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잔치(Symposium)』
민승기(철학자)
사랑은 잔치다. 함께 모여 술을 마시는. 경계가 와해되는 혼돈의 경험. 전날의 과음 때문에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기로 하고 피리 부는 소녀까지 내보낸 채 사랑(eros)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할 때도 혼돈은 이미 문턱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발기된 채 님프들을 쫓아다니는 괴물인 실레노스의 성충동으로 또는 피리를 부는 반인반수인 마르쉬아스의 모습으로 이미 그곳에 있다. 소크라테스. 그의 말은 페리클레스와 같은 뛰어난 연설가의 수사학을 넘어서 있다. 마르쉬아스의 피리 소리나 사이렌의 노래처럼 영혼을 혼돈스럽게 하는, 매혹적이지만 치명적인 소크라테스의 말 앞에서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끼고 달아난다. 그가 없어져 버리기를 바라지만 막상 그런 일이 일어나면 훨씬 더 큰 고통을 받게 될 것 같은 인간-괴물, 소크라테스(215e―216c). 에로스는 이렇듯 신도 인간도 아닌 중간자, 혼돈스러운 괴물의 모습을 한 소크라테스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온전함에 대한 욕망과 추구”(193a)를 보여주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와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에로스를 ‘집도 없이 맨발로 돌아다니는 결핍’(203d)으로 설명한다. 에로스를 논하는 『잔치』라는 텍스트 자체가 바로 이 결핍(에로스)을 ‘반복’한다. 아리스토파네스, 아가톤과 소크라테스, 알키비아데스 등이 펼쳤던 사랑 이야기를 아폴로도로스라는 서술자가 전달한다. 그러나 잔치는 서술자가 아직 아이였을 때 즉 오래 전에 열렸고 서술자는 그 자리에 없었으며 따라서 『잔치』는 서술자가 아리스토데모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전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173a―b). 그 자리에 있었던 아리스토데모스 또한 잔치에서 사람들이 말한 것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지 못하며 아폴로도로스 역시 그가 말해 준 것 전부를 기억하진 못한다(178a). 부재하는 서술자. 그러나 그 자리에 현존하고 있었던 사건의 전달자 역시 온전한 내용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잔치’라는 공간 속에서 철학의 ‘온전함’과 ‘직접성’은 처음부터 손상되어 있다. ‘철학을 기억술’로 규정하는 플라톤의 텍스트는 정작 온전하지 못한 기억의 편린들로 왜곡되어 있다. 문학을 이데아로부터 두 단계나 멀어진 (불충분한) 재현으로 폄하했던 플라톤이 왜 자신의 텍스트를 ‘문학적’ 방식으로 구성하고 있을까? ‘에로스밖에 알지 못한다’(177d)던 소크라테스가 에로스를 이야기하기 위해 디오티마라는 이방인 여인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폴로도로스는 자신이 ‘연습을 안 거친 상태가 아니라고’(173c) 말한다. 에로스는 문학적 수행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것인가? 서술자들의 ‘틈’이나 인물들 간의 ‘간극’[샤프(Matthew Sharpe)의 말대로 소크라테스는 ‘좋습니다,’ ‘아주 맞는 말씀이십니다’와 같은 동의를 통해 디오티마의 비일관성을 보충하고 있다] 속에서 판타지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가 보여주는 ‘온전함의 판타지’와 디오티마의 에로스가 수행하는 ‘남성 출산의 판타지’. 에로스는 철학의 결핍을 ‘드러내는 동시에 숨기는’ ‘이중적’ 판타지를 갖고 있다. ‘남성 출산의 판타지’는 여성의 자궁을 통해 태어날 수밖에 없는 남성의 결핍을 드러내는 동시에 불멸성을 낳는 지식을 통해 자궁을 길들이려는 철학적 시도이기도 하다. 철학을 에로스로 설명하려는 『잔치』라는 텍스트 속에서 에로스는 추구되어야 하는 것인 동시에 재갈을 물려야 하는 혼돈스러운 것으로 남아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판타지 역시 단순히 둘로 나뉜 ‘부분’이 온전한 하나의 ‘전체’를 회복하려는 시도로 설명될 수 없다. 인간의 기원과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파네스가 제시하는 세 가지 성은 아직 인간의 성(차)이라 부를 수 없다. 여전히 성이 해와 땅, 달과 같은 자연적이고 우주적인 원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190b). 네 개의 팔과 네 개의 다리,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두 개의 얼굴, 네 개의 귀, 두 개의 치부를 갖고 둥근 전체를 이루어 굴러다니며 그 온전함으로 말미암아 신들을 공격했던 기원적 인간은 제우스에 의해 두 동강이 났지만 첫 번째 거세는 인간의 성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그들은 치부가 바깥쪽에 있어 메뚜기처럼 땅 속에 사정을 하고 땅이 임신하여 자손들을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출토인 신화. 뱀의 이빨을 땅에 뿌려 거기에서 전사들이 솟아나오거나, 뒤를 향해 던진 돌에서 자손들이 태어나는 이야기들은 여성의 자궁을 피해 기원이 되고자 했던 남성 판타지의 산물이다. 헤파이스투스가 아테네에 대한 욕정에 불타올라 그녀의 넓적다리에 사정을 하고 아테네가 재빨리 그것을 씻어내어 땅에 던지니 땅이 임신하여 아테네인의 조상인 에리크토니우스가 태어났다는 기원적 신화 역시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라는 인간의 성(욕)을 피해 가려는 시도일 뿐이다.
“본성이 둘로 잘렸기 때문에 자신의 나머지 반쪽을 그리워하면서 서로 팔을 얼싸안고 뒤엉켜 한 몸으로 자라기를 욕망하다가 상대방과 떨어진 채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죽어가는”(191a) 인간들을 가엾게 여겨 제우스가 다시 개입했을 때 비로소 인간의 성이 시작된다. 생식기를 앞쪽으로 옮겨 놓아 인간이 상대방 속에서 생식을 하도록 해주자 ‘남자와 남자가 만날 때도 만족이 생겨나게 되고 끌어안기를 멈춘 후에 하던 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된다’(191b).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남녀 간의 생식뿐 아니라 생식과는 관계없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덧붙여진 ‘잉여만족’이다. 주판치츠(Alenka Zupančič)의 말대로 잉여만족은 부분을 보충하여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내는 보완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려진 두 반쪽이 하나로 통합될 수 없도록 하는 방해물, 제3의 요소다. 그것은 전체의 잉여물, 전체로 통합될 수 없는 나머지로 남아 두 반쪽 모두에 틈을 낸다. 잉여만족은 덧붙여짐으로써 오히려 결핍을 드러내는 ‘사이’다. 그것은 두 반쪽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잉여물로 남아 부분의 대칭성과 동등성을 손상시킨다. 에로스는 동등한 가치를 통해 교환될 수 없는 잉여, 평등한 두 부분이 만나 말끔한 전체를 이루는 보완의 논리 자체를 중지시키는 ‘사이,’ ‘제3의 요소’다. 두 부분은 이미 ‘사이’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나의 결핍을 메워 줄 것으로 기대되는 또 다른 반쪽은 이미 내 속에서 나의 분열을 초래하는 나머지일 뿐이다. 이제 에로스는 통합된 하나가 아니라 이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이,’ 내재적 분열을 초래하는 이방인이다. 소크라테스가 에로스를 ‘이것도 저것도 아닌(neither-nor)’ ‘중간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부분의 겹침은 온전한 하나가 아닌 이중의 결핍을 초래할 뿐이다. 그러나 바로 이 잉여가 인간(의 성)을 인간이게 한다. ‘만족한 후에 그들은 끌어안기를 멈추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끌어안은 채 죽어가지 않고 (문화적)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그들을 연결하는 동시에 분리시키는 바로 이 잉여(만족)이기 때문이다.
잉여만족은 온전함의 판타지가 숨기고 있는 결핍이자 그것이 제거할 수 없는 틈이다. 이것은 마치 아리스토파네스의 딸꾹질이 『잔치』라는 텍스트 자체의 ‘틈’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과 같다. 에로스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중지시키고 논의 순서를 바꾸게 하여 웃음이라는 틈을 촉발시키는 딸꾹질은 알키비아데스의 갑작스러운 침입을 예고하는 동시에 결국 “온통 북새통이 되어 더 이상 어떤 질서도 없이 술만 마시게 되는”(223b) 『잔치』의 혼돈스러운 결말을 지시하고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혼돈을 초래하는 틈인 에로스를 소크라테스 ‘속’에서 보았다고 말한다. 영혼을 혼돈스럽게 하는 사이렌의 노래와도 같은 아름답고 치명적인 대상. 육체적 아름다움이나 부로 교환될 수 없는 독특한 대상. 너무나 신성하고 아름다워서 그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216e―217a) 힘을 가진 보물(agalma). 찬미를 받아야 하는 동시에 질투를 자아내는 대상. 살모사에게 물린 것보다도 더 큰 고통을 주는 그러나 일단 붙잡기만 하면 지혜 사랑의 광기와 열광을 공유하도록 만드는 알 수 없는 대상(217e―218a)을 알키비아데스는 가장 ‘진지한’ 소크라테스 ‘속’에서 보았다고 말한다. 진지함과 광기가 동시에 발생하는, 진리에 대한 사유가 에로틱한 행위와 같아지는 신비로운 순간이 알키비아데스를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아갈마를 육체적 아름다움과 맞바꾸어 소유하고자 소크라테스를 유혹한다. 에로스가 교환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점은 이미 첫 번째 발언자인 파이드로스의 연설 속에 등장한다.
자기 남편을 위해 기꺼이 죽은 알케스티스(179b)나 “자기를 사랑하는 자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한 후에 파트로클로스를 위해 죽을 뿐 아니라 이미 죽은 그를 뒤따라 죽는 일까지도 과감히 선택한”(179e―180a) 아킬레우스의 사랑은 교환을 넘어서는 희생을 보여준다. 디오티마는 이것을 불사의 덕과 영광스러운 평판을 위한(208d) 희생으로 설명하는 반면 소크라테스는 자신 속에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218e)을 의미화할 수 없는 텅 빈 공간으로 묘사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자(I am nothing)인데 자네가 그걸 모르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보게”(219a). 아갈마는 소크라테스를 특징짓는 규정들로 환원될 수 없는 공간, 라캉(Jacques Lacan)식으로 말하면 소크라테스 ‘속’에서 소크라테스를 ‘능가’하는 텅 빔이다. 소크라테스 ‘속’에 있지만 그가 지배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빈 공간, 그를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어 주는 ‘텅 빈 공간(nothing)’은 소크라테스 자신에게도 비밀인 알 수 없는 대상으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라캉은 사랑을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으로 정의한다. 사랑이라는 선물은 알키비아데스를 비롯한 잔치 참여자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되는 소크라테스에게 부여한 전이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아갈마는 파이드로스, 아가톤, 에뤽시마코스, 파우사니아스, 아리스토데모스, 아리스토파네스가 공유했던 광기와 열광(218b), 전이적 사랑이 투사되는 공간이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자신 역시 집도 없이 맨발로 돌아다니는 비천한 대상임을 천명함으로써 알키비아데스가 욕망의 주체로 탄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판타지 속의 텅 빈 곳을 보여주는 라캉적 의미의 분석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갈마는 알키비아데스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빈 공간, 욕망의 원인이다. 욕망의 대상이었던 알키비아데스는 아갈마의 텅 빔과 마주한 후에 욕망의 주체로 이행한다. 그는 남편을 위해 희생하지만 여전히 사랑받는 대상으로 남아 있는 알케스티스와는 달리 이미 죽은 파트로클로스를 뒤따라 죽음으로써 욕망의 대상에서 욕망의 주체로 변환되는 아킬레우스와 닮아 있다. 신들은 알케스티스보다 아킬레우스를 더 높이 평가하여 그의 영혼을 축복받은 자들의 섬으로 보내 주었던 것이다(179e).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이전의 논자들과 다르게 에로스를 주체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에로스는 욕망되는 대상이 아니라 욕망하는 주체다.
대상에서 주체로의 전환은 에로스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한다. 에로스는 더 이상 선과 같은 온전한 대상이 아니라 온전함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욕망하는 주체다. 페니아(궁핍)의 아들인 에로스는 늘 가난하고 맨발에 집도 없이 떠돌아다닌다. 그러나 포로스(방도)를 아버지로 둔 까닭에 아름다운 것들과 좋은 것들을 얻을 계획을 꾸민다 (213d). 결국 그는 풍요와 결핍, 지식과 무지, 신과 인간 ‘사이’에 있다. 에로스의 구현인 소크라테스가 반인반수의 신화적 괴물로 묘사되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철학자들 역시 지식과 무지 사이에서 지식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지혜로운 자는 그 결핍 없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지식을 욕망하지 않고 무지한 자들 역시 뭔가를 결여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지식을 욕망하지 않는다(204a). 대립항들 모두를 부정하는 사이 존재, 변화를 초래하는 힘이나 작용으로서의 에로스가 생성과 소멸을 넘어선 단일 형상으로 물신화될 때 판타지가 생성된다. 그 자체로 문제적이었던 에로스는 사이 존재가 갖는 모호성을 상실한 채 아름다움 자체로 승화되어 버린다. 디오티마의 이야기 속에서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 안에서의 출산’(206b)으로 정의되는데, 출산이란 가사적인 것이 불사적인 것에 참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문제는 가사적인 것과 불사적인 것 ‘사이’에 있던 에로스가 불사적인 ‘초월적 대상’으로 환원될 때 발생한다. 육체에서 영혼으로의 상승은 다시 육체도 영혼도 아닌 제3의 공간, 잉여만족으로서의 에로스를 배제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성적 충동을 설명할 때 플라톤의 에로스를 인용하고 있는 것은 매우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사이’에 있는 충동(drive)은 아이가 젖을 빨 때나 배설을 할 때 느끼는 잉여만족으로 드러난다. 배고픔이나 장의 불쾌함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에 종속되지 않는 아니 그것을 넘어서는 잉여는 대상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다. 어떤 대상도 잉여적일 수 있다. 철학적 행위 역시 에로스인 한 잉여물을 남길 수 있다. 출산의 판타지는 불멸성의 추구라는 텔로스를 다시 에로스에 부여함으로써 잉여를 제거하고자 하는 철학의 자기 방어다. 그러나 철학적 사유 자체가 사랑의 행위라면 철학적 사유는 이미 사랑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랑이란 빈 공간과 마주할 때 사유는 이미 자신의 잉여물로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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