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나희덕<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미송 2009. 3. 28. 09:28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