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김백겸<아름다움의 중독>

미송 2011. 5. 31. 23:19

1. 아름다움의 중독

  -내안의 데몬(demon)

 

 

에집트의 토트모스 4세는 왕자신분이었을 때 기자의 스핑크스 앞에서 잠시 쉬려고 누웠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 왕자는 꿈을 꾸었다. 스핑크스는 입을 열어 토트모스가 자신의 몸에 쌓인 모래를 치우고 자신의 신전을 돌보아 주도록 말했다. 그 대가로 스핑크스는 토트모스 4세에게 파라오의 지위를 약속했다. 토트모스 4세는 후에 자신의 꿈과 꿈이 성취된 것을 기념하여 신에게 경배하는 자신의 모습을 석판에 새겨 스핑크스의 가슴팍에 남겼다. 기원전 2620년전의 일이다. 토트모스 4세는 꿈으로 인해 가슴속에 파라오가 되겠다는 데몬(demon)을 품고 살았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마음에 데몬(demon)이 있어서 자신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못하도록 감시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데몬(demon)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에서 다이몬은 신에 가까운 존재 또는 신과 인간과의 중간적 존재를 의미하였다. 이것이 나중에는 인간의 수호령(守護靈)으로서 능력이나 성격 등 인간의 신들린 상태 또는 부분을 나타내는 데 쓰였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악령 ·악마 또는 이교(異敎)의 신을 가리키게 되었고, 근세에 와서는 인간의 심리적인 힘, 즉 자기가 지배할 수 없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상한 행동을 하게 하는 무의식적이고 어쩔 수 없는 심리적인 힘을 데모니셰(dämonische)라고 표현하였다.

 

데몬(demon)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공적인 사업의 성취동기를 갖는다.  토트모스 4세와 소크라테스는 내가 생각컨데 데몬에 사로잡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공적인 꿈의 실현에 나섰다. 한 사람은 파라오가 되기 위한 영토전쟁에 또 한사람은 진리의 전파와 신념의 수호에 목숨을 바친다. 인간의 데몬(demon)은 선과 악 어느 쪽으로도 표현되는 인간의 비밀한 정신을 가르킨다. 괴테는 천재의 특징으로 이 힘을 중시하고 창작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위대한 성취동기는 아니었으나 나는 어릴 적 대흥동 우리 집 옆 이웃이던 ‘도지사관사’를 보고 도지사 같은 신분이 높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도지사관사는 일제 시대에 지은 집이다. 일본식과 서양식이 가미된 집은 동화책에 나오는 성(城)처럼 보였다. 집의 정원이 굉장히 넓고 이상한 나무들이 있어서 나에게는 별천지였다. 담장이 높아서 어른도 안을 볼 수 없었는데 나는 골목에서 놀다가 후문의 작은 문틈으로 간신히 안을 보곤 했다. 이 문틈은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거울이었다. 이 문틈으로 나는 상상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진기한 나무들이 있고 유리창이 거울처럼 빛나는 집이 서 있었다

  배 안의 창자들이 피땀을 흘리면서 전생의 기억들을 불러왔다

  도지사관사는 시간의 침묵아래 용궁처럼 서 있었다

  나는 골목길로 난 후문에서 구슬과 딱지치기에 팔린 아이였으나

  큰 세계가 메두사의 눈으로 내 현재를 노려보았던 그 날까지

  어둠 속의 비밀 문을 보지 못한 장님이었다

 

  가시철망의 담 속에서 침묵이 말을 건넸다

  심장의 거울 밖에서 거울 안의 나를 보아라

  너는 고아처럼 길을 잃었구나

 

  권력의 힘은 번개처럼 얼굴을 드러냈다

  붉은 벽돌집을 비단휘장으로 감싼 황혼이 구미호꼬리처럼 드리워졌다

  도지사관사는 야수가 있는 크레타왕궁처럼 황금냄새로 물들었다

  마술사가 허공에서 장미꽃을 뽑아 보여주는 순간이었으나,

 

  나는 어른이 되어 베르사이유 궁전의 검은 대리석을 보고 알았다

  황금과 은박으로 장식한 현실의 집들은 아름답지가 않았다

  그 때 나를 들어 올렸던 괴물의 불꽃 눈은 금단의 마약이었고

  화룡점정의 순간이 지나간 내 일생은 힘이 빠져나간 허수아비였다

  꿈속에서는 어둠속에 단풍나무가 불타는 황금 길이 계속 나타났다

  나는 이정표도 없이 옛날의 도지사관사를 찾아가는 고아였다     

 

ㅡ「가시 철망이 있는 높은 담」

 

 

내 안의 데몬(demon)이란 내가 남과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성인이 되어서 본 세상현실의 집은 아름답지가 않았다. 이런 이유인지 나는 어린 시절의 집으로 돌아가는 꿈을 지금까지 꾼다, 무의식안의 유토피아(utopia)환상이 내 안의 다른 데몬이다. 도지사와 시장은 당시에 집차를 타고 다녔던 것 같다. 운전수와 비서가 호위하는 출근 모습을 보며 나는 권력에 대한 동경이 타올랐다.

 

이런 내 환상에 부채질을 한 사건이 초등학교 오학년 때 일어났다. 시청부지 내 건물인 시립도서관은 우리 집에서 오백미터거리에 있었다. 도보로 십분 이면 갈 수 있었기에 나는 방과 후에 가끔 이용했다. 시청의 현관 앞을 지나다가 나는 시장이 수행원을 거느리고 현관을 나오는 모습을 구경했다.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당시 시장은 차를 타려다가 나를 물끄러미 한참 쳐다보더니 손짓으로 불렀다. 가슴을 새처럼 두근거리며 나는 대전시의 최고 권력자 앞에 섰다. 그 때의 사건과 감정을 담아 쓴 시가 다음 작품이다.

 

 

나는 시간의 웅덩이에서 올챙이 헤엄을 치는 책가방을 든 오학년이었고 당신은 시청현관에서 지프차에 타려는 황금개구리 눈을 가진 시장이었다 내 눈과 당신의 눈이 세세년년의 놀이에 빠진 스승과 제자처럼 서로를 보았다 네 아버지가 시청에 다니시니?

아니요, 시립도서관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그래, 네 아버지께 훌륭한 아들을 두었다고 대전시장님이 말씀하더라고 전해라 내 마음은 근두운을 탄 손오공처럼 절벽너머 노을구름으로 넘어갔고 당신은 어둠을 미간에 빨아들인 붕새처럼 웃으며 천년하늘로 날아갔다

 

시장은 예언은 그 때부터 내 심장에 불길을 보내는 데몬으로 변했다

훌륭함이란 지식이 먼지로 스러지는 도서관의 서가에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휼륭함이란 철제대문과 정원이 있는 시장의 관사에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예언을 이루기 위해 신념의 뒷골목을 비밀수사관처럼 배회하였으며 세계운동과 인과의 황금열쇠를 찾아 꼬리를 자르고 개구리의 세계로 나갔다 큰 바위얼굴의 생애나 위인들의 일생이 개구리의 도약을 재촉했다 예언의 퍼즐을 풀지 못하고 나는 대학졸업을 하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했다

 

나는 숫자의 고해에서 기호의 미궁에 빠져 직장가방을 든 오십이었고

당신은 이장하는 아버지무덤에서 흰 이빨로 웃고있는 죽음의 얼굴이었다 내 눈과 당신의 눈이 천년 전 우물과 하늘처럼 서로를 노려보았다

너 훌륭한 사람이 되었니? 아니요, 아직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 네 마음속의 예언에 사는 시장님에게 내가 지켜보고 있다고 전해라 내 운명은 미래가 블랙홀처럼 어두워진 세기말의 아마겟돈 속에 있었고  당신은 이무기처럼 웃으며 명왕暝王이 사는 궁전에 만년 잠을 자러 내려갔다    

 

 ㅡ「데몬 이야기」전문

  

내가 다니던 대흥초등학교는 대전 시내에서 부자집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명문이던 대전 중학교 합격률이 제일 높았다. 대전 유지의 자녀들이 편입을 왔고 치맛바람은 거셌다. 대전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초등 육학년 때 나는 매일 시험답안의 틀린 숫자만큼 매를 맞으며 공부했다. 대전 중학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대전고등학교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수업프로그램은 모두 입시위주였다. 대전고등학교에 입학했더니 교장으로부터 매주 월요일 훈화조회를 1시간씩이나 받아야 했다. 주제는 너희들은 모두 엘리트집단이니 입신양명해서 사회와 나라에 공헌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말은 그럴 듯 했으나 출세하고 돈 벌라는 얘기로 들었다. 도내 최고의 선생님들이 동원되었고 부모들이 따로 내는 기성회비와 찬조금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외적인 분위기의 한 편에 나는 도지사관사를 보면서 자란 내 잠재의식안의 소망이 있었다. 나는 넓고 화려한 집에 사는 내 마음속의 성주(城主)/괴물을 꿈꾸었다.

 

인간은 언어와 교육을 통해 사회의 법과 윤리 가치관을 받아들이면서 그 문화권의 상징질서에 편입된다. 상징질서내의 그는 사회가 강제하는 직업과 역할을 페르소나(personna)로 받아들여 직장에 나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시민이 된다. 자본사회는 입신양명을 통해 출세와 돈을 벌도록 장려한다. 상징질서의 사회에서 소비하는 인간의 욕망이 상품과 광고에 유혹당하고 자본의 꿈에 잠긴다. 발터 벤야민은 이런 현실을 ‘아케이드(arcade, 상가밀집지구)’라고 명칭했다. 문화는 꿈(욕망)의 전망이 만들어 낸 ‘전시물’이라는 정의이다.

 

입신양명을 하겠다는 어릴 적 내 꿈은 문화사회적 산물인 페르소나(persona)의 꿈이다.  그러나 시에서 보다시피 내 꿈의 내면은 욕망/상징으로서의 기호들로 가득 차 있다. 시안의 상징질서 안에 상상계의 욕망이 들어오고 신화적 이미지의 내면에는 실재계의 변형된 목소리도 들어와 있다. 내가 현실에서 출세한 인간대신 시인이 된 이유를 가끔 생각해본다. 내 시 안에 있는 타자의 목소리가 다른 명령을 한 것 같다. 토트모스의 꿈과 같은 스핑크스의 목소리가 내 외면의 욕구를 눌러 이겼다.    

 

꿈은 유혹이고 인간을 욕망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한다. 꿈은 현실에서 얻지 못한 대상의 대리만족이다. 그래서 발터 벤야민은 꿈을 욕망/상징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해석이란 꿈에 잠기는 것이 아닌 의식의 각성으로 꿈을 바라보는 일이다. 시란 욕망의 꿈꾸기이지만 동시에 의식의 각성으로 거리를 두고 꿈을 바라보는 일이다.

 

내 안의 데몬(demon)을 나는 밤에 꾸는 꿈과 현실에서의 백일몽과 또는 내가 시를 쓰는 순간의 환상공간에서 만난다. 내 안의 데몬(demon)이 말한다. “심장의 거울 밖에서 거울 안의 나를 보아라/ 너는 고아처럼 길을 잃었구나.” 나는 ‘길’을 찾아 먼 길을 가는 중이고 지금은 시가 그 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어느 날  데몬(demon)이 다른 ‘길’을 보여주면 나는 보르헤스가 만났던 ‘시간이 두 갈래로 갈라진 지점’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2. 놀이하는 공간으로서의 《시와 표현》

 

 

우리 시대 

 

우리사회는 스마트폰과 태블릿 PC가 인식과 문화의 틀을 바꾸는 새로운 정보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21세기에 사는 저희들은 ‘언제 어디서나 어디로든지’ 인터넷을 통해 인공뇌에 가까운 슈퍼컴퓨터와 분산데이터 베이스인 클라우딩(clouding)컴퓨터의 자료를 이용합니다. 인간은 도구와 조응해서 세계를 경작(culture)하는 문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돌도끼와 뼈화살이 수렵사회를, 수레바퀴와 괭이가 농경사회를, 증기기관과 전기가 산업사회를, 컴퓨터와 소프프웨어가 정보화사회를 창조했습니다.

 

도구와 기술이 인간의 정신과 하나가 되면서 인간의 인식은 지평을 확대하고 차원을 깊이하고 있습니다. 망원경과 현미경으로 대표되는 감각의 확장은 인간이 모바일 기기들을 통해 시공간의 제약이 없이 네트워킹에 접속하는 순간까지 이르렀습니다. 가상현실의 한 복판에 있는 저희는 밤에는 꿈에, 낮에는 텔레비전과 컴퓨터의 프로그램에, 혼자 있을 때는 욕망과 환상이 지배하는 백일몽에 거주합니다. 실제와 가상세계의 경계가 없어지면서 현대시민은 가상이 실제보다 더 현실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도구  

 

언어는 인간이 가진 도구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모델을 세워왔습니다. 문자와 회화와 음악은 컴퓨터와 결합해서 멀티웨어(multiware)의 인식과 문화 환경을 창조합니다. 저희들은 기술이 도구를 넘어 인간정신의 일부처럼 되는 세상에 와 있습니다. 1초에 1조번의 연산이 행해지는 테라플롭머신(teraflop machine)이 등장하는 날 인간정신은 감각과 사고의 혁신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기계의 능력과 결합한 통합언어는 새로운 인지기술환경을 만들어내고 문화예술은 역사에서 보듯이 새로운 패러다임과 양식을 시대에 표현할 것입니다.

 

환경이 변해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명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부시맨이 월가의 전문직과 마음과 행동이 같지 않듯 과거의 농경인과 현대인의 마음은 매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작품은 인간의 마음을 영혼의 수준까지 직접 들여다볼 수 있는 표현물입니다. 고대예술품과 현대예술품의 주제와 양식이 다른 것은 문화환경에 반응한 인간의 마음과 기호가 달라진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시대에 걸쳐 크게 변하지 않는 인간의 성(性)과 죽음에 대한 주제와 관심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의 예술은 주제도 다양해지고 매체와 형식의 표현혁명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표현주의

 

시와 예술작품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표현주의 입장에서는 작가 내면의 혼을 주관적 표현하는 ‘감정표출’의 예술입니다. 독일에서 표현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칸딘스키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작가의 내적필연에서 일어나는 정신성.환상성을 주장하였습니다.

 

작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성(精神性)과 환상성(幻像性)이란 무엇일까요. 뇌 과학의 입장에서는 외부세계를 해석하기위한 ‘시뮬레이션’입니다. 인간이 환경 내 개체로 생존 하도록 자연은 뇌에 ‘자아’의식을 갖는 정신을 설계했습니다. 개개인의 자아는 외부세계를 해석하고 의지와 욕망을 세계에 투사합니다. 정신성이란 그러므로 세계를 해석하는 뇌의 프로그램과 모델이며 환상성란 인간이 욕망을 덧씌운 내면세계의 그림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회집단의 커뮤니케이션과 관계이론, 문화인류학적인 해석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저희는 사유와 감정의 표현이 없이는 현실생활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생활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화예술은 인간 삶의 질을 확장하고 심미적 부가가치를 높이는 고급수단입니다. 근래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중심으로 문화의 상대성이 득세하면서 고급예술은 새로움을 기치로 걸고 보편가치에서 특수상황의 표현으로 이동한 것 같습니다. 고급예술은 난해함과 추함과 충격적인 주제가 반영된 새로운 엘리트예술이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과거의 부르조아 예술품들이 대량매체를 통해 일반대중이 구매할 수 있는 시대가 되자 스스로 차별전략을 세운 현대예술가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심미(審美)의 기준을 바꾸고자 한 것입니다.

 

 

시의 위치

 

시는 고급예술의 영역에 있습니다. 문화가 대중화되면서 시는 ‘시의 위의(威儀)’를 내세우며 전위적으로 자신을 차별화했습니다. 시의 주제는 다변화되고 형식과 스타일은 ‘낯설게 하기’를 반복하면서 시의 범위를 확장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시단은 스스로 고사(高士)임을 자처하는 시인들이 모여 있는 ‘엘리트집단’이 되어있습니다. 시 잡지들이 전위적 담론과 예술품들을 생산하지만 대중들은 레저차를 타고 지나가는 관광객처럼 시집과 시 잡지를 쳐다보지 않습니다.

 

시가 문화소비자들의 구매충동을 상실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보편다원주의 개념을 받아들여 문화 복제자인 시가 자연(문화)선택의 경쟁에서 멸종하는 중이라고 진단합니다. 문화 환경이 극심하게 변하는데도 서정시는 농경시대의 형식과 산업사회의 모더니즘에 갇혀있고 아방가르드는 특수한 지형으로의 도피를 선택한 후 폐쇄집단처럼 스스로 고립하고 있습니다. 시가 스스로 환경에 적응(변화)하지 않으면 시의 미래는 매우 불안합니다.

 

 

문화와 예술의 진화

 

토인비는 인류의 30가지 중요문명이 자체발전동력과 환경과의 상호투쟁으로 번성하고 쇠멸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어는 더 심각해서 현대의 생존 언어는 멸종언어의 수많은 희생위에 이루어졌다고 언어고고학자들은 말합니다. 시는 문화전달자인 언어가 멸종하면 존립기반인 육체가 사라지므로 저는 시인들의 일반기대와는 달리 시형식의 영원성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의 원형심상인 포에지(poesie)는 형식을 바꾸어서 다른 형태의 언어로 살아남으리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마음에 뿌리깊이 내려있는 시적인식과 사유는 세계에 대한 심미(審美)와 해석의 확장을 보여주는 형식으로 인간의 꿈과 욕망에 관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다윈주의 입장에서는 예술이 기술이나 도구처럼 모방의 강력한 영향아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예술은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예술형식자체의 모방으로 인간의 문화에서 스스로 번식한다고 생각하는 진단이 생겼습니다. 새로운 예술표현이 시대환경의 압력과 적응에서 수정과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또한 예술주체는 인간정신이 아니라 문화의 다양성과 복잡성속에서 살아남는 문화적 '밈(meme)'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문화와 예술이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위한 일방적 도구라는 주장을 뒤엎는 주장이어서 흥미롭습니다.

 

 

표현의 진화

 

‘자연에는 진보가 없다’는 과학자들의 생각이 있습니다. 서구종교와 역사의 해석과는 달리 이 세계는 ‘스스로 그러할 뿐’ 목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의 직관에 반하는 내용이어서 인문주의자들의 반발이 있습니다만 과학데이터의 일반증거로만 본다면 그렇게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현상은 아메바에서부터 인간까지 다양성과 복잡성이 증가하는 쪽으로 진화했습니다. 문자 발명 후 시작된 문화폭발 이후 인간의 문화도 다양함과 복잡성이 증가하는 쪽으로 변해왔습니다. 산업사회이후 가속도가 붙은 문명은 지금은 약 2년간을 주기로 기술 환경을 업그레드하는 슈퍼 변화시대가 되었습니다. ‘수레바퀴’가 농경시대를, ‘증기기관’이 산업사회를 초래한 실례를 생각하면 지금의 기술문화혁명은 어떤 사회를 초래할지 가늠이 어렵습니다. 생명과 문화가 왜 이토록 복잡성을 향해 가는지 여러 연구와 해석이 필요한 주제입니다.

 

예술과 시도 복잡성을 향해 가는 것 같습니다. 멀티미디어와 결합한 영상은 강력한 정보력을 제공합니다. 시인자신도 시보다는 영화를 더 즐기고 사람이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의 시와 소설이 시대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한 이유는 정보력에서 뒤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문학과 시도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와 표현

 

2000년대에 들어서 한국문학계에 많은 시 잡지들이 창간되었습니다. 곧 도태하리라는 일반예측과는 달리 일부를 제외하고는 기이하게도 모두 생존하고 있습니다. 생산자가 소비자인 '프로슈머(prosumer)'의 시대가 만들어낸 시장 환경 때문입니다. 시인 2만 명 시대는 문학 잡지의 양산을 가져왔지만 상대적으로 고급지면은 많지 않습니다. 여러 현실을 감안해서 창간하는 《시와 표현》은 새로운 문화전달자로서의 역할을 조심스럽게 추구하고자 합니다.  《시와 표현》은 당장은 지금의 문학 환경에 다양성을 하나 더 추가하는 형태가 될 것이지만 시대변화와 예술진화에 민감한 잡지이고자 합니다. 문화복제자인 시가 다양한 형태의 하나로 저희 《시와 표현》에서 살아남기를 기대합니다.  

 

이 세계가 ‘시바(shiva)신의 유희'라는 인도인들의 생각이 있습니다. 철학과 현실의 관점은 다르겠지만 예술은 인간문화의 생산물이며 동시에 소비하는 정신문화의 ’유희‘로 저는 보고자 합니다. 하위징아는 호모루덴스(homo ludens)의 개념을 세워 인간문화를 ‘유희’의 하부구조로 보기도 합니다. 생산자가 소비자인 프로슈머(prosumer)의 상황에서는 이윤 동기는 희박해집니다. 《시와 표현》은 자본논리를 떠나 시인들과 문학가들이 놀이하는 공간으로 자리하고 싶습니다.  

 

 

 

3. 시적환상과 표현의 불꽃

 

 

시인의 환상

 

이 주제에서 제가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은 ‘시적환상과 표현’이 왜 시인들에게 일어나며 인간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입니다. 환상(幻想)을 한자의 뜻으로 이해하면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을 의미합니다. 영어에는 Illusion과 Fantasy가 있는데  Illusion은 착각과 환각을 의미해서 한자와 유사한 뜻을 보여줍니다. Fantasy는 공상,환상으로 번역하지만 현실의 연장(延長)이나 혹은 현실과의 대조(對照)의미로 사용하면서 가능성의 세계를 더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시적환상이란 그러므로 Poetic Fantasy의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럼 일반환상과 시적환상은 어떻게 다를까요. 환상은 정신분석학에서는 무의식의 자기표현이라고 이해합니다. 세계에 대한 개인의 욕망이 있는데 의식은 현실의 눈치를 보기에 욕망을 억압합니다. 그러나 무의식은 현실을 염두에 두지 않기에 ‘쾌락으로서의 욕망’을 세계에 투사합니다. 환상의 내용은 무의식의 욕망이지만 형식은 꿈이나 백일몽입니다. 꿈과 백일몽은 개인이 욕망하는 세계로서의 투사(投射, projection)입니다. 일반인에게도 꿈과 백일몽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일반인이나 정신분열자의 환상을 예술로 말하지 않듯 시적환상은 그 내용이 다른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시적환상을 시인(예술가)이 독자에게 심미의 기쁨과 새로운 인식의 상처를 줄 수 있는 고급환상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욕망과 진실

 

피카소는 '예술은 진실을 드러내는 거짓말’이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유사한 명제로 요즘 유안진 시인은 ‘거짓말로 참말하기’라는 시인의 시작태도를 말합니다. 이 때의 ‘진실’과 ‘참’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플라톤의 미메시스( mīmēsis)는 현실과 자연의 모방을 말했던 재현미학이지요. 플라톤은 현실과 자연을 이데아(Idea)의 모방으로 생각했으니 예술의 ‘진리’란 모방의 모방이긴 하지만 이데아(Idea)를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유럽의 중세미학은 성자 아우구스티누스가 기준을 세웠습니다. 교회건축과 종교화의 아름다움은 ‘통일성, 수, 비례’로 드러난 전체와의 조화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피타고라스의 생각을 받아들여 신이 천지창조에서 사용한 ‘수(數)’가 ‘존재’와 ‘미’의 근본원리라고 말했습니다. 사물의 다양함과 이질성은 질서에 의해 통일성과 아름다움을 획득하는데 이상적질서와 통일은 인간의 인식밖에 있는 ‘신의 마음’에 있으므로 ‘신의 계시’가 그에게는 예술의 궁극적 진실이었습니다.

 

현대는 르네상스의 주체를 해체하고 인간의 ‘욕망’을 예술창작의 근거로 내세웁니다. 신을 부정하고 역사를 해체하면서 니체는 ‘진리란 하도 써서 무늬가 다 지워진 동전처럼 관습의 산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니체는 객관적 ‘진리’나 ‘참’을 부정하고 문화를 인간의지와 욕망의 표현으로 보았습니다. 니체는 또한 예술적 가상을 ‘삶의 거짓으로 변주하면서 한바탕 놀아보려는 것’으로 간주해서 예술의 ‘거짓말’은 진리와 허위를 초월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라깡의 ‘욕망이론’에 의하면 ‘대상이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조금씩 그 가치를 상승시키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욕망에 의해 실체처럼 보였으나 베일이 걷히면 사막의 신기루처럼 허상인 대상(對象)때문에 욕망은 남고 삶은 이어집니다. 예술가는 대상〔세계〕을 아름다운 실체로 보고자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도공이 판매를 위한 도자기를 구우면 ‘찻잔과 물병’이지만 자신의 환상을 투사하면 ‘예술작품’이 됩니다.  관객(구매자)의 욕망에 의해서도 ‘막사발’은 고가의 예술작품으로 변신합니다.

 

저는 근대와 현대의 예술관을 받아들여 예술은 욕망과 미적환상의 심리적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연극 속에 작가는 알레고리와 주제를 넣어 이야기를 완성합니다.  

 

 

무의식과 환상

 

저는 시인들의 환상이 무의식의 욕망에서 발생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환상은 ‘무엇’을 지향할까요. 환상이 현실에서 얻지 못하는 ‘유토피아’와 ‘불가능한 세계’를 혹은 플라톤주의자들처럼 ‘이데아’를 지향한다고 말하면 낭만주의예술관이 됩니다.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작품을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보고 현실을 ‘초월’하려고 했습니다. 시인들이 드러내는 ‘환상의 본질’은 여기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환상이란 진화론주의자처럼 세계를 주체의 의식(무의식과 욕망까지 포함한 의식)에 끌어들여 더 넓은 시야와 전망을 확보하기 위한 시뮬레이션(Simulation)일까요. 해석과 상관없이 인간의 마음에는 ‘환상’이 존재합니다.

 

크레치머(Ernst Kretschmer)는 인간의 성격을 분열기질과 조울기질로 분류했습니다. 크레치머는 천재들과 예술가들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선 정신력을 보여주며 큰 표현을 작품에 드러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신병리의 경계에 선 사람들은 과도한 환상(꿈)을 갖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꿈의 크기’라 부르는 이 환상을 ‘현실내의 꿈’으로 콘트롤하는 사람이 역사적으로 위업을 남깁니다. 그러나 이 환상이 현실의 경계선을 넘어가 정신병으로 발전한 예술가들의 경우도 많습니다.

 

 

환상의 불꽃과 표현

 

프로이트는 꿈(환상)을 은유와 환유로 생각했습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현실이 억압한 욕망은 무의식의 수면아래 이무기처럼 살아 있다가 의식의 덮개가 헐거워진 순간 꿈(백일몽)으로 나타납니다. 꿈은 의식의 검열을 피해 변형의 얼굴로 나타납니다. 정신분석용어로는 압축과 전치, 문학비평용어로는 은유와 환유입니다. 무의식은 ‘시의 언어’로 옷을 입고 의식의 세계로 진입합니다. 이무기가 용의 모습으로 변환해서 하늘시간(의식의 시간)을 날아다니고 주목을 받지 못하던 ‘신데렐라’가 궁정의 사교계에 데뷔한 것과 같습니다. 저는 이러한 욕망과 환상의 연금술이 시인들이 내면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환상은 시적표현을 얻으면서 어둠에서 빛을 발하는 촛불이 됩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형식과 아름다움으로 욕망(진리)를 드러내지요. 벤야민은 그의 비평이론에서 예술작품의 미학을 위해 아름다움이라는 ‘베일’을 그대로 둘 것을 요청했습니다. 벤야민의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우리가 구성중에 있는 예술작품을 타오르는 장례식의 장작더미에 비길 수 있다면, 주석가는 화학자처럼 그 불꽃을 감상할 것이고 비판가는 연금술사처럼 그 것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전자가 분석의 대가로 타버린 목재와 재만 남기는 꼴이라면 후자는 불꽃자체를 신비스러운 것으로 보존하는 꼴이다. 바로 그것만이 살아 생동하는 무엇이라고 주장을 한다는 뜻이다.

 

무의식과 심층의식아래 있는 생의 욕망은 사실상 충분히 그려내기가 어려운 실체입니다. 칼융의 생각대로 무의식이 현실시간을 초월해 있는 ‘집단무의식’인 ‘원형

(Arechetype)’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시인들은 이 알 수 없는 ‘심적 에네르기’를 ‘환상의 힘’으로 느끼고 아는 사람입니다. 시인들은 자신이 본 환상을 ‘파트모스 섬의 요한’처럼 기록하는 사람이지요. 그리고 기록으로서의 자신의 ‘시적 표현’이 오랜 시간 동안 타오를 것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김백겸(시인. 웹진 시인광장 主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