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들 / 심보선
우리는 한 쌍의 별난 기러기
다른 기러기 떼가 V자 대오로
따뜻한 남녘으로 날아갈 적에
독수리의 들판과 부엉이의 숲으로 향한다
용맹스런 자들과 친구가 되기 위하여
지혜로운 자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하여
밤에 그들이 각자의 위대한 둥지에 깃들면
우리는 해변의 백사장 위에 부둥켜안고
“주여, 우리의 지친 꿈을 돌보아 주소서”
360도 고개 돌려 간절한 기도(祈禱)의 원을 그린 후
서로의 등판에 차가운 부리를 묻고 잠이 든다
우리가 잠들어 있는 동안
밤하늘에선 혜성 하나가 기다란 흰털처럼 자라나고
모든 별은 자신의 고유한 은빛 이름을 웅얼거린다
영원은 신(神)이 우주라는 사과 한 알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시간
이 밤의 우리가 내일 아침 깨어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다만 꿈속을 헤엄쳐 새벽으로 나아간다
《문장웹진 5월호》
'나' 라는 말 /
심보선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선처럼 아득하게
더 멀게는 지평선 너머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 때가 더 좋습니다.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 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 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역시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홀로 나아갈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 위에 '나'라고 썼던 것이겠지요.
나는 문득 그 말을 보호해 주고 싶어서
자갈들을 주워 주위에 빙 둘러 놓았습니다.
물론 하루도 채 안 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혹은 어느 무심한 발길에 의해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나는 내가 낳아 본 적도 없는 아기처럼 아끼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 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 양
‘너는 말이야', '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며
죽음보다도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

1970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
컬럼비아대학 사회학 박사과정 졸업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21세기, 전망> 동인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