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명기, 매창 그 절개를 추억하다 / 도올 김용옥
나 도올은 구식 인간이다.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아날로그요, 구식이다. 신문에 올리는 이 글도 원고지 위에 잉크 펜으로 쓰는 것이다. 공중목욕탕에도 잘 가는데 그것도 현란한 사우나에는 가지 않는다. 같은 물을 필터링만 하고 빙빙 돌려대니 보기는 깨끗해도 불결하기 그지없다. 부글부글대는 소음만 요란스럽고 몸을 깨끗이 하기는커녕 오히려 피부만 상하게 된다. 탕에 아무 시설이 없고 내가 물을 직접 틀어 찰랑찰랑 넘치게 할 수 있는 구식 동네 목욕탕이 제일인데, 이런 고요한 좋은 목욕탕은 다 사라져가고 있다. 낙산 넘어 삼선교 후미진 산동네에 용궁탕이라는 옛 목욕탕이 있는데 내 인생의 유토피아라고는 이곳 한 곳이다. 인적이 드물어 뽀얗게 김만 서리는 적막감을 즐기며 따끈따끈한 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세파에서 얻은 모든 스트레스가 다 풀린다. 어느 날이었다. 팔순은 족히 되어 보이는 노인이 때를 매우 열중하면서 밀고 있었다. 그런데 기골이 어찌나 장대한지 풍기는 기품이 범상치 않았다. 여진의 후예일까? 때나 밀어드릴까 하고 말을 건넸다.
"어르신, 함경도 분이시오?"
"부안이오. 일찍 상처하고서도 재취 않고 2남3녀를 잘 키웠지. 그래서 떳떳해. 덩치가 커서 막걸리 한 잔도 안 뺏겼지. 지금은 혼자 밥해 먹고 살아. 두 아들이 매달 35만원씩 통장에 집어넣어주는데 그것으로 족해. 일주일에 한 번 여기 오는 게 낙이지."
오차노미즈에 있는 와세다실업학교를 나왔다 했다. 해방 직후 귀국하자마자 4개월 진해에서 훈련 받고 입대한 한국해병대 1기. 공직 생활로 은퇴.
"그런데 도올 선생이 아니시오?"
"어떻게 저와 같은 한미한 서생까지 알아보십니까?"
"도올이라면 내가 일러주고픈 시가 하나 있제. 매창(梅窓)이라는 부안의 기생을 아오?"
매창이란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均)이 그토록 사모해도 몸을 허락지 않았던, 황진이와 쌍벽을 이룬 조선의 명기.
"매창이 시재가 워낙 출중했어. 그런데 당대 천민 출신이면서도 시문에 필적할 자가 없었던 촌은(村隱, 劉希慶, 1545~1636)을 만나 사랑에 빠졌지. 촌은에 대한 단심의 벽을 허균도 못 뚫은 게야. 그런데 신임 사또 조일철(趙一徹)이 부임하자마자 매창에게 수청을 명한 거야. 때는 임란의 병화로 산천이 뒤흔들렸고, 매창의 애인 촌은은 의병을 일으켜 목숨 걸고 싸우고 있었지. 매창이 사또 명에 넘어갈 리 있나? 한 달을 병가로 미적거리다 결국 끌려나갔지. 사또와 앉은 정자에 때마침 개구리 소리가 들렸어. 수청을 거절하는 매창에게 사또는 매우 어려운 숙제를 던졌지. 낙운성시(落韻成詩)하라는 게야. 얄짜리 없게 옷 의, 날 비, 고사리 미 세 자를 운으로 내고, 게다가 꼭 개구리를 주제로 읊으라고 명령했지."
서슬 퍼런 긴장의 순간. 매창은 서슴지 않고 한시를 써내려갔다.
春雨池塘歎無衣 草中逢蛇恨不飛
封口生涯人若得 夷齊不食首陽薇
봄비 부슬부슬 연못가에 옷도 입지 못해 서러워
풀섶에서 뱀 만나니 날지 못함 한하노라
사람이 개구리처럼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생애 얻을 수만 있다면
백이와 숙제도 수양산의 고사리조차 먹지 않았으리
옷도 없고 날지도 못하는 개구리의 신세를 자신의 처지에 비하고, 개구리를 잡아먹으려 넘실거리는 뱀을 사또에 비했다. 마지막의 명구절은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라는 성삼문의 절개를 읊은 명시조를 연상케 한다. 수양산도 이미 주나라땅이 되었으니 그 땅의 고사리조차 먹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어제 난 목욕탕 지킴이 아저씨에게 그 할아버지 소식을 물었다.
"몇 달째 안 오시는데요."
2006년 8월 31일 영면. 부안인 주영식(朱永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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