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맹문재<책을 읽는다고 말하지 않겠다>

미송 2011. 4. 17. 13:29

책을 읽는다고 말하지 않겠다

 

맹문재

冊이란 한자를 찾다보니
부수로 冂이 쓰이는 것을 알았다
옛날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을 읍이라 했고
읍의 바깥 지역을 교라 했고
교의 바깥 지역을 야라 했고
야의 바깥 지역을 림이라 했고
림의 바깥 지역을 경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책을 둘러싸고 있는 경계선은
내 시야가 닿기 어려운 거리이다
나는 책을 읽어서는 세상을 볼 수 없다고 믿어왔는데
책의 경계선 안에
산도 강도 들도 짐승도
사람도 시장도 지천인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칸트는 평생 동안 100리 밖을 나가지 않고
서재에서 보냈다고 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시계와 같이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벌써 100리 밖을 벗어났고
들쑥날쑥 살아가고
결혼까지 했으므로
나는 책을 읽었다고 말하면 안 되겠다
책을 읽는다고 말하지 않겠다
다만 책이 넓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보이는 데까지만 걸어가야겠다

* 해당 한자는 읍(邑), 교(郊), 야(野), 림(林), 경(冂).

[현대시학] 201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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