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의 작품

침묵을 타고 오는 손님 외 2편

미송 2011. 8. 12. 08:32

1

침묵을 타고 오는 손님

 

육십 후반 노인 3명이 모여앉아 한담을 나누다가 그 중의 모자를 쓴 노인이 왈, “나는 어디가도 이제 육십이나 되었냐고 사람들이 젊게 보는데, 자네들은 그 나이가 다 들어 뵈네.” 불쑥 쳐들어온 공격에 나머지 두 노인이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를 몰라 눈만 꺼벙한데, 내가 옆에서 보기에는 다 그 주름이 그 주름이라 누가 더 젊고 늙고 가름하기가 힘들다. 늙음은 이런 손가락질 틈으로 온다. 같은 또래의 옆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녀석은 왜 저렇게 늙어 뵈는 거야? 그런 말이 튀어나오면 이미 늙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또 말로도 늙음은 온다. 갈수록 말이 많아지거나 반대로 말이 없어져도 늙음의 문턱에 들어선 것이다.

나는 이제 육십에 접어들었지만 경로당엔 어림도 없다. 그곳에서 나는 소년이다. 그렇다고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도 어렵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강이 이미 놓여 있다. 점점 내 말수가 줄어들 수밖에.

 

텔레비전 인터넷 핸드폰 스마트폰, 어떤 때 나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려는 이런 문명기기 앞에서 절망한다. 거실에 들어서면 텔레비전이 주인노릇하고 방에 들어가면 인터넷이 집요하게 유혹하고 누구라도 호젓하게 만나서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누구의 주머니에서랄 것도 없이 벨소리가 울린다. 커피숍에 들어서면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 위로 손가락을 찍찍 그어대며 머리를 처박는 진풍경이다. 이러니 편하게 이야기할 상대가 없다. 물론 나도 그런 문명기기를 이용해서 전파라도 날릴 수 있지만,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인간 냄새를 맡으며 상대의 호흡과 기분을 생생하게 느껴가면서 대화하는 시대가 그립다. 이런 생각은 내가 봐도 구태의연하다. 나는 먼 석기시대의 크로마뇽인처럼 최후의 아날로그인이라는 생각이다. 말수가 더욱 줄어든다.

 

집안에서 텔레비전을 치워버린 지 몇 년이 지났다. 이유는 연속극에서 내지르는 목청 때문이었다. 졸음에라도 빠져 꾸벅거리다가 별안간 귀청을 찢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에 놀라서 깨고, 부스스한 눈으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곳에서는 여지없이 여자들이 소리소리 지르면서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아니, 저 미친것들이 남의 집 안방에 들어와서 뭣들 하는 거야?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현대인이라면 꼭 봐야 할 것도 같은 밤9시 뉴스는 염장을 퍽퍽 질러대기 일쑤였다. 뉴스를 보다보면 어느 새 나는 혼자 중얼중얼 누구에겐가 욕을 해대고 있었다. 좋아하던 야구경기는 누가 몇 번을 이기고 누가 이번 시즌에서 승자가 될 것 같고, 어느 선수가 결혼하고 누구와 스캔들이 있고 등등, 쓸데없는 지식만 잔뜩 머릿속에 쌓아놓았다. 최소한도 야구계에 연줄을 대고 먹고 살 일이 없는 나에게는 말이다. 텔레비전을 치우니 밤 시간이 깔끔했다. 책을 보고 글도 쓰고 졸다가 맨바닥에서 그냥 잠들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심심해 할 줄도 알게 됨으로써 비로소 내 시간을 내 멋대로 쓰게 되었다. 그러나 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온통 텔레비전 이야기들뿐이었다. 어제 연속극이 어떻게 끝나고, 뉴스에 뭐가 나오고, 건강교실에서 의학박사가 말하기를 뭐를 먹으면 어떻고, 가수 누구가, 탤런트 누구가, 요즈음 유행하는 노래 뭐가, 등등. 한 가지 소리만 나는 숲에 다른 새의 울음소리는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참 희한한 노인네였다. 70이 넘었다고 스스로 밝힌 사람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면서 온갖 잡일에 간섭하고 아는 체하고 약간은 화가 난 듯이 훈계도 하고, 그러다가 누가 콱 내지르기라도 하면 우악 몇 마디 같이 갈기고는 며칠 나타나지 않다가 또 살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 왜 저렇게 나서기를 좋아할까 식상하다가도 가끔은 오랜만에 나타나는 노인이 반갑기도 했다. 살아있다는 말이다. 저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영영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좀 허망하게 느껴졌다. 앞면만의 잔치일 뿐, 뒷장은 잊혀져가는 책, 내 글은 며칠 내로 뒷면의 무덤에 묻힐 것이다. 글 쓰는 일도 재미가 없어졌다.

 

이래저래 입 다물고 글도 귀찮아하며 지낼 판에, 인생 100세 시대라고 한다. 앞으로 40년은 더 살아야 한다. 희극인지 비극인지 아리송하다. 옛날 크레타 섬에 아폴론신을 모시는 여사제가 있었다. 젊고 예쁜 여사제는 아폴론에게 천년을 살게 해 달라고 매일 빌었다. 정성에 감동한 아폴론은 천년이라는 수명을 여사제에게 내렸다. 그리고 몇 십 년 후, 여사제는 얼른 자기를 죽여 달라고 울면서 신전에 매달렸다. 수명을 늘려 달라고 빌 때에 여사제는 깜빡 자기의 젊음과 아름다움도 함께 연장시켜달라는 부탁을 까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폴론은 한 번 내린 약속을 취소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아찔한 이야기다. 내가 겨우겨우 백 살이 될 즈음에 혹시 약이 좋아지고 수명이 늘어나 120세 시대가 도래 할 지도 모른다. 나는 말을 잃는다.

 

단순한 내 생활이지만 성가신 말을 꼭 해야 할 때가 있다. 가끔 원두커피를 마시러 숍에 갔을 때인데, 이십세 초반으로 뵈는 종업원이 말끔한 목소리로 나를 몰아간다. 원두요? 네. 뜨거운 커피로요? 네. 맛은 강하게요? 네. 삼천 오백원입니다. 네. 현금영수증 필요하세요? 아뇨. 회원카드 있으세요? 아뇨.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네. 이렇게 예스나 노냐의 객관식문제를 풀면서 방어를 하듯이 말을 하고 나면, 정확히 표현하자면 미리 계산되고 강요된 대답을 어쩔 수 없이 하고 난 후, 커피를 가지고 테이블에 앉으면 나는 커피마시는 기계가 돼버린 것이다. 이때만큼은 대단한 언어의 모욕감을 느꼈다. 마치 내가 예스냐 노냐의 칼날에 두 동강이 난 기분이었다.

 

몇 번 그런 수모를 겪은 후 나는 날아올 종업원의 질문을 먼저 토해내며, 커피는 원두, 뜨거운 것으로, 맛은 강하게, 돈은 여기 있고, 현금영수증은 필요 없고, 회원카드는 없고, 그러면 친절의 가면을 뒤집어쓴 얼굴 뒤로 그가 숨겼던 본래의 표정이 미소와 함께 떠오른다. 비로소 나는 대화를 나눈 것이다. 진솔한 표정과 함께 말이다. 잠시 후에는 사람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 나는 후회했다. 저기 예쁜 종업원이 나를 잔소리가 많거나 까다로운 중늙은이랄까, 하여튼 그런 인상을 받았을 것만 같았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도 네, 아니요, 하며 군말 없이 커피숍을 이용하는데 말이다. 사실 여기까지 염려가 진행된다면 거의 히스테리에 가깝다. 그래서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역시 입 다무는 게 수다.

 

언제까지 입 다물고 살아야 하나. 알렉산더는 인도의 현자에게 사람은 언제까지 살아야 하냐고 물었다. 현자는 대답했다.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낫다고 여기지 않을 때까지요.”

그렇다면 나는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 죽는 게 낫지 이렇게 살 바에야 얼른 저승으로 가는 게 낫지 하며 살아온 날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생각이 후딱 바뀌어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고, 살만 해서도 그렇고, 살아봐야겠다는 의지가 발동해서도 그렇고, 햇볕을 정겨워 할 때가 기막히게도 죽을 때인 것이다. 사람에게는 뭐 하나 제대로 규격을 맞춰 되는 일이 없다. 젊었을 때는 돈이 없고 돈을 벌 때는 시간이 없고 돈과 시간을 다 갖추고 보니 이제는 힘이 떨어졌다나,

여러 가지가 내 입을 막아간다. 이렇게 늙음이라는 손님은 침묵을 타고 오는 모양이다.

 

2011. 유월 중순 / 이 정문

 

 

 

2

가을마빡

 

내가 이십 대 때 K라는 퍽이나 낭만적인 친구가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실연당한 사람처럼 질척질척 비를 맞고 다니거나 홀로 산 속을 배회하거나 친구들과 함께 놀러갔을 때에는 고매한 철학자마냥 근엄한 표정으로 따로 떨어져 강변을 거닐거나, 여자 이야기만 나오면 평생을 혼자 살겠다며 호언을 놓는 그 폼이 좀 유별났기에, 친구들은 “똥폼”이라는 별명을 그에게 붙였다.

 

그런 똥폼이 어느 날부터 묘령의 여자와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여자의 얼굴도 반반했고 몸매도 나무랄 데가 없었기에 친구들은 느닷없는 똥폼의 변신에 당황도 했고 또한 부러워도 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여 저것이 다 “똥폼” 때문이라고들 했다. 즉 똥폼의 그 똥폼에 여자가 맥없이 걸려들었다는 말인데, 남녀의 만남이란 서로가 반대의 성격을 가진 경우가 많기에 여자는 똥폼의 낭만적인 행동과 멍청한 표정 그리고 현실감이 없는 언어에 매료됨직 했고 똥폼은 여자의 싹싹하고 실리적인 성격이 마음에 든 것도 같았다. 그렇게 둘은 가까워졌고 애정의 행로는 순탄했다.

 

바람에 낙엽이 조각배처럼 날리던 날, 둘은 설악산으로 가을여행을 떠났다. 이미 몸마저 허락한 사이라 여자는 이번 여행을 결혼준비로 삼아, 베갯머리송사를 벌여 그에게 결혼날짜를 받아낼 작정이었다. 내년 봄 산천에 꽃이 필 때 울리는 웨딩마치는 어떨까, 빨간 배낭 속에 이것저것을 주워 넣어 떠날 채비를 하는 여자의 손길이 사뭇 바빴다. 발길도 가벼웠다.

 

둘이서는 사방이 붉은 색으로 나부끼는 설악동 계곡을 거닐었다. 적이 낭만에 젖어든 똥폼의 표정이었다. 똥폼은 문득 팔짱을 끼고 있는 여자를 옆으로 떼어 놓더니 울퉁불퉁한 징검다리를 뚜꺽뚜꺽 건너뛰기 시작했다. 개울을 반쯤 건넜을 때 똥폼은 위태로운 돌멩이 위에서 천천히 몸을 돌려 영문도 모른 채 바라보는 여자를 지긋한 눈빛으로 굽어봤다. 또 엉뚱한 똥폼이 발동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 날, 그지없이 펄럭이고 날리는 단풍잎 속에서 일생일대의 가장 쓰라린 이별을 사랑하는 여인과 한 번 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머릿속에 사랑의 비극이라는 그림이 저절로 그려졌다. 현실과 상상이 뒤섞여 앞가림이 안 되었다. 다른 장소도 아닌 설악동 개울 한 가운데의 이 환상적인 징검다리에서 애틋하게 이별의 한을 가을처럼 토하는 내 모습이, 저 여자에게는 평생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도 역시 그럴 것이다.

 

그리하여 똥폼은 가지런히 허리에 붙었던 두 손을 약간 벌려 말 그대로 똥폼을 잡은 후, 당신과 내가 이별해야 할 이유를 주절대기 시작했다. 진정한 이별이란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의 전유물이요, 사랑하기 때문에 이별을 해야만 하는 쓰라림, 그리고 이별을 선언하는 나는 절대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요 당신이 나에게 조금도 소홀해서도 아닌, 그 무엇, 즉 알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 아닌가. 신의 질투가 아닌가. 신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하기만 한 우리들의 사랑은 정해진 운명에 패배하고 말지니, 예부터 운명에 도전하여 승리한 인간이 없었음이라. 아, 사랑하는 그대여 헤어져도 그대는 영원한 내 사랑이려니, 필멸의 인간이라도 그 사랑은 영생을 누릴 것이라...... 똥폼은 그럴듯하게 쏟아내는 자기 말에 스스로 도취되어 갔다. 마치 평양방송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표정처럼 비장했고 눈가에서는 물기마저 반짝였다.

 

그러자 이 느닷없는 말과 연출에 밀리던 여자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똥폼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옳거니, 저 여자가 내 말에 감동하여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흑흑 울겠지, 그리고 울음 섞인 목소리를 겨우 목 밖으로 끼억끼억 넘기면서, 왜 그래야만 해요? 우리는 왜 헤어져야만 하느냐는 말이에요. 아무리 운명이라도 우리 인간이 그 운명을 바꿀 수도 있지 않겠어요? 운명이란 인간이 바꾸라고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요? 똥폼씨- 제발 이별만은 말아 주세요. 사랑해요. 흑흑- 이렇게 토할 것이다. 이별 앞에 서있는 내 심정도 정말 슬프긴 슬프다. 바로 이 맛에 그토록 많은 시인들이 펜을 놓지 못하는 모양이다. 먼 훗날 나도 프랑스의 유명한 시인처럼 이별의 시를 얼마쯤이라도 쓰게 되겠구나. 아, 가련한 연인들이여. 자기가 조작한 낭만에 젖어들다 못해서 이제 백치처럼 멍한 수렁에 빠진 똥폼의 표정이었다.

 

그러나 다음 연출은 똥폼의 예상을 빗나갔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던 여자가 훌쩍 몸을 일으키더니 “지랄 떨고 있네. 주접싸지 말아 새끼야.”라는 날카로운 고성과 함께 주워들은 돌멩이를 날렸던 것이다. 그 다음 장면은 너무도 손쉬웠다. 그 주접싸는 새끼를 향해 날은 돌이 컴퓨터로 계산된 궤도를 정확하게 횡 그려 그만 똥폼의 멍청한 이마 가운데를 딱 맞추고 말았다. 아, 아, 아, 하고 영탄조를 남발하며 온갖 폼을 다 잡던 똥폼은 징검다리에서 삐끗, 그만 차가운 개울에 몸을 철벙 처박고 말았다. 슬픔에 젖어서 가지런히 벌렸던 두 팔이 안타깝게도 휘잉 허공에 저어졌다. 그리하여 마빡에서 붉은 낙엽. 단풍잎보다 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며 똥폼의 눈을 덮고 콧등을 가운데 두고 양뺨으로 흘러내려 입술을 덮고, 아이구 죽겠다 하고 얼굴을 움켜쥐었던 손을 펼치니 그곳에도 단풍잎이 붉게 붉게 가을을 흔들고.

 

그냥 죽게도 아닌, 그냥 뒈지게 내버려 두고 싶었다나. 그러나 그 동안 사귀었던 정 때문에- 이것이 싹싹하며 실리적인 여자의 후렴이었다. 휴지뭉치로 똥폼의 마빡을 틀어막고 여자는 너무도 낭만적이다 못해 귀엽기만 한 그의 겨드랑이를 끌고 병원으로 달렸다. 모두 합하여 여덟 바늘. 이것이 병원이 내린 이별의 결과였다. 그 다음 해, 둘은 결혼식을 올렸다. 사회를 보는 친구가 똥폼을 우렁차게 불렀다.

“신랑, 가을마빡- 입장!”

삼십 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상상과 현실을 당돌하게 맞바꾸려던 가을마빡의 시도를 가끔 떠올린다. 그의 문학적 상상력은 소식이 끊긴지 오래다. 추석을 넘기니 바람이 차다.

 

2011. 7월 하순 / 이정문

 

 

3

살인작업

 

유난히 한숨. 내쉬기 보다는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저절로 토해졌다. 어제는 온종일 흐리면서 한때 비, 오늘은 애매모호한 새벽이 걷히면서 맑음, 현재 시각 07시 22분, 하늘은 폭염을 준비 중이다. 아니, 저러다가 검은 구름이 끼고 또 비가 쏴아- 그럴지도 모른다. 유독 비가 많이 퍼붓는 한반도의 올여름, 매스컴은 물폭탄이니 기록적인 폭우니, 백년 만에 한 번이니, 지구기상 이변이니 하굣길의 여고생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무표정이다. 조금 높은 지대에 빌붙어서 비가 오면 오고 말면 말고, 실업자의 무심과 행복-

 

지난 6월 13일, 나는 실업자를 선포했다. 언제까지? 그날부터 곡기를 끊어 굶어서 죽을 때까지라면 지금쯤 내 뼈는 산천에 날리고 있을 텐데, 아름다운 훈장-죽을 때까지 실업자로 버틴 공로가 지대하여... 아쉽게도 매일 먹고 지낸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는 아니다. 그러면 돈 떨어질 때까지? 아니다. 떨어 질만한 돈도 없다. 간단하다. 아내의 표정이 변하기 직전까지, 그만 놀았으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낼 때까지이다. 참 상식적이다. 평생 놀고먹고 지냈으면 좋겠는데 나는 너무도 평범하기에 미리 알아서 긴다.

 

시인이다. 소설가다. 수필가 내지 문학평론가다. 이것은 밖에 붙여 손님을 끌어들이는 간판이 아니다. 물론 손님이 들어올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물건만 뒤적이다 돌아선다. 주변에 몇 명의 문우들. 아내가 돈을 벌어온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경제적 무능에 물음표를 붙인다. 충실한 아내는 이를 타이른다. “아버지는 글 쓰는 사람이다.” 고개를 들어 돌아본다. 문인이라는 간판이 안방 벽에 찬란하게 또 굳건하게 붙어있다. 분위기를 파악한 문우는 그날 밤에 글을 끄적였다. 될 수 있으면 암호화된 문구를 사용했다. 나는 세상에 불필요한, 무능하기만 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최소한도 룸펜은 아니라는 실존주의적 변을 늘어놓는다.

 

08시 15분,

그림자가 대각선으로 쫙 그어져 아파트 벽에 붙었다. 불길을 이끌고 태양이 이륙했다. 조금 있으면 아내는 출근한다. 오늘 나의 일과, 쓰던 장편소설에 머리를 처박는다, 맹물처럼 커피를 들이마신다. 폭염에 눈길을 놓는다. 자료를 찾으려 책을 펼친다. 두어 번의 찬물 샤워, 강된장에 밥을 비벼 김치 한 조각 입에 넣는다, 뒤숭숭한 낮잠, 이번에는 먼젓번에 썼던 소설 한 장면을 지운다. 고맙다. 아내에게 전화 한 통화 넣어준다. 안방에 간판 붙인 사람들, 다 이렇게 사나?

 

10월 말까지다. 보너스가 하나 붙어 31일까지, 그 이후는 세상 속으로, 아니, 세상 밖이다. 세상은 오직 내 방 하나뿐, 외계인들의 별에 발을 디뎌야 한다. 이번에는 무슨 지랄을 떨까? 전에는 스포츠센터에서 시설관리라나, 그러니깐 제 몸 하나 비까번쩍, 싱싱하고 건강한 하루, 개운하고 신선한 바람, 이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틈에서 놀았다. 에그, 건강하게 콱 죽어버려라. 고장 난 헬스기계를 만지고 수영장 라커룸과 샤워실을 관리하고, 하루에도 수백 명씩 드나드는 틈새에서, 그 인간냄새에 코를 찡그리며, 낭비되는 에너지를 아까워하며, 썩어질 근력의 오만을 바라보며, 그런 어느 날부터 나는 나를 죽여야겠다는, 자살? 그것은 물리적 처방일 뿐이다. 내 의미는 정신적 사망이다.

 

시월의 마지막 밤까지 나는 죽어야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신이 죽고 몸만 살아남은, 최소한도 과부 하나를 만들지 않는, 염치를 아는 산송장. 그것을 목표로 나는 실업자를 선포한 것이다. 벌써 8월 11일. 현재 시각은 09시 03분. 촉박하다. 두 달 보름 남짓 남았다. 어느 요가단체에서 표어를 붙였다. “굽으면 죽고 펴면 산다.” 회원들은 매일 바닥에 자리를 깔고 팔다리를 쭉쭉 폈다. 허리, 목, 엉덩이 다 폈다. 눈알도 쫙 폈다. 내 표어는 반대- 굽으면 살고 펴면 죽는다.

 

실업자 시대에 모두 펴기로 했다. 다시 한 번 기억, 펴면 죽는다. 소설은 나를 사망시키기 위한 폭염열차. 독자를 위한 소설이라는 과거의 상식이 뒤집어졌다. 이제 소설은 작가를 죽이는 작업, 유서보다 치열하다. 타협 없는 절대 권력-자기에게 내리는 사망선고. 11월이면 나는 산송장으로 건들댄다. 그때 나를 채용하는 사람은, 자식-송장에게 봉급을 지불하다니. 자, 오늘도 살인작업을 시작하자. 현재 시각 09시 31분. 날짜 2011년 8월 11일.

 

 

 

호주 문협 나향 까페에 들어가 정문의 수필을 가져와 본다. 참 어지간하지 나도. 오작가님도 건강하시죠? 하는 나향의 댓글 안부가 눈에 띈다. 오작가께서는... 요즈음도 계속 시 삼매경이랄까... 남의 좋은 시를 많이 수집해서 읽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좋은 시를 많이 썼으면 좋겠습니다. J의 대꾸에 제법 아내에 대한 존경심이 깔려 있는 듯. 착각은 아니겠지. 그런 말투가 그의 자기 여자에 대한 최소한의 에티켓인 걸 알고 있으니. 그러나 다소 소외감도 느낄 것이다. 아니 아예 자포자기 했을 것이다. 저 여자는 밥짓는 일 보다 시짓는 일에 빠진 여자. 으윽 불행한 내 노년이여 이빨을 갈지 또 그 맘 물길속을 어찌 알까만. 고마운 거지 뭐, 거지들 같지만.

 

가을마빡은 오래전 읽었던 수필인데 최근 수정을 했나 부다. 아무튼, 오후에 사무실 컴으로 읽어 봐야겠다. 비 추적추적 내리는 금요일 아침이다.

 

 

소설쓰기가 장난이 아니었구나, 그렇게 말하면 정말 장난같은 말투겠지. 분명 엄살로 끝마무리를 맺는 게 아닌 J의 정체에 대해 얼만큼은 알고 있다 말하지만, 최근 흔적을 접하며 자신과의 싸움이고 운명같은 선택이니 어찌할 수 없겠지만 힘든 건 말 그대로 사망의 폭염열차를 탄 기분이겠다 짐작한다. 솔직히 짐작할 뿐이지 심정을 어떻게 백프로 체감한다 말하겠는가. 아무튼, 그의 속내를 읽는 시간이 17시 39분을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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