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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라는 ‘부름’: 『우정의 정치학』
민승기(철학자)
1.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
“오 나의 친구들이여”라는 ‘부름’ 속에서 친구가 만들어진다. 이 부름에 응답하기로 결정할 때 나는 비로소 친구가 된다. 우정(philia)을 가능하게 하는 부름은 그러나 지금, 여기에 없는 친구에게 행하는 말건넴(address)일 수 있다. 죽은 친구에 대한 사랑. “친구란 없다.” 부름 이전에 친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친구를 다시 살려내는 것 역시 이 ‘부름’이다. 데리다의 말대로 친구라는 개념 속에는 유령이 출몰한다. 충분히 죽지 못해 다시 살아온 친구. 우정은 개념이 사유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들을 다시 불러낸다. 「우정의 정치학」이란 세미나의 시작을 알리는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는 인용은 마치 우정의 역사에 끼워넣어진 ‘이질적 육체’(foreign body)와도 같다. 대칭성과 평등을 전제하는 우정과는 다르게 서로를 와해시키는 것들이 ‘이상하게’ 결합되어 있는 이 말이 계속 인용되고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정의 불가능성을 지시하는 외침이 어떻게 우정의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가?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는 우정의 역사 속에서 인용되어 반복되면서 자신과도 다른 ‘이질적 육체’가 되어버린다. 이 말은 전기 작가 라에르티우스(Diogenes Laertius)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말이라고 전해지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기원을 알 수 없는 인용이 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블랑쇼, 레비나스, 푸코, 들뢰즈, 데리다의 텍스트 속에서 ‘전체’를 흔드는 ‘부분’으로 출몰한다. 주인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가장을 근심하게 하는 카프카의 오드라덱처럼 전체를 능가하는 이 부분은 그들에게 ‘우정’을 선물하는 동시에 ‘우정’이라는 개념 자체가 포용할 수 없는 ‘이질적 육체’를 드러낸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우정의 이중성은 인용 자체의 불가능한 결합에서 도출된다. “오 나의 친구들이여”라는 친구의 긍정은 “친구란 없다”에 의해 곧 부정된다. 긍정과 부정의 ‘틈’ 속에서 시간적 간극이 모습을 드러낸다. 친구의 부름은 이미 상실된 또는 아직 오지 않은 친구들에게 호소하는 반면 “친구란 없다”는 현재의 상실을 묘사하고 있다. 부름은 ‘복수’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사실의 묘사는 ‘단수’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일 수 없는 ‘차이’가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차이와 동일성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미 겹쳐 있다.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는 화합할 수 없는 둘의 병치 또는 상호성을 통해 하나가 되는 둘이 아니라 하나로서의 둘, 둘로서의 하나다.
부름은 “친구란 없다”와 반대되는 ‘친구란 있다’는 사실의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의 긍정이나 부정 ‘이전’에 있는 근원적인 긍정을 지시한다. 언어는 친구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다. 친구는 언어 속에 ‘이미 항상’ 들어와 있지만 ‘아직 재현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는 타자다. 카푸토(John Caputo)의 말대로 모든 문장은 ‘오 나의 친구들이여’로 시작한다. 타자의 부름은 재현되지 않아 현전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부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는 유령의 형태로 언어 속에 출몰한다. 내 말을 들어주는 아니 이미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타자를 긍정하지 않고서는 언어 자체가 불가능하다. ‘해체론이 언어의 타자를 구하는 작업’인 이유는 그것이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타자를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름은 기원이나 믿음, 증언의 형태로 재현적 언어의 ‘틈’ 속에서 발생한다. 틈은 언어를 불가능하게 하는 결핍일 뿐 아니라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선물이기도 하다. “오 나의 친구들이여”는 “친구란 없다”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겹침은 대립이 아닌 ‘이면’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타자를 지시한다. 언어의 이면 즉 부름을 제거하게 되면 순수한 언어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부름은 언어 속에서 의미로 살해되지 않는 잉여물로 남아 우정을 증거한다. “오 나의 친구들이여.”
‘시간적 겹침’도 마찬가지다. “오 나의 친구들이여”가 환기시키는 (절대적) 과거나 미래는 단순히 “친구란 없다”는 현재의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코 현전화할 수 없지만 그것 없이는 현전이 불가능해지는 타자를 뜻한다. 현재는 과거나 미래에 감염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있었지만 상실된 형태(또는 온전히 실현될 수 없는 가능성)로 남아 미래에 다시 오는 친구의 부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복수와 단수도 겹쳐 있다. 겹침은 “너무 많은 친구들을 가진 자는 진정한 (한) 친구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방식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친구는 복수와 단수의 대립으로 말끔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단수와 복수의 경험 다시 말해 하나 속에 자신의 분열을 품고 있는 둘이 친구라면 친구는 이미 자신과도 다른 타자로 존재하고 있지 않는가? 낭시나 블랑쇼가 보여주듯이 친구들의 공동체는 보편적 개념이나 특수한 개인들의 집합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단복수적 존재(singular plural) 또는 ‘공동체라 할 수 없는 공동체’다. 부름이 언어 속에 이미 들어와 있지만 언어의 요소 속에 포함될 수 없는 빈 공간을 명령하듯이 친구 역시 특수성 속에서 특수성을 분열시키는 보편성, 특수성과 보편성의 겹침 속에서 특수성도 보편성도 아닌 이타성(alterity)을 지시하고 있다. 우정은 특수한 자질들이나 보편적 개념의 공유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특수성과 보편성의 대립으로는 사유할 수 없는 거리,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거리 속에서 생성된다.
우정은 절대적 가까움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몽테뉴에게 그것은 ‘두 몸에 깃든 한 영혼’처럼 사랑을 통해 하나가 됨을 뜻한다. ‘하나가 되는 사랑’을 벗어나는 우정의 가능성은 칸트에게서 비롯된다. 칸트는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는 인용을 “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로 (다르게) 반복한다. 거리를 없애는 사랑과 거리를 유지하는 존경(respect)이 균형을 이룰 때 우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칸트는 사랑이 너무 지나쳐 존경을 유지하는 거리가 없어질 때 우정이 사라져 버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나 몽테뉴와는 다르게 거리의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여전히 균형을 통해 거리를 제한하고 있다. 반면 니체에게 우정은 절대적 거리에서 생겨난다. 코르호넨(Kuisma Korhonen)의 말대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던 두 영혼은 그들이 갖는 거리 때문에 적이 되는 것이다. “적들이여 적이란 없다.”
니체는 “오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라는 인용 속에서 친구와 적들의 ‘겹침’을 읽어내고 있다. 친구들에게로 다가가는 것(오 친구들이여)과 친구들로부터 멀어지는(친구란 없다) 움직임이 동시에 발생한다. 친구가 적이 되고, 절대적 가까움과 절대적 거리가 같아질 때 우정이 생겨난다. 블랑쇼는 “푸코와 개인적인 친분이 없으며 그를 한 번밖에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푸코가 그때 거기 없었다고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블랑쇼가 푸코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을 때 푸코는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그리워했는지 모른다”라고 블랑쇼는 쓰고 있다. 푸코 역시 블랑쇼는 그의 작품과도 같기 때문에 굳이 그를 만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작품의 현전과 저자의 부재가 겹친다. 카우프만(Eleanor Kaufman)의 말대로 블랑쇼의 소설을 특징짓는 것은 개별적 세부 사항들의 삭제다.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 가장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 인식하거나 메워질 수 없는 거리가 오히려 가까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결코 만난 적이 없던 블랑쇼와 푸코는 텍스트를 읽고 서로를 논평하는 가운데에서 생겨난 텍스트적인, 문학적인 우정을 나눈다. 비인간적인 거리의 연장선상에 죽음이 있다. 데리다는 “라캉과 나,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곧 ‘우리’는 타자의 죽음 이후에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블랑쇼 역시 푸코의 죽음 이후에야 스스로를 그의 친구로 선언할 수 있었다. 우정은 친구에 대한 애도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친구가 살아 있을 때에도 애도의 가능성은 이미 항상 그의 삶 속에 깃들어 있다. 부름이 현전의 틈 속에서 불러내는 것도 바로 이 삶 속의 죽음이다. 그것은 이미 항상 현전 속에 들어와 있지만 현전화할 수 없어 미래의 형태로 도래하는 유령들을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 거리, 낯섦, 증오, 적, 비대칭성, 비인격성들이 부름의 공간 속에서 우정을 발생시킨다. 이제 거리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일성의 사유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계, 문학적 우정을 가능하게 한다. “적들이여, 적이란 없다.”
2. 비대칭적 ‘부름’: 우정의 윤리학
니체가 불러내는 적들은 미래의 철학자들이다. 도래하는(to-come) 철학자들과의 만남 속에서 지금 여기 있는 바보의 외침이 가능해진다. 도래하는 타자는 현재로 환원될 수 있는 미래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있었지만 아직 현실화되지 않아 다시 와야 할 것으로 남아 있는 과거와 미래의 겹침, ‘아마도(perhaps)’의 형태로 귀환하여 현재에 틈을 내는 ‘결정불가능성’이다. 제거될 수 없는 모호성을 지시하는 ‘아마도’는 현재 속에서 현재를 절개하는 ‘열림’이다. 내부에서 내부를 절개하는 ‘아마도’는 대립구조의 눈에는 비가시적인 것으로 남아 내부의 잉여물 또는 지워질 수 없는 흔적(trace)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제거될 수 없는 흔적을 기입함으로써 현재의 비대칭적 구조를 노출시키는 ‘아마도’는 ‘위험한’ 것이다(dangerous perhaps). ‘아마도’는 언어의 공백, 친구를 부르는 침묵의 호소로 남아 있다.
니체나 데리다가 겹침 또는 비대칭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대칭성과 상호성의 사유가 초래하는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다. ‘형제애’라는 비유 속에서 집약되는 유사성, 상호성, 동일성의 사유는 친밀함과 가까움 속에서 ‘나’를 확장해 간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자기-사랑이다. 자기─사랑은 스스로에게 현전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동시에 사랑받는다는 점에서 상호성과 동일성의 가장 훌륭한 예다. 그러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친구는 어머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보답에 대한 기대 없이 아이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우정(친애)의 훌륭한 예가 된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 속에 존재하는 비대칭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을 특징짓고 있지 않은가? 라고 데리다는 묻는다. 그러나 자기─사랑이 우정의 가장 훌륭한 예로 제시되면서부터 어머니는 친구로부터 배제된다. 그녀의 우정은 사랑하는 동시에 사랑받아야 하는 상호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William Young III)의 말대로 그녀는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한다는 점에서 이미 친구이며 상호성을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직 친구가 아니다. ‘이미 항상’과 ‘아직 아닌’이 겹쳐 있는 ‘아마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어머니의 우정을 배제할 때만 형제들의 우정이 가능해진다. 어머니의 비대칭적 사랑이 없었더라면 자기-사랑은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사랑은 자신의 기원을 망각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비대칭적인 어머니의 기원적 사랑을 배제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정의 가장 훌륭한 예로 제시된 자기─사랑에 우정이 있는가? 친구가 없지 않는가? 라고 데리다는 묻는다. 가장 훌륭한 우정은 우정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배가시켜야 한다. 친구는 하나 이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친구를 ‘또 다른 나’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자기─사랑은 자기-분열일 수밖에 없다. 영의 말대로 개념은 자신의 보편성을 주장하기 위해 예를 동원한다. 그러나 우정의 가장 훌륭한 예가 우정을 없애버린다면 우정의 보편성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데리다의 말대로 보편성을 보충하기 위해 덧붙여지는 예가 오히려 보편성의 결핍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상호성을 기반으로 하는 우정 속에는 이미 비대칭적 우정이 겹쳐 있다. 그것은 어머니의 우정처럼 배제되었지만 온전히 제거되지 않아 유령처럼 출몰한다. 비대칭성은 결국 상호성에 기초한 우정의 보편성 자체를 분열시키고 있지 않는가? 동일성과 상호성을 기반으로 하는 우정은 친구와 적의 구별에 의존하고 있지만 니체의 예에서 보듯 친구는 이미 적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데리다의 말대로 형제라는 비유는 구체적 친구와의 특별한 관계를 뜻하는 동시에 적을 포함한 보편적 관계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더욱이 친족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우애(fraternity) 역시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수사적 인용과 반복에 의존해야 한다. 우애나 평등의 ‘자연성’은 인위적 수사가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그러나 이 허구가 정치질서에 필연성을 부여하고 정치학의 근간이 되어 타자를 폭력적으로 억압한다. 변경할 수 없는 자연으로 작용하는 우애는 다시 친구와 적을 구분하여 다른 종류의 우정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다른 우정의 가능성은 친구에의 말건넴을 친구에 대한 지식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그의 이타성을 존중해 주는 데서 생겨난다. 영의 말대로 막스 브로트(Max Brod)의 우정은 우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근원적 거리를 없애 카프카를 카프카에 대한 지식으로 환원시키고 있다. 카프카를 읽는 길잡이가 되고자 하는 브로트의 해석은 ‘불충분성의 공유’라는 우정의 윤리학을 억압해버린다. 블랑쇼가 우정을 “친구 없는, 알 수 없는 것과의 관계” 또는 “심연과도 같은 부재”에 기초한 것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타자와의 ‘무한한 거리’나 ‘근원적 분리’는 우정이 교환 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도록 한다. 우정은 과연 교환되거나 계산가능한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우정을 계산가능한 것으로 산정할 때 비로소 상호성이 가능해진다. 이제 우정은 소유하거나 교환할 수 있는 그래서 온전히 지배할 수 있는 재산이 된다. 그러나 앞에서 논의되었던 것처럼 우정의 비대칭성은 우정을 (지배)불가능한 이타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미 항상’과 ‘아직 아닌’이 겹쳐 있는 ‘아마도’의 시간성은 우정을 개념적 지식을 통해 인식되거나 소유할 수 없는 ‘선물’로 바꾸어버리기 때문이다. 시간을 선물할 때 우정의 윤리학이 가능해진다. 코르호넨의 말대로 시간이란 우리가 소유하거나 다시 돌려받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등성과 상호성의 이름으로 현전하는 우정을 중지시킬 때, 비대칭성으로 드러나는 타자를 환대할 때 우정의 윤리학이 시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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