이것이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의 전모이며, 모든 역사의 원동력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의 작가들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적인 문제에 함몰되어 길을 잃고 헤매게 되지만, 그는 고공을 선회하는 독수리처럼 모든 것을 휜히 꿰뚫고 있다. 그가 높이 날면 높이 날수록 문둥병에 걸린 한국의 작가들은 그의 존재를 무화시키거나 예술의 무대에 또다시 등장할 수 없도록 수많은 파수병들을 배치해 놓게 된다. 충분히 사색하고 새로운 사상과 이념을 전개시키는 진정한 작가, 그 위대한 천재는 파멸적인 우행만을 되풀이 하는 대중들의 머리 속에서 사라져 가지만, 머나 먼 외계의 혜성처럼, 먼 미래에, 그 미래의 주인공이 되어 지난 날의 모든 문둥병 환자들 위에 서게 될 것이다. 그는 대 작가나 대 철학자의 신화 속에서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면서, 무조건의 찬양과 숭배만을 일삼는 후손들에게 둘러 싸이게 될 것이다.

 

열번 백번을 말한다고 해도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자신의 사상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타인의 말과 타인의 사유를 받아 들인다는 것은 언제, 어느 때나 환영해야 될 일지만, 그러나 타인의 말과 타인의 사유에 젖어서 언제까지나 빠져 나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코 환영할 만한 일이 되지 못한다.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면 독서는 타인의 사상의 운동장에서 노는 것에 불과한 것인데,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 한국인들은 소화불량증 환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오늘도 읽고, 또 읽고 있지만, 결코 아무 것도 읽지 못하고, 오늘도 쓰고, 또 쓰고 있지만, 결코 아무 것도 쓰지 못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다독의 폐해에 젖어 있는 만성 소화불량증의 환자들에 불과하며, 언제나 성장할 줄을 모르는 발육불량의 소년들에 불과하다.

 

책을 많이 읽는 것 보다는 안 읽는 것이 더 중요할 때도 있고, 때때로 산과 강을 끼고 거닐면서 산책을 해보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다.

 

신이 만든 침대도 있고, 목수가 만든 침대도 있고, 화가가 그린 침대도 있다. 신이 만든 침대는 이데아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것이 되고, 목수가 만든 침대는 실용적이기 때문에 쓸모가 있는 것이 된다. 하지만 화가가 그린 침대는 환상 속의 그림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무런 효용가치도 없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말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그의 말을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이 만든 침대 역시도 결국은 화가가 그린 침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신은 한번도 그의 존재를 드러내 본 적이 없기 때문이고, 화가 그린 침대만이 하나의 상징적인 차원에서 불완전한 목수의 침대를 교정하고 보완해 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말은 기독교의 신자들이 날이면 날마다 십자가와 예수의 초상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서도 불교의 신자가 부처님의 초상 앞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비난하는 말만큼이나 나쁜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화가가 그린 침대가 신이 만든 침대이고, 신이 만든 침대가 화가가 그린 침대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예수의 초상도 화가가 그린 그림이고, 부처님의 초상도 화가가 그린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가 무엇이 우상(환상)이고 무엇이 우상(환상)이 아니란 말인가? 이러한 평범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때, 모든 시인들은 추방하하고 이교도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일이 생겨나게 된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이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이라고 {장미의 이름}의 저자인 움베르토 에코가 역설한 바가 있지만, 우리는 독서를 통해서 타인의 말과 타인의 사유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재빠르게 변용시키거나 버리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7:762). 너무도 많은 책을 읽고, 또 읽으면 타인의 말과 타인의 사유 앞에서 노예적인 복종 태도를 띠게 되고, 정신의 건강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히게 된다. 때때로 산책을 하면서 타인들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만의 사상을 가다듬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호머, 소포클레스, 셰익스피어, 괴테 같은 대 작가와 대 시인들을 문화적 영웅으로 부르지, 그저 그렇고 그런 어중이 떠중이들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는 오늘도 그들이 우리들 곁에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영원히 사라져 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록, 그들의 육체는 죽어갔지만, 그들의 위대했던 업적은 살아남아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 행복한 동물원 가족들

귀여운 토끼 귀, 쫑긋과

앙증맞은 여우 신발, 사뿐히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동백꽃 보러 간다

 

아빠, 동백은 어떻게 생겼어요,

곰 아저씨처럼 무서워요?

 

동백은 결코 땅에

항복하지 않는 꽃이란다

동백의 발바닥은 아주 붉지

그런 부리부리한 동백들이

앞발을 번쩍 들고

이만큼 높이에서 피어 있단다

동물원 쇠창살을 찢고

집을 찢고

아버지를 찢고

나뭇가지를 찢고 나와

이렇게

불끈,

 

모두 산경에 나오는 이야기란다

 

----송찬호, [山經가는 길] 전문

 

 

모든 책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기 자신의 유한성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경전을 꿈꾸는 것이듯이, 모든 식물들의 궁극적인 목적 역시도 자기 자신의 유한성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경전은 책의 꽃이며, 동백은 동백나무의 꽃이다. 이러한 경전--꽃들은 최고의 삶의 정점이자 수많은 이성들을 불러 들이는 에로티즘의 장소가 된다. 송찬호의 [山經가는 길]은 아빠와 엄마와 어린 아이가 동물원으로 즐겁고 기쁘게 소풍을 가듯이, 그 경전--꽃을 찾아가고 있는 시이며, 전지적인 관점에서 동화적인 분위기를 탈각시키고 기사도적인 모험 정신과 성자의 영웅주의가 배어 있는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동백은 결코 땅에/ 항복하지 않는 꽃이란다/ 거친 땅을 밟고 다니느라/ 동백의 발바닥은 아주 붉지”라는 시구가 그렇고, “동물원 쇠창살을 찢고/ 집을 찢고/ 아버지를 찢고/ 나뭇가지를 찢고 나와/ 이렇게/ 불끈, 모두 산경에 나오는 이야기란다”라는 시구가 그렇다. 경전은 그 주체자의 앎이 육화되어야만 활짝 피어날 수가 있고, 동백꽃 역시도 그 주체자의 앎이 육화되어야만 활짝 피어날 수가 있다. 앎이 육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진실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진실해야 된다는 것은 어떠한 만고풍상 앞에서도 비겁하게 우회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아름다움은 진실보다도 더욱 더 높은데, 왜냐하면 아름다움 속에는 이미 진실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송찬호는 그의 뛰어난 언어학적 상상력을 통하여 산경과 동백꽃을 일치시키고, 그 경전을 읽는 독서 행위와 꽃구경을 가는 행위를 일치시켜 놓고 있다. 그러니까 경전을 읽는 독서 행위가 꽃구경을 가는 것처럼 즐겁고 기쁘다는 말일 수도 있고, 꽃구경을 가는 행위가 경전을 읽는 것처럼 경건하고 성스럽다는 말일 수도 있다. 송찬호의 [山經가는 길]은 전자의 분위기에서 후자로 이어지며, 진정으로 독서의 행위가 고귀하고 거룩하고 비범한 인간의 향기를 맡는 일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만물이 경전이며 꽃이며 거울인 것이다. 다만, 이처럼 소중한 책들은 “저급한 정신과 빈약한 생명력을 가진 인간들이 읽느냐, 아니면 높은 정신과 힘찬 생명력을 가진 인간들이 읽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지게 되어 있다(8:57). 전자에게 있어서의 경전은 아무런 효용가치도 없는 것이 되고 그림 속의 떡이 될 것이다. 후자에게 있어서의 경전은 목 마른 자가 그토록 찾아 헤매 다니던 오아시스가 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지상낙원으로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샘물도 마시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샘물도 마신다. 우리는 오늘도 ‘세계는 의지의 표상이다’라는 쇼펜하우어의 샘물도 마시고,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샘물도 마신다. 상징주의의 시조인 보들레르의 샘물도 마시고, 토마스 칼라일이 역설한 것처럼,

 

“우리 잉글랜드 가정의 장식품 가운데, 다른 나라에 대해 우리 영국의 명예를 드높일만한 것으로서, 그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 잉글랜드인을 보고 인도와 셰익스피어 둘 중 어느 것을 포기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도를 전혀 갖지 못한 경우와 셰익스피어 같은 인물을 전혀 갖지 못한 경우 둘 중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정말 큰 물음입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공식적인 말로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도야 있든 없든 상관없으나, 셰익스피어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입니다! 어쨌든 인도 제국은 언젠가는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셰익스피어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9:185)

 

라는, 셰익스피어의 샘물도 마신다. ‘위대한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마르크스--엥겔스의 샘물도 마시고, ‘세계는 범죄의 표상이다’라는 반경환의 샘물도 마신다.

 

모든 경전은 기사도적인 모험 정신과 성자의 영웅주의에 빛나는 문화적 영웅들의 소산이며, 지상낙원으로 가는 길목의 샘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오아시스의 샘물에 의해서 모든 생명의 나무들이 자라나고, 이 세상에서 가장 밝고 밝은 빛인 지혜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게 된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얼마나 많은 생명의 나무와 지혜의 열매를 맺게 했는지, 어느 누가 모르겠으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말이 얼마나 많은 생명의 나무와 지혜의 열매를 맺게 했는지, 어느 누가 모르겠는가!

 

또한 상징주의의 시조인 보들레르의 말도, 입체파의 기수인 파블로 피카소의 말도 얼마나 많은 생명의 나무와 지혜의 열매를 맺게 했는지, 어느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눈 있는 사람은 눈을 더 크게 뜨고, 귀 있는 사람은 모든 청각의 문을 활짝 열고 들어보아라! 머나 먼 동방예의지국의 불모의 땅에서 뿌리 깊은 생명의 나무가 마치, 돌연변이처럼 자라나, 백만 촉광의 지혜의 열매들을 주렁주렁 맺게 하고 있으니----, 그 생명의 나무와 지혜의 열매들은 ‘세계는 범죄의 표상이다’라는 낙천주의의 샘물의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모든 샘물의 소유자들은 종족창시자와도 같은 문화적 영웅들이며, 언어 자체의 기원을 소유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호머가 전지전능한 신과 맞서서 과감하게 인문주의를 옹호하고 그 싸움을 벌인 인물이라면, 니체는 최종적으로 ‘신은 죽었다’라고 그 사망증명서를 발급해 준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나는 앎이 육화된 사람으로서 호머의 샘물도 오랫동안 마신 사람이지만, 니체의 샘물도 오랫동안 마신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다.

 

독서의 힘은 위대하다. 독서만이 모든 가교의 역할을 할 수가 있고, 유한한 존재자인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의 교사가 되어 줄 수가 있다.

 

여러 신들 중에서 하나의 신이 ‘신은 하나다’라고 외쳤을 때, 모든 신들이 웃다가 웃다가 죽었다는 것이 니체의 첫번째 설명이고,

 

그의 두번째 설명은 역사 철학적인 문맥에서 다음과 같다고 할 수가 있다.

 

“종교적 잔혹성은 많은 단(段)을 가진 거대한 사다리와도 같다. 그러나 그러한 단 중에서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일찍이 인간은 그의 신에게 인간을, 그것도 바로 가장 사랑하는 자를 제물로 바쳤다. 유사 이전의 모든 종교에서 첫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이에 속하며 로마적인 모든 시대착오 가운데서도 가장 음산한 것으로 티베리우스황제가 카프리 섬의 미트라스 동굴에 바친 제물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뒤 인류의 도덕적 시대에 이르러서 인간은 그의 신에게 자신의 가장 강한 본능들을, 자신의 ‘본성’을 바쳤다. 이러한 희생의 기쁨은 금욕주의자이자 ‘반 자연주의적’ 광신자의 잔혹한 눈에 생기를 더해 주었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제물로 바칠 무엇이 남았던가? 마침내 인간은 한 때 위안이 되어주고 상처를 치유해 주고 신성한 것이었던 모든 것, 숨겨진 조화와 미래의 행복과 정의에 대한 모든 믿음과 희망을 희생해야만 되지 않았던가?

 

인간은 신 자체도 희생시키고 스스로에 대한 학대로서 돌, 중력, 어리석음, 운명, 무(無)를 위해 신을 희생한다는 식의, 잔인성의 최종 단계의 역설적 미스테리가 다가올 세대를 위해 남겨졌다. 우리 모두는 이미 그것에 관해 다소는 알고 있다”(8:79).

 

여러 신들은 힌두교와 그리스 로마의 신들을 말하고----소위 이교도의 신들을 말하고----, 하나의 신은 기독교적인 유일 신을 말한다. 여러 사람들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 ‘자기만이 인간이고 모두가 짐승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처럼 어처구니 없는 일도 없듯이, 신은 하나다라는 말은 그만큼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유발시켰는지도 모른다. 그 어처구니 없는 웃음 속에는 그만큼 니체의 냉소와 분노가 담겨 있는 것이고, 니체는 그것을 더 이상 묵과하지 못하고 신의 사망증명서를 발급해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기독교는 가장 야만적이고 잔인한 유일신의 종교이며, 모든 생명 부정에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기독교는 하나의 우화이며 파렴치한 양심의 최종적인 형태이다. 오늘날은 기독교 역시도 인간 제물이나 번제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종교의 기원으로부터 무신론의 기원에로의 이행은 여러 단계를 지닌 “거대한 사다리”와도 같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첫번째는 일찍이 신 앞에서 첫 아이를 바친 것이고, 두번째는 인류의 모든 욕망을 바친 것이며,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우리 인간들 앞에 전지 전능하신 신을 제물로 바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지 전능하신 신께 첫 아이를 바친다는 것은 다산과 우리 인간들의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기원했다는 것을 말하고, 최근에도 잉카제국의 인간 제물이 발견되었듯이,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이고도 공통적인 의식이었음을 말한다.

 

인간 제물이 첫 아이로부터 파르마코프 같은 사회적 천민이나 소나 돼지나 양으로 대체된 과정을 거쳐서, 우리 인간들의 가장 소중한 본능인 모든 욕망들을 바치는 단계로 변모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변모의 동기는 무자비한 살생의 야만성을 완화시키기 위해서였겠지만, 어쨌든 금욕주의는 기독교와 불교의 정수(精髓)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금욕주의는 따라서 성직자와 학자나 예술가에게 최고의 영적 상태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수단이 되고, 또한 최고의 권력을 전취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주기도 했다. 모든 잡념과 잡음을 일소하고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맑은 정신으로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정진한다는 것, 그것이 목표(人神--열반--득도)----에 이르는 최고의 방법이며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에는 의식주의 문제와 외부의 적이나 여러 장애물들 이외에도 자기 자신의 욕망과의 싸움이라는 어려움이 뒤따른다. 임전무퇴, 초지일관, 험한 파도와 숱한 벼랑길을 오르내릴 수 있는 용기와 건강한 체력, 그리고 상대방의 전략과 전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백만 촉광의 지혜가 요구되기도 하고, 입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사치와 쾌락과 성적 합일, 아내와 자식에 대한 무관심 등, 모든 욕망과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인내가 요구되기도 한다.

 

참음은 어제를 생각하게 하고

어제의 얼음을 생각하게 하고

새로 확장된 서울특별시 동남단 논두렁에

어는 막막한 얼음을 생각하게 하고

그리로 전근을 한 국민학교 선생을 생각하게 하고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주막거리에서 쉬는 十분동안의

지루한 정차를 생각하게 하고

그 주막거리의 이름이 말죽거리라는 것까지도

무료하게 생각하게 하고

 

奇蹟을 기적으로 울리게 한다

죽은 기적을 산 기적으로 울리게 한다

 

----김수영, [참음은] 전문

 

 

금욕주의는 “어제를 생각하게 하고/ 어제의 얼음을 생각하게 하고/ 새로 확장된 서울특별시 동남단 논두렁에/ 어는 막막한 얼음을 생각하게 하고/ 그리로 전근을 한 국민학교 선생을 생각하게 하고/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주막거리에서 쉬는 十분동안의/ 지루한 정차를 생각하게 하고/ 그 주막거리의 이름이 말죽거리라는 것까지도/ 무료하게 생각하게 하고// 奇蹟을 기적으로 울리게 한다/ 죽은 기적을 산 기적으로 울리게 한다”. 이러한 금욕주의는 만사형통의 신의 손가락이며, 모든 종교의 의식 가운데서도 최고의 걸작품에 해당된다.

 

최고의 영적 상태도 죽은 기적을 산 기적으로 울리는 일에 해당되고, 절대 권력자의 위치도 죽은 기적을 산 기적으로 울리게 하는 일에 해당된다. 최고의 영적 상태나 최고의 권력이 아무렇게나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여성의 각선미도, 큰 스님의 득도의 법열도 마찬가지이고, 투병하는 환자의 싸움이나 부모나 조상, 사회적 윤리, 그리고 신 앞에서의 종교적 의식조차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금욕주의는 궁극적으로 욕망과의 단절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더 큰 욕망을 얻고자 하는 데, 그 싸움의 치명적인 한계가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능숙한 사냥꾼은 사냥감을 쫓아서 이리저리 쫓아다니지 않고, 그 길목을 지키고 서서 오래 오래 참고 기다린다.

 

바로 이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그 모든 것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고, 금욕주의자에게는 최고의 영광과 찬사가 바쳐지게 된다. 봉건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되던 시기에, 이러한 금욕주의의 틈새를 비집고 새로운 단계, 아니, 최종적인 단계의 신앙이 그 최초의 싹을 드러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 루소의 사회계약론, 신앙내면화 운동, 프랑스의 시민 혁명,

 

신은 날마다 자기 ‘세라핀'쪽으로 파도처럼

밀려오는 詛呪를 대체 어떡하는 건가?

酒池肉林에 포만한 暴君마냥 우리들의

모독의 소리를 기분좋게 들으며 잠자고 있군

 

라는, 보들레르의 [聖베드로의 否認], 언제나 신앙 때문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 때문에 불평과 불만을 일삼았던 해방된 노예 계급들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해방된 노예들이 오늘날의 부르조아지들이며, 그들은 그들의 출신성분만큼이나 사악하고도 비천하게 모든 욕망의 사슬들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오늘날은 청빈, 겸손, 정숙이라는 금욕주의의 미덕이 사라져 버린지도 오래되었고, 죽은 기적을 살아 울리게 하려는 모든 영웅적인 행위들도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지도 오래되었다.

 

모든 것이 더 많이, 더 빨리, 더욱 더 탐욕스럽게 소비를 하는 욕망의 세태 풍조 속에 빨려 들어가게 되었고, 더 많이, 더 빨리, 더욱 더 요염하게 자극적으로 알몸을 노출시키는 쾌락의 세태 풍조 속에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모든 지식인들이 신의 사망증명서를 발급해준 인간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린지도 오래되었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새로운 종의 탄생을 선언해 버린지도 오래되었다.

 

20101116-202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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