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스의 눈
-시인의 의무와 역할
1. 나는 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1990년대 들어 꾸준한 관심을 불러모은 주제 가운데 하나인 '근대성'이란 개념에 작은 질문 하나를 덧붙여보는 것으로 이 글을 띄우고자 한다. 근대성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간의 오관(五官)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시각을 손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근대를 추동해온 과학적 합리성의 약진은 시각의 발달과 맞물려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망원경과 현미경을 통해 대우주와 소우주의 비밀을 하나하나 벗겨갔으며, 학문적 사유논리의 준거가 되는 분류와 명명, 차이와 증명은 시각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표어는 거스르기 어려운 근대성의 화두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근대성의 절대적 성역인 이성과 계몽의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브레히트의 유명한 희곡<갈릴레이의 생애>에 나오는 아래의 대사 한토막은 이에 대한 좋은 실례를 제공해준다.
갈릴레오: 우리가 어떤 것을 아마도 그럴 거야하고 여기지만, 이런 개연성은 사실을 포착하지 못한 것을 말한단다. 저 아래 광주리 가게 앞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펠레체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으리라는 것, 반대로 펠레체가 아이에게서 젖을 받아먹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직접 가서 눈으로 증명할 수 없는 한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단다. 별들에 대해서 우리는 아주 조금밖에 못 보는 흐릿한 눈을 가진 벌레들과 같단다.
엄마가 아이를 품어안고 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구나' 라고 상정하는 것은 하나의 가설이자 편견에 불과하다. "아마도 그럴 거야" 라는 "개연성은 사실을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단지 이성적 주체의 눈을 통해 증명된 것만이 과학적 사실로 인정될 수 있다면 자연과학자 갈릴레오의 신념에 찬 전언을 들을 수 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서양의 미술과 건축은 원근법과 균형에 의한 시각의 조화로운 통일을 목표로 하였으며, 영상을 매개로 하는 현대 소비사회에서 시각은 대량소비를 부추키는 광고와 영화, 그리고 컴퓨터의 과녁이 되고 있음은 주지 사실이다.
그러나 시각은 근대성의 전방위에 선 '첨병'인 동시에 근대성의 과부하와 그 반동으로 밀려난 '낙오병'이기도 하다. 일견, 근대성의 사회학적 시험 모델인 자본주의에서 시각은 다른 감각들을 지휘하며 우월성을 과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각이야말로 문명의 이기에 경도된 채, 가장 강력하게 유린당하고 있는 감각 중의 하나이다. 각종 지면에 미만해 있는 고정된 씨니피에를 갖지 않은 씨니피앙들의 사육제, 원본 없는 복제물들의 혼성모방이 걸어오는 씨뮬레이션의 최면술, 거리를 현란한 잡색으로 표백하는 상품 광고들의 난삽한 활보, 공중파를 통한 텔레비젼 영상의 무차별한 폭격, 24시간 게임방의 모니터에서 펼쳐지는 싸이버스페이스의 무절제한 파노라마....
이 북적거리는 가짜 이미지 속에서 어느 한곳, 편안하게 눈 둘 곳이 없다.
나의 눈이 가는 길, 서울에선 없다, 서울이 수시로 내 눈을 끌어당길 뿐이다. 광고의 아우성과 매체의 잡음 속에서 광고의 잡음과 매체의 아우성으로 나온다, 저, 아니, 이 길뿐, 빈틈은 없다, 내 시야와 시력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러하니
내 눈이 보고 싶던 것이 무엇인지,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잠 안쪽에서도 두 눈 뜨고 있어야 하느니
내 눈이 먼저 가닿아 내가 불려가는 길, 사라졌다, 시선이 떠나가 돌아오질 않는다, 서울은 캄캄할 만큼 현란하고 현기증으로 증발할 만큼 무섭게 돌아간다, 즐겁다고, 쫓아가고 싶다고, 누릴 수 있다고,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안구 패어나가 나는 말할 뻔하다, 뻥 뚫려 허당인 내 두 눈구멍 속으로 서울은 24시간 형광을 불 밝혀놓는다. (...)
- 이문재 <타워 크레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부분
이 시에서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사유하는 근대적 주체로서 인간의 선험적 정초였던 데까르뜨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이제 유효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대신에 "뻥 뚫려 허당인" 눈으로 '나는 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모토가 된 사회, 이것이 작금의 우리가 살고 있는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니까 현대인의 눈은 대상의 실체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오히려 눈은 대상을 붕괴시키고, 대상으로 반사된 빛을 거꾸로 보는 자를 위험 속에 몰아넣는다. 시인의 말대로 "내 시야와 시력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다." 가치의 중심이 무너진 정신의 공동화 현상에 의한 시력의 탕진, 그로 인한 시선의 몰가치, 무방향, 무반성적 방랑이 세기말 우리가 앓고 있는 치유하기 힘든 문화적 정신적 중병(重病)이다.
2. 풍향계와 풍경(風警)
시력의 약화는 1990년대 우리 문학의 시적 진정성을 훼손시키고 시의 위기라는 흉흉한 풍문을 배후에서 조성한 결정적인 숙주이기도 하다. 1990년대 들면서 시의 위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1980년대와 비견해 1990년대에는 시의 위의(威義)와 시인의 위상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고 볼멘소리도 들리고, 도서문화에서 영상문화로, 문자에서 비트로, 텍스트 '읽기' 에서 이미지 '보기'로 변환, 이월되는 세로운 세기에도 과연 시가 씌어지고 읽힐 수 있을 것인가라는 비관적인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무엇보다 1990년대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죽음과 허무, 분열과 해체, 광기와 환멸, 권태와 일상, 여성과 생태, 키치(kitsch) 와 욕망 따위의 열쇠어로 요약할 수 있는 혼란스런 새로운 징후들의 창궐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그러한 변화된 당대적 현실에 대한 포괄적인 인식과 치열한 시적 응전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시대의 변환에는 늘 위기의식이 불어오는 법이고, 새로운 문화의 패러다임은 응당 전위적이고 다양한 시적 상상력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변화 그 자체, 혹은 변화된 현실의 다양한 면모에 대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명철한 인식의 눈이다. 김상환의 간결하고 적절한 표현처럼 "시의 가능성은 시(視)의 가능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시력(視力)'의 부재는 '시력(詩力)'의 부재와 직결될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990년대의 시정신에 밀어닥친 위기의 본질은 "현실에 대한 구조적 이해가 부족하고 삶의 체제에 대한 문학적 자리놓음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함으로써" 촉발되는 현실관통력의 결핍에서 찾고 있는 이윤택의 발언과 "미세하게 분화된 거대한 세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현실이 급변하는 데 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려는 인식 자체를 완강하게 부정하는" 인식의 극단적인 허무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단하고 있는 이영진의 전망은 모두 이런 맥락에 놓여 있다 하겠다. 이처럼 1990년대 시가 맞대면한 위기와 불안의 징후가 무엇보다고 시력의 약화에서 유발되는 '시적 현실'의 구축 실패에서 기인된 것이라면, 우리 시의 건강성을 회복할 수 있는 불씨도 시인의 '눈'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서 찾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의도에서 이 글은 '시인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왜 보는가'라는 물음에 성실히 응답하고 있는 세 편의 시를 눈여겨봄으로써, '부박한 이 시대에 요구되는 시인의 눈이란 진정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마련한 자리이다. 그러면 앞으로 다루게 될 세 편의 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주목하는가? 풍향계 혹은 풍경이다. 그러면 시인들은 각각 그것을 '어디서 어떻게 왜' 보려 하는가?
1) 전진 없는 공전(空轉)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화살이 있다. 교회의 탑 위에서, 건물의 옥탑에서 바람의 결대로 헤엄치는 끝이 뾰족한 함석판.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바람의 길을 친절하게 가리켜주는 양철손가락. 바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그때그때 포착하는 순발력과 변덕스러운 바람의 외출을 불평 없이 대변해주는 너그러운 수용력을 자신의 미덕으로 삼는 화살표. 이것이 바로 풍향계이다. 말 그대로 풍향계는 바람의 방향을 표시해주는 계측기이다. 바람이 부는 한, 풍향계의 화살표는 한곳에 정지하기 위해 끝없이 움직인다. 그러므로 미세한 바람의 움직임에도 자기 몸을 떨어야 하는 풍향계는 움직임을 그 생명으로 한다. 돌아가지 않은 자, 더 이상 풍향계가 아니다. 하지만 정작 움직임에 예민한 촉수를 가진 풍향계는 자력으로 한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비유하자면 상반신이 아닌 하반신 불구자다. 타자의 길을 손으로 알려줄 수는 있지만, 정작 자신은 한걸음도 이동할 수 없는 서글픈 운명. 이것이 바로 풍향계의 존재론적 비애다. 움직임 속의 정지, 혹은 정지 속의 움직임이 바로 풍향계의 천형인 것이다.
이러한 풍향계의 존재론적 슬픔에 천착한 시가 독일 시인 페터 빌의 <풍향계>이다.
우리 풍향계들은
양철손가락을 달고
재빨리 몸을 돌린다
순풍을 타고
색깔을 바꾸면서
삐꺽 삐꺽 쇳소리를 낸다
어떤 바람도 우리를 내밀지 못한다
이 자리에 녹슨 채 그대로 있다
간결주의 미학이 돋보이는, 쉽게 읽히되 정갈한 소품이다. 그러나 이 짧은 8행과 행간 사이의 여백에 내포된 의미의 장력은 심상치 않아 보인다. 1942년생인 패터 빌은 구동독 출신의 시인이며 이 시는 1983년에 씌어졌다. 그렇다고 "순풍을 타고/ 색깔을 바꾸면서" 돌아가는 풍향계는 당시 그가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체제순응적인 지식인의 나약함에 대한 풍자인가? 불어오는 바람결대로, 시대의 유행대로, 그때그때 낯빛을 달리하는 줏대 없는 서독 정치인에 대한 맹렬한 비난인가? 아니면 "삐꺽 삐꺽 쇳소리를"내며 돌아가는 풍향계는 진정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실현 불가능성에 대한 자기비판의 대응물인가?
혹은 "녹슨 채"라는 시구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이 풍향계는 점점 속이 곪아가는 사회주의 체제의 상호공존의 윤리학으로 적당히 덮어버리는 썩 훌륭해 보이는 절충주의의 반어적 표현인가? 혹은 아도르노가 진단했듯이 자본주의 문화산업에 맹목적으로 타협하는 순응주의적 예술가들의 단순성에 대한 표징인가?
이처럼 이 시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 여러 겹의 해석이 가능하다. 좋은 시가 항용 그러하듯이, 이 시 또한 시인의 전언을 생략하고 암시만으로 그 나머지 이야기의 완성을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시인에 의해 은닉되고 변화된 텍스트를 찾아내어 풍요로운 담론 창출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페터 빌의<풍량계들>은, 시는 생략함으로써 독자를 유혹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 예라 하겠다. 그리고 이런 생략을 통해 개진되는 해석의 다각적인 확산은 다시 하나의 발진지로 모아질 수 있다. 이 시의 복합적인 의미층위를 관통하는 뼈대는 하나이다. "어떤 바람도 우리를 내밀지 못한다."는 전진 없는 공전! 누구나 풍향계의 거죽은 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풍향계의 골수를 취할 만큼 심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그 배후가 궁금하다
꼬리 지느러미가 푸르르 떨린다
그가 열심히 헤엄쳐가는 쪽으로 지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 꼬리 뒤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사라져가는,
초고속 後爆風의 뒤통수가 보인다
- 이덕규의 <풍향계>
"지느러미"와 "헤엄"이란 시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은 풍향계를 허공을 유영하는 물고기에 비유한다. 바람을 맞아들이는 꼬리판과 바람을 내보내는 뾰족한 머리 모양의 풍향계는 물고기와 그 형태나 속성에 있어서 새로운 전이의 계약을 맺을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은 "그가 열심히 헤엄쳐가는 쪽으로 지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머리의 앞을 주목하지 않는다. 반대로 "푸르르" 떨리는 "꼬리 지느러미"에 시선이 가 닿아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꼬리 뒤쪽에 바람의 동인인 "초고속 후폭풍"이 있음을 깨닫는다. 후폭풍! 그것은 끔찍한 핵폭발 이후 몰아치는 짝패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하는 표지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핵폭발의 후폭풍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란 무엇인가? 단순화 시켜 말하자면 언제, 돌발할지 모르는 세계 혹은 우주의 파멸에 직면해 "푸르르" 떨고 있는 가냘픈 생명체인가? 새로운 밀레니엄을 종말론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 비관론자의 애처러운 몸부림인가?
혹은 근대화의 뒤안길에 버려진 사각지대이자 미래에 혹사당한 과거의 그늘인가? 지난 시대의 갈등과 고통, 시련과 고뇌를 증발시킴으로써 과거의 시간대를 슬그머니 잡아빼는 천박한 낙관주의에 대한 준열한 질타인가? 아니면 다매체 영상문화라는 시대적 기치 아래 줄달음질치는 오늘날의 미래편식증에 슬그머니 빗장을 걸려는 한 시인(문자문화의 기수)의 항변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환란을 초래한 IMF체제하의 구제 금융시대니, 이와 봉합되어 증폭된 정리해고니, 실업문제니 하는 사회적 불안 속에 중심을 잃고 퍼덕이는 우리들의 자화상인가?
답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 하나도 되고 모두 다일 수도 있다. 시가 하나의 정답만을 산출하는 일차방정식이라면, 반대로 어떤 답도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유종호의 지적대로 "쉬운 시와 어려운 시가 있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시와 신통치 않은 시가 있는 것이다." 대입하는 미지수X의 값에 따라 답을 달리하는 고차방정식 같은 시가 정말 좋은 시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가지 풀이의 열쇠를 건네주는 이덕규의 <풍향계> 가 여타의 신세대 시인들의 시와 구별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시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미덕이 있다. 다음 행과 비견해 의도적으로 2행과 3행을 길게 늘려놓고, 행간을 띄워놓은 이덕규의 형태 자체가 실제 풍향계의 모습과 닮아 있는 것이다.
3) 그리움의 무한순환
허공에 떠 있는 물고기(풍향계)는 단청의 추녀 끝에 매달린 물고기 모양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기맥이 통할 수 있다. 어느 절간, 목탁소리와 어우러져 잔잔히 퍼져나가는 소리의 파문. 바람에 민감한 쇳조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풍경은 풍향계와 닮아 있다. 그러나 풍향계와 풍경은 두 가지 점에서 갈라진다. 첫째 풍향계는 대지로부터 솟아오른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나 풍경은 추녀 끝에 매달려 요동한다. 둘째 풍향계는 바람의 길을 '시각화'하는 장치라면, 풍경은 바람의 결을 '청각화' 하는 기제이다. 시각보다 청각이 아폴로적인 현시성보다 디오니소스적인 음(音)의 꿈틀거림이 시적 이념을 출산할 수 있는 '원초현상' 과 친화력이 있다고 보는 니체의 미학에 따른다면, 풍경은 풍향계의 신화적 원형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풍향계가 바람의 방향을 가시화함으로써 과학적인 판단의 척도를 제공해주는 근대화의 산물이라면, 풍경은 바람의 의지 자체를 직접적으로 상징화함으로써 시혼의 메아리를 들려줄 수 있는 전근대성의 유물이기 때문이다.
문명화된 인간의 그럴싸한 세련됨에 가려진 투박한 근기를 엿들을 수 있는 풍경. 그래서 풍경은 도구적 이성으로 단련된 현대인을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시인의 연물(戀物)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놋쇠소리를 바람결에 쏟아보내고 있는 풍경의 모습에서 인간의 어떠한 욕망의 뿌리를 염탐할 수 있을까? 이 세상 경계의 어스름 속에서 머뭇거리는 풍경 속에 잠재된 인간의 실존적 문제는 무엇인가? 이에 적절한 시적 응답을 우리는 김명인의 <바닷가의 장례>에 있는 <安靜寺>라는 시 한편에서 찾아낼 수가 있다.
안정사玉蓮庵 낡은 단청의 추녀 끝
사방지기로 매달린 물고기가
풍경 속을 헤엄치듯
지느러밀 매고 있다
청동바다 섬들은 소릿골 건너 아득히 목메올 테지만
벌써 수천 대접째의 놋쇠소릴 바람결에
쏟아보내고 있다
그 요동으로도 하늘은 금세 눈 올 듯 멍빛이다
이 윤회 벗어나지 못할 때 웬 아낙이
아까부터 탑신 아래 꼬리 끌리는 촛불 피워놓고
수도 없이 오체투지로 엎드린다
정향나무 그늘이 따라서 굴신하며
법당 안으로 쓰러졌다가 절 마당에 주저앉았다가 한다
가고 싶다는 인간의 열망이
놋대접풍으로 쩔렁거려서
그리운 마음 흘러넘치게 하는
바다 가까운 절간이다
풍경은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다. 공중에 떠 있는 물고기라니, 지독한 모순이다. 그렇다면 이 모순은 왜 잉태되었는가? 해답은 간명하다.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 허공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고기 풍경이 "깨어지라 몸 부딛"치고 "수천 대접째의 놋쇠소릴 바람결에. 쏟아보내" 며 "갈 수 없는 곳"이지만 가고자 열망하는 곳은 어디인가? 이 역시 자명하다. 바다인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시구에서 알 수 있듯이 안전사 옥련암은 "바다 가까운 절간이다." 물고기는 목전에 바다를 바라보며 제 몸을 다 깨뜨려 소리로 바다에 당도하려 한다. 원적지를 향한 노스탤지어, 생명의 근원인 물에 대한 동경, 존재의 시원(始原)에 대한 갈망. 그러나 이것은 결코 감상에 젖은 낭만적인 그리움이 아니다. 떠날 곳을 떠날 수 없는 서러운 각인으로 인해 진저리치는 '더러운 그리움'인 것이다. 이런 밀도 높은 그리움의 강타로 인해 이제 "하늘은 금세 눈 올 듯 멍빛"이 된다.
바다는 분명 물고기가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바다이지만, 이 절간의 풍경으로 매달리기 위해서 거기서 떠나온 바다이기도 하다. 그리움은 이별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다는 물고기가 도달하려는 종착점도 되지만 출발점도 된다. 가련하고 쓸쓸한 삶의 내면에서 바다는 희망이지만 동시에 우리네 삶의 고뇌와 번뇌를 안겨주는 고해 즉, 세상이기도 한 것이다. 즉 바다는 물고기와의 합일을 꿈꾸면서도 물고기와의 단절을 강행한다. 둘은 서로 상보하면서도 상충되는 타자이다. 바로 여기서 모순의 회전운동이 발생한다. 그리움/이별, 시작/끝, 출발점/종착점, 희망/ 고해, 일치/ 분리의 이항대립이 지양되고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죽음의 끝이 재생의 처음과 만나고 단절의 출구가 결합의 입구로 둔갑한다. 마치 중세의 연금술사들이 죽음과 재생의 상징물로 여겼던, 둥글게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오우로로보로스처럼, 이때 세계는 양극의 방향을 통합하는 원형을 지향하게 된다. 이 우주에서 소멸하는 것은 없다. 변할 뿐이다. 새로운 형상을 취할 뿐이다. 이것이 변해 저것이 되고, 저것이 변해 이것이 될 뿐, 그 총화는 변하지 않는다. 이것을 두고 불가에서는 윤회라 하지 않는가. "수도 없이 오체투지로" 절을 하는 여인의 모습이다 "정향나무 그늘"의 반복적인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김명인은 풍경이란 대상에 빚져서 우리 삶의 모순, 그리고 그 모순에 대한 모순된 저항을 노래한다. 조변석개하는 것이 인간사라면 천변만화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불변하는 것이 있다면 대상에 대한 그리움의 열망뿐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진리이든.
우리 인간은 언제나 이 더러운 그리움의 고리를 끊고 평안의 상태로 접어들 수 있을까? 불가능할지 모른다. 역설은 그리움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순이 바로 우리 삶의 추동력이 아닐까. 결핍과 욕망의 무환순환(그리움은 인간이 인간인 이상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자 실존적 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칫 축축한 낭만적 감상성으로 왜곡되기 쉬운 그리움이란 주제를 인간 존재의 본질과 연결시킨 눈, 초월의 종언이 선고된 지금 이 시대에 초월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상을 찾아 더듬는 눈,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 자리잡고 있는 금방이라도 지워질 듯 희미하게 흔들리는 풍경의 처연한 아름다움을 목도하는 눈이 김명인의 눈이다.
3. 시인(詩人), 시인(視人), 시인(時人)
'시인의 눈'이라는 열쇠로 열고 들어간 세 편의 시에 대한 우리의 탐색이 두 개의 풍향계와 하나의 풍경이라 미로를 통과해 이제 막 성체의 후문 앞에 이르러 서 있다. 이제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나갈 차례만 남았다. 결론을 대신해서 미궁의 출구를 열 수 있는 세 개의 열쇠를 조립해보자
열쇠1 세 시인의 눈은 서로 다른 방향성을 지향한다. "어떤 바람도 우리를 내밀지 못한다"는 시구가 암시하듯 패터 빌의 시선이 풍향계의 정중앙, 즉 '전진도 없는 공회전'이라는 존재근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그 배후가 궁금하다"는 이덕규의 시야는 풍향계의 후미 쪽을 향해 있다. 그리고 목전에 있는 바다를 열망하는 풍경- 물고기를 주시하는 김명인의 눈은 무엇보다 풍경의 앞쪽을 향해 열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면에서, 뒤에서, 앞에서 대상을 장악하는 시인의 눈. 무엇을 보는가가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처음부터 사물의 척추를 그러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열쇠2. 풍향계의 동선과 움직임의 반경이 다르다. 페터 빌의 풍향계가 제자리에서 "녹"슬어가며 아주 정적인 원운동을 한다면, 이덕규의 풍향계는 "꼬리 지느러미가 푸르르 떨린다/ 그가 열심히 헤엄쳐" 간다라는 시구처럼 동적이고 직선적이다. 반면에 김명인의 풍경은 상/하, 좌/우, 앞/뒤,로 요동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입체적이다. 점->직선->입체라는 차원의 점층적인 확대가 시에 내포된 의미의 폭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김명인의 시가 앞의 두 시를 품어안을 수 있는 탄력성을 지닌 것 또한 부인하기 힘들어 보인다. 왜냐하면 바다와 풍경 사이의 입체적인 움직임을 상징하는 저 도도한 윤회의 써클이 점과 직선을 품어안을 수 있는 넓이와 깊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열쇠3. 풍향계와 풍경은 비변증법적이다. 회전운동을 지향하는 풍향계와 윤회를 암시하는 풍경은 흑백논리를 지양한다. 마치 전통철학이 세운 이데아/ 현실, 정신/ 물질, 주체/타자, 존재/ 무 따위의 이항대립적 메커니즘을 부정하려는 듯이 돌아가는 풍향계는 '해석학적 회전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다. 상주불변(常住不變)의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진리란 원래 있는 것을 '발견'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문맥에 따라 '발생' 한다는 전복적인 세계관, 정 반 합이라는 전진의 원리를 신봉하는 직선적인 시간론 대신에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층위를 동시성의 지평에서 해석하려는 순환적인 시간론이 풍향계의 이미지와 전혀 무관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풍향계란 전진 없는 정체이지만 그 원운동이 나선형의 궤적을 따라, 때로는 원심적인 방향으로 무한히 확대되기도 하고, 때로는 구심적인 방향으로 소용돌이치면서 정곡을 찌를 수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풍향계를 어디서 어떻게 어느 면을 보느냐(열쇠1), 풍향계는 어떠한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이는가(열쇠2), 그렇다면 풍향계의 본질은 무엇인가(열쇠3)라는 세 개의 열쇠를 정리해놓고 보니, 풍량계 자체가 시인의 눈에 대한 거대 은유로 전이될 수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대지의 축인 눈에 대한 거대 은유로 전이될 수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대지에 축을 세우고 세계의 실체를 포착하기 위해 사방을 훑으며 돌아가는 풍향계의 모습은 우리가 간절히 기대하는 시인의 눈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이 세개의 열쇠를 포개어서 출구를 열자마자, 순간 또다른 두 개의 문과 직면한다. 마지막 관문이다. 한편의 문 뒤에는 호메로스의 오디쎄이아에 나오는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가 "하나는 하나이지 여럿일 수 없다. 나는 오직 한 면만을 본다"며 잠복하고 있고, 다른 편 문 뒤에는 "시선은, 항상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찾는다. 그것은 불안한 기호이다. 기호로서 유별난 역동성이며, 그 힘은 기호를 범람한다"는 롤랑 바르뜨의 전언을 온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백안의 거인 '아르고스(Argos)가 있다.
후일 오디쎼우스에 의해서 장님이 될 운명의 키클롭스와 백 개의 눈이 사방에 붙어 있어 잠을 잘 때도 눈은 두 개만 감는다는 아르고스. 단안의 거인과 복안의 거인, 이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선택은 자명하다. 주저할 것이 없다. 무엇보다도 이시영의 시 한편을 기억 저편에서 불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인들은 항상
자기로부터 나온 눈을 갖고 있다
그 눈은 다람쥐의 두 눈처럼 한없이 맑고 투명하여
이슬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급류를 거슬어오르는 연어의 그것처럼
우리의 등짝에도 붙어 있어
세계의 심연을 예감하고
그 아가리를 향해 전속력으로 자신을 던질 줄도 아는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
- 이시영<시인의 눈> 부분
시인의 눈은 "한없이 맑고 투명하여/ 이슬 그 자체" 이기도 하고, "등짝에도 붙어 있어/ 세계의 심연을 예감하는" "무서운 힘을" 응축하고 있어야 한다는 시구에서 자연스럽게 "아르고스의 눈"이 연상된다. "궁핍한 시대 시인들은 왜 존재하는가." 휠덜린은 시<빵과 포도주>에서 이렇게 묻는다. 시대가 어두워질수록 시대의 피뢰침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의 눈은 빛나야 한다. 시대가 혼탁해질수록 시인의 임무는 배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인(詩人)이란 '시인(視人)' 이기도 하지만 '시인(時人)'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가 직면한 위기와 정면대결하기 위한 정공법은 바로 시인의 건강한 시력 회복에 있다 하겠다. 윤곽선이 지워진 신산한 시대를 불투명한 점선이 아닌 선명한 실선으로 잇는 눈, 현실의 문제의식과 긴장을 늦추지 않는 눈, 무엇을 보되 어디서, 어떻게, 왜 볼 것인가를 새삼 환기시켜주는 '아르고스의 눈'이 시인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라 하겠다.
시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밖에서 열리지 않는다. 해체와 망각의 속도전에 도취된 불확실한 이 시대를 끌어안으며 시의 존재의미와 존재이유에 대한 확고한 자명성이 성립되는 순간, 바로 시의 위기, 아니 문학의 위기를 헤치고 나갈 수 있는 돌파구가 열리는 것이다. 시인의 작은 눈에 시의 미래 전부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덧붙이자면, 새 천년의 벽두, 이 대전환의 고갯마루에 퍼져 있는 혼탁한 포말을 걷어내고 관찰과 집중을 통해 본질을 꿰뚫으려는 명민한 형안(炯眼)이 단지 시인에게만 필요한 미덕인가?
<작가들, 2000년 여름호>
명민(明敏) ; 총명하고 민첩함.
형안(炯眼) ; 빛나는 눈, 날카로운 눈매, 사물에 대한 뛰어나 관찰력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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