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겨울 오프닝 외 3편

미송 2010. 12. 1. 22:43

 

겨울 오프닝 / 오정자 

 

창문 두드리는 바람은
달리는 기적소리를 닮았다
불빛 발그레한 오두막  
휘파람도 없이  
휘청 푸른 새벽 몸을 일으키고  
해바라기 씨앗같이 태양이
구멍 난 양말같이 별빛이
까맣게 키운 당신 속눈썹이
꼼지락 거리던 12월
가난은 나의 동력 나의 나침판이었다
스치나 싶게 떠나는 것이 바람인 줄 알아
아버지의 교훈을 명심했고
울지 않고도 작별을 고했다
바람은 바람 그러나 어느 해
예고도 없이 나 자빠졌을 때
보물 상자 침대 위  
상처 입히지 않을 그림자 하나
와락 끌어안던 여덟 시간
바람을 휘감던 팔
겨울은 하얗게 살 오른 팔뚝을
툭 툭 튀어 올라 그렇게
바람의 목덜미를 잡아채곤 하였다.

 

 

죽은 시인의 청탁

시마(詩魔)도 떠나 오지 않고
속에서 일어나야 할 영감도 깨지 않는 언제
겨울에도 꽃대 꺾어 꽃잎을 물고
익숙한 입맞춤에 일어나는 나는
삭발한 머리 위 빨긋한 노을이 뜬
주름살 깊은 이마와
안경 너머 눈빛이 나무인
너에게 나를 보인다
붕 뜬 관념이다
넌 언제나 나를 지적하지
대부분의 사람들
습관에 젖어 산다고
깨어나라고 하는 너
너도 프랜시스 잠의 목소리가 그리우니
재방송에도 지치지 않는
원스어게인원스어게인
회색 안개들은
제 안에 제 길을 직관치 못해
쓰고 있을 뿐, 공중에 올라
네 것이니 네가 다 가져
관념의 눈으로만 더듬거리네 부앙
그만 좀 더듬으세요
음모와 술수는 없더라도
박박 긁는 손톱이 아무리 결벽해도
그것 역시 불필요한 것
불빛은 자꾸만 가뭇해져 방을 다 닦는 동안
시체로만 돌아다닌 시간의 동공,
쇼파에 기댄 단 오 분의 직관 속에서만
살았다는 톨스토이여
꽃잎 주검들 속으로
오소소오소소.

 

 

시(詩)와 시(時)의 무계약
-도서관에서

시간도 사라진다 너와의 약속과 함께
심장 혹은, 머리 어딘가에 붙어 다녔을 너와 아니
나와 지하 1층으로 내려간다
샛길 불빛 아래 책들이 모여 있다  
쇼파에 앉은 나도 먼 여행을 떠난다
안개 낀 오늘이나 시계가 보이지 않고 멈추고
그럼 이젠 짐승 같은 시장끼도 사라지겠네요 즐겁게      
자문을 하려는데 바스락 빵 봉지가 움직인다 잼이나
버터에 빵을 찍어 먹으면 왜 나는 꼭 비빔국수가
떠오를까 왜,

멋진 약속까지 깨뜨리고 종아리 곧은 사람을
플라스틱 지붕 아래 온종일 기다리게 두고 호올로
시를 썼다는 K*를 읽는다 웃으며
맛이 사라질 때까지 빵을 뜯는다
급기야 너구리라면까지 휙휙 지나가는
다섯 시와 여섯 시 사이 야수의 저녁
쉽게 발효되지 않는다 너는 그렇게
거식과 포식 사이 헛헛한 빵으로 육화되면서
지상의 시간도 사라진다
너와의 약속은 어디로 가고 있나.

* 김현승의 '시의 맛' 한 구절.


 

 

난독증

가진 것 없이 늙기만 한 것 보다
가진 것 없이 젊기만 한 것이
더 슬프다
가진 것 없이 젊기만 한 너와
가진 것 없이 늙기만 한 내가
서로 모른 채 앉아 우동 국물을 먹는 밤은
야참 따끈한 겨울이다 그러나
겨울은 춥고 배고픈 인생인 듯
겨울은 쓰잘데기 없이 친절한 사람인 듯
부모 없는 너희는 누구의 품을 노래 부르나
먹지 않아도 될 김밥을 하나 더 구겨 넣으며
우동 국물 바닥을 내려다보며
이젠 내 눈에 물기를 모으려는데
벽에 걸린 액자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소리 내어 읽으려는데
글자들이 뿌옇게 춤을 춘다
네 시작은 마약하였으니 나중은 침대하리라
이명 같은 내 오랜 지병
난독증이 되살아나
나는 또 한 번 울었다.

* 저녁 어스름에 김승일의 시<부담>을 읽었다.

  위의 시는 먹먹한 가슴의 토사물 한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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