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머나먼 / 진은영
홍대 앞보다 마레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월간 『현대문학』 2010년 9월호 발표
1970년 대전에서 출생.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 2000년 계간 《문학과사회》 봄호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과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가 있음.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혜영<이인용 자전거> (0) | 2011.01.11 |
---|---|
윤관영<산 말은 코 평수(坪數)를 넓힌다> (0) | 2011.01.11 |
박종인<발칙한 원조교제> (0) | 2011.01.10 |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0) | 2011.01.09 |
김소연<다행한 일들>외 4편 (0) | 2011.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