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진은영<그 머나먼>

미송 2011. 1. 10. 13:28

  그 머나먼 / 진은영

 

  홍대 앞보다 마레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월간 『현대문학』 2010년 9월호 발표  

 

1970년 대전에서 출생.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  2000년 계간 《문학과사회》 봄호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과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