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오프닝 / 오정자
창문 두드리는 바람은
죽은 시인의 청탁 |
시(詩)와 시(時)의 무계약
-도서관에서
시간도 사라진다 너와의 약속과 함께
심장 혹은, 머리 어딘가에 붙어 다녔을 너와 아니
나와 지하 1층으로 내려간다
샛길 불빛 아래 책들이 모여 있다
쇼파에 앉은 나도 먼 여행을 떠난다
안개 낀 오늘이나 시계가 보이지 않고 멈추고
그럼 이젠 짐승 같은 시장끼도 사라지겠네요 즐겁게
자문을 하려는데 바스락 빵 봉지가 움직인다 잼이나
버터에 빵을 찍어 먹으면 왜 나는 꼭 비빔국수가
떠오를까 왜,
멋진 약속까지 깨뜨리고 종아리 곧은 사람을
플라스틱 지붕 아래 온종일 기다리게 두고 호올로
시를 썼다는 K*를 읽는다 웃으며
맛이 사라질 때까지 빵을 뜯는다
급기야 너구리라면까지 휙휙 지나가는
다섯 시와 여섯 시 사이 야수의 저녁
쉽게 발효되지 않는다 너는 그렇게
거식과 포식 사이 헛헛한 빵으로 육화되면서
지상의 시간도 사라진다
너와의 약속은 어디로 가고 있나.
* 김현승의 '시의 맛' 한 구절.
난독증
가진 것 없이 늙기만 한 것 보다
가진 것 없이 젊기만 한 것이
더 슬프다
가진 것 없이 젊기만 한 너와
가진 것 없이 늙기만 한 내가
서로 모른 채 앉아 우동 국물을 먹는 밤은
야참 따끈한 겨울이다 그러나
겨울은 춥고 배고픈 인생인 듯
겨울은 쓰잘데기 없이 친절한 사람인 듯
부모 없는 너희는 누구의 품을 노래 부르나
먹지 않아도 될 김밥을 하나 더 구겨 넣으며
우동 국물 바닥을 내려다보며
이젠 내 눈에 물기를 모으려는데
벽에 걸린 액자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소리 내어 읽으려는데
글자들이 뿌옇게 춤을 춘다
네 시작은 마약하였으니 나중은 침대하리라
이명 같은 내 오랜 지병
난독증이 되살아나
나는 또 한 번 울었다.
* 저녁 어스름에 김승일의 시<부담>을 읽었다.
위의 시는 먹먹한 가슴의 토사물 한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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