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꿈속에 나는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를 읽다
그러니까 살아있다면 백 열 살이 되겠네요. 그를 만나고 싶다면 그의 소설집이나 강의록을 들춰보세요. 1899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영국인 할머니 밑에서 영어와 스페인어의 이중 모국어 교육을 받은 그는, 도서관의 작가라는 별명답게 아버지의 도서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작가가 되었지요. 죽어서 도서관에 묻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사람입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눈 먼 도서관장 호르헤가 바로 보르헤스를 모델로 창조한 인물입니다. 1960년대 이후 과도한 독서와 유전병으로 인해 실명하고 말았지만 그러한 상태에서도 전 세계를 여행하며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사람이지요. 그의 학창시절을 보냈던 스위스 제네바에서 1986년 운명하여 그곳에 묻혔습니다. 백년이란 숫자에서 문득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간의 고독이 떠올랐어요. 백 년이란, 전설 한 편 쓰기에 충분한 시간 입니다.
보르헤스를 만난 2008년 겨울, 저는 삶 곳곳에 질병처럼 박힌 사고방식에 지리멸렬해 하고 있었습니다. 환상이나 새로운 꿈을 가지려는 의도는 별로 없었어요. 세상에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는 걸 확연히 깨닫고 있을 때였으니까요. 손에 잡히는 현실적인 것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그저 갑갑한 마음에 책장만 뒤적거렸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말한 사람들처럼. 암청색 바다 위로 눈발이 성성히 날리던 겨울에 저는 보르헤스를 만났습니다. 흘러가는 강물 / 두 번 담글 수 없는 / 두 번 머물 수 없는 / 시간의 냄새 / 가련한 얼굴이 거울을 봅니다 / 거울 밖 허상인 나/ 달빛 미로 속 어떤 이가 말합니다 / 너는 연민 덩어리 검은 잎 보이지 않는 나무야 / 그러니 멜로디보다 짧은 당신도 두 번 볼 순 없겠지요 / 차창에 스치는 전봇대와 들꽃들/ 모두가 환상이라고/ 저는 끄적거렸습니다.
꿈과 현실이 뒤범벅이 된 그 해 겨울 보르헤스의 소설과 그의 전기를 읽으면서 상처를 봉합하려고 저는 시를 썼어요. 어디까지가 꿈인지 실제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때 읽었던 보르헤스의 메시지는 환상이자 곧 현실이었습니다. 모든 학문과 종교를 섭렵하며 자신의 구원을 찾은 보르헤스는 노년에 이르러 불교사상에서 모든 결론을 얻었다고 합니다. 붓다의 성불 장면에서 모티브를 따온 소설 <알렙과 화염경>을 통해서 저도 그의 불교를 배웠지요. 오, 사고하거나 느끼는 것에서 오는 기쁨보다 / 더 거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기쁨 / 나는 우주와 우주의 심오한 구성 방식들을 보았다 <알렙 pp. 169-170>
보르헤스는 소설 주인공이 바퀴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바퀴(輪)는 붓다가 說한 진리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흔히 설법했다를 법의 바퀴를 굴렸다(轉法輪)라고 표현합니다. 부처가 깨달은 우주의 실상을 나타내는 연기법緣起法 즉 인과응보의 윤회이며 우주의 심오한 구성방식을 보았다는 것이죠. 40년간 기독교의 이분법적 사고- 천당과 지옥, 선과 악, 천사와 악마, 주체와 객체 등- 속에서 살아온 제게 위와 같은 표현은 참으로 애매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통합적이고 유연한 사고에 결론적으로 긍정을 했습니다. 보르헤스는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공적인 자신의 모습과 내밀하고 개인적인 자신의 모습을 구분하여 두 분신 사이의 관계와 갈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말하길 인간이란 동시에 연극의 배우이며 연출가이며 관객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본질적으로는 우리 생의 배우가 아니라 관객이라는 논리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인도 육파철학의 하나인 산키아 학자들은 아름다운 비유를 들었습니다. 무용이나 연극 공연을 보러 가면 우리들은 흔히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하지요. 우리들이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한 사람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또 그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컨디션을 함께 합니다. 이 친밀한 동거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곧 그 사람이라고 믿는 환상을 불러일으키지요.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와 유사하게 자신의 자서전 제목을 '그의 생의 목격자가 이야기하는 빅토르 위고' 라고 지었습니다. 우리가 동시에 배우이며 관객이라는 생각은 보르헤스로 하여금 서구 근대철학의 핵심 주제인 '근대적 주체' 에 대하여 회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저 역시 20대 때 동양철학이 아니라 서양철학-비록 수박겉핥기였지만-을 배운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습니다. 보르헤스는 이 문제를 논의 하면서 13세기 페르시아의 범신론자 할랄 우딘 루미의 말, <나는 그물을 던지는 자요 낚이는 고기이다> 쇼펜하우어의 말 <고문하는 자와 고문 받는 자는 동일인이다>을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보들레르의 말 <나는 때리는 손이며 맞는 뺨이다>도 인용합니다. 결국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가해자로서의 주체가 피해자인 객체로서의 자연 환경을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 기고만장한 '근대적 주체' 에 대한 준엄한 경고문을 읽는 순간 갑갑했던 제 가슴이 뻥 뚫렸습니다.
세계는 무지와 환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모두 본질의 겉면에 불과할 뿐이라고 상카라(8세기 베단타 철학자)는 말했어요. 열과 빛이 불의 속성인 것처럼, 마야(幻影)는 신의 속성일 뿐, 신의 정확한 모습을 파악한다면 환상 따위는 믿지 않을 것이라고. 우주는 거대한 환영이며 육체, 자아, 창조주로서의 신의 개념은 그 환영의 부분적인 모습일 뿐이라는 말. 당신은 지금 무엇으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나요. 그 괴로움의 주체와 객체가 따로 존재하기나 한가요. 통쾌한 자유를 한 번 느껴 보세요.
2009년 여름 어느 아침에 저는 40년 전 케임브리지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다름 아닌 보르헤스의 경험이었죠. 서론 부분에서 그는 사건에 대해 비밀로 해 두려던 것이라고 속삭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고 그가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소설 작품으로 읽을 것이고 언젠가는 그 역시 그렇게 느낄 수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약간 능청스러움도 느껴졌지만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그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게 분명해 보였어요.
1969년 2월 아침 10시경 그는 찰스 강이 바라다 보이는 한 벤치에 앉아 있었어요. 그의 오른쪽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이름 모르는 높은 빌딩 하나가 서 있었고 얼음덩어리들이 회색빛 강물 위에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필연적으로 그 강은 그로 하여금 시간-헤라클레이토스의 천년 주기-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지요. 그는 간밤에 잠을 잘 잤기 때문에 오전 강의에 참석할 학생들을 흥미롭게 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업에는 한 명의 학생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 순간 갑자기 그는 과거 어느 순간 그와 똑같은 상황을 경험했던 것 같은 느낌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하면 탈진상태와 일치하는) 받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의자의 다른 쪽 끝에 앉았고 그는 혼자 있고 싶었지만 무례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즉시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어요. 그 낯선 사람은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지요. 그것이 바로 그날 아침에 일어났던 수많은 기이한 일 중 첫 번째 것이었습니다. 그가 휘파람으로 불었던 것, 혹은 휘파람으로 불려고 했던 노래는 엘리아스 레굴레스의 오래된 밀롱가 민요 '폐허'의 곡조였습니다. 그 멜로디는 이미 오래 전에 없어져버린 한 정원과 아주 여러 해 전에 죽은 사촌 알바로 멜리안 라피누르에 대한 기억으로 그를 이끌었지요. 그러자 가사가 들려왔어요. 그것은 노래 도입부였어요. 그 목소리는 알바로의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그 사람에게 몸을 돌리며 물었어요. "선생, 선생은 우루과이 분이오, 아르헨티나 분이오?" "아르헨티나입니다. 하지만 1914년부터 제네바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가 대답했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어요. 그가 다시 그에게 물었어요. "러시아 정교 교회 맞은편 말라뉴 가 17번지?" 그가 그렇다고 대답했지요.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어요. "그렇다면, 당신의 이름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나 또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금은 1969년이고, 우린 케임블지 시에 있는데요." "아니오." 그가 약간 넋 나간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말을 이어갔습니다. "저는 여기 제네바, 로달노 거리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벤치에 있어요. “ 맞은편의 그가 다시 말했어요. “기묘한 일은 우리가 서로 닮았다는 거군요. 하긴 머리가 희끗희끗한 것을 보니 당신이 나이가 더 많겠지만요." 여기까지가 보르헤스 소설<타인 The Other>의 앞부분입니다.
그 만남은 진실이었다. 그는 꿈속에서 만난 나를 쉽사리 잊어버릴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그 만남이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것은 명확하지 않은 꿈이었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데, 그가 꿈꾸었던 것은 달러 지폐에 찍혔던 불가능한 날짜였던 것이다(참고로 보르헤스의 초상이 그려진 지폐가 있다는 것을 그의 전기에서 읽은 적이 있다),가 그의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당신이 만약 서양철학에만 익숙해져 있다면 위와 같은 보르헤스의 이야길랑 내팽개치고 줄행랑을 칠지도 모릅니다. 꿈속을 걸어 나온 그와 꿈 밖에 앉았던 내가 하나의 꿈 이야기에 등장하고 또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 진다니. 보르헤스가 혹시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서 치명적인 충격을 받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의 소설이나 강의 곳곳을 들여다보면 이와 같은 꿈, 환상이면서도 리얼리즘에 가까운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현실 이야기를 꿈으로 치환시켜 착각 하다보면 그와 그의 작품들이 좀 더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해를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살아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기적은 꿈같은 일이지요. 살아있다는 것이 곧 꿈이요 기적이요 사건이라면, 삶과 꿈이 하나의 관계로 엮어진 느낌입니다. 자다가 웬 봉창(封窓)두드리는 소리냐고요. 보르헤스의<타인-The Other>을 열어 본 아침이 제겐 아직도 꿈속이랍니다.
ⓒ2009 여름,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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