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의 작품

집에 돌아오니 외 2편

미송 2011. 11. 25. 16:20

 

집에 돌아오니

 

 

중국 서진시대의 반악이라는 시인은 얼굴이 잘생기고 풍채가 수려하여 역대 중국문인들 중에서 제일의 미남으로 손꼽는다. 사진은커녕 초상화 하나도 전래되지 않기에 얼마나 잘 났는지 알 수 없지만 <세설신어>라는 책의 기록에는 반악이 수레를 타고 밖을 나서면 처녀들이 손에 손을 잡고 둘러싸 앞을 가로막고, 유부녀들은 물론 노파들까지도 멀리서 과일을 던져 연모의 정을 표했으니 반악이 집에 돌아오면 수레에 과일이 하나 가득이었다나. 그것뿐인가. 아내가 일찍 죽자 반악은 뛰어난 글 솜씨와 넘치는 감성으로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노라>라는 시를 줄줄이 써내려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였으니, 내 짐작이지만 그 뒷자리를 노린 여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뤄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 아마 반악은 문밖출입도 어려웠을 것이다.

 

별안간 새콤한 자두가 먹고 싶어서 아내를 바라보니 나날이 커져만 가는 엉덩이가 만만치 않아 여간 움직이기가 쉽지 않을 듯했다. 과일이 먹고 싶네, 하고 낮은 목소리로 슬쩍 타진을 해보니 예상했던 대로 이 늦은 시간에 뭔 과일? 하는 약간 높은 톤의 대꾸라서, 바닥에 붙은 태산을 어찌 오라 가라 할 것인가, 차라리 새가 날지, 하는 심정으로 홀로 아파트를 내려와 과일가게로 휘적휘적 걷다보니, 글 써봐야 연모의 정으로 날아오는 과일은커녕 아는 체 하는 사람 하나 없어 썰렁한 밤거리다. 하기야 하루 종일 나돌아 다녀봐야 작가라고 부르는 사람 하나 없고, 졸필이지만 글을 잘 읽었다고 꾸벅하는 사람 하나 없으니, 이게 내 글재주의 전부이긴 하다.

 

지방의 소도시로 이사 온 후, 몇 년간 글을 쓰지 않고 지내다보니 내 스스로도 문인이라는 의식이 가뭇해져 어쩌다가 지방문인들을 만나면 말이 더듬댄다. 시인인가요? 대부분 그렇게 물어오는데, 나는 사실 시인이기도 하고 소설가고 평론가고 수필가고 다 해당이 된다고 남들이 말한다. 이 글 저 글 마구 써내 문예지에 올리다보니 그렇게 어중 띤 글쟁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온 대답이란, 글쎄요, 그냥 잡스런 편입니다. 그러면 상대는 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훑는데, 내가 마치 글쟁이를 사칭하고 다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유쾌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자, 보세요. 제 글이 실린 책을 다 보여드리겠습니다. 하고는 몇 십 권이나 되는 문예지를 들이댈 수도 없고, 멀뚱 눈알만 굴리다가 자리를 뜨니 그들 중에 나를 작가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다.

 

이 외로운 도시에 딱 두 명만이 나를 작가로 인정한다고나 할까, 한 명은 텔레비전에도 몇 번 출연하여 유명해진 H시인인데, 이런 밤에 찾아가면 분명 술타령하고 있을 테고, 거슴츠레한 눈빛으로 기껏 던지는 말이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가는 거지 뭐, 인생이 별건가? 그런 늙은이 같은 멘트가 싫고, 또 한 명은 일 년 내내 나보고 문학강의를 해달라고 졸라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장장 40시간은 열변을 토해 주었던 C작가인데, 홀아비였던 이 친구가 별안간 여자를 어디서 하나 데려다 놓더니, 함께 행복하게 살거라나? 그러는 바람에 신혼의 꿈이나 실컷 꾸라고 강의를 중단했는데, 아무래도 지금 찾아가면 둘만의 달콤한 시간을 깰 것만 같아 여의치가 않아, 서성이며 길거리에 선 내 꼴이 좀 그렇고 그래서 썰렁하다.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문인들도 많다는데, 역시 이것도 내 글재주의 전부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문인이란 글재주가 전부가 아닌 모양이다. 반악은 시인이었지만 빼어난 용모가 큰 몫을 해, 글보다는 “과일을 던져 수레를 채웠던’(擲果盈車)” 고사로 더 유명하다. 당시 반악과 어깨를 겨루던 장개라는 문인이 있었는데, 그의 글도 역시 출중하여 당대 태강문학의 거두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얼마나 못생기고 볼품이 없는 외모였는지, 집밖을 나서면 여자들뿐만 아니라 어린애들까지도 돌멩이를 던져서, “장개가 집으로 돌아오니 기왓장 조각이 수레에 가득이었다나”, 같은 글쟁이로서 차별이 이 정도였으니 얼마나 서러웠을까, 더구나 <세설신어>에 기록되어 역사에 남았으니 말이다. 터덜터덜 가로수 밑을 지나 아파트로 발을 옮겼다. 띵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집 앞에 섰다. 물론 누가 던져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집에 돌아오니 자두가 한 봉지였다.”

 

 

2011. 9월 하순

 

 

 

 

가을빛 시절

 

 

비가 찬 기운을 내뿜어 가을 산에 깔리면 파랗던 나무 이파리가 금방 기운을 잃는다. 사람의 용기나 마음상태도 때가 되면 한꺼번에 툭 떨어지고, 그 떨어진 상태를 유지해 가다가 다시 툭 떨어지고, 그렇게 바닥을 기는 모양이다. 이런 기분이 피부에 와 닿아 절실하면 옛날부터 일컫기를 대충 살만큼은 살아온 가을 같은 나이, 육십 고개를 넘기는 때라고나 할까, 글쎄 더 이상의 세월은 지내봐야 알겠지만, 이런 때를 선조들은 슬픔을 아는 나이라고 했다. 슬픔이야 어느 시절엔들 없었겠는가마는 달그림자 아래 드러난 가랑잎과 같은 가냘픔과 처연함, 세월만이 가져다주는 쇄락에 조망된 세상살이는 새삼 애절하기 그지없어 슬픔에도 깊이와 그 녹신녹신한 맛이 따로 있는가 보다. 그래서 나이가 듦은 더욱 슬퍼져가는 일이다. 돌아보면 찌꺼기가 쌓여있고 바라보면 망망하기 하릴없어 부자나 가난한 자나 슬픔을 알다 못해 이제 깨닫는 나이까지 달려오면, 누구의 아주 밉던 얼굴도 야릇하게 측은해지고 말 한 마디라도 한 겹 가슴을 접어, 그래, 건강하고 기죽지 말고 살아라-, 안 보이는 곳에서라도 그렇게 던지고 만다. 그래서 슬픔을 아는 나이란 누가 저절로 용서가 되는 때이기도 하다. 한 발 더 나아가 세상 모두를 용납하고 털어버릴 줄도 아는 시기인 것도 같다.

 

만약 염라대왕이 나를 굽어보며 지은 죄 대신에 세상을 살면서 내가 제일 잘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다지 자신은 없지만 머뭇머뭇 한 가지는 대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다른 죄는 비록 크더라도 나는 끝까지 미워한 사람은 없다고, 물론 순간 원망하고 미워는 했겠지만 그래도 끝까지는 아니었다고- 나는 몇몇의 얼굴을 기억한다. 내가 어리석고 무능하여 누구에게 해를 끼치기도 했겠지만 가끔 기억에 떠오르는 누구도 내 속을 많이도 태웠다. 대부분이 사업을 같이 하던 사람들이다. 늘 합법적이지만 음흉하게 뒤통수를 치고 나오는 사람, 일은 잘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배신을 일삼는 사람, 잘 웃고 다정하지만 숨 쉬는 것도 거짓처럼 보이는 사람, 쌓은 신뢰를 잔인하게 짓밟는 사람, 물론 이런 습관이 고질적으로 자리 잡은 소위 ‘핏줄이 돼지피’라서 일부러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세월은 한 점 남김이 없이 모두를 싸잡아 흘러간다. 양심이건 비양심이건 귀함이건 천함이건 삶의 끝부분은 모두를 뒤섞어 한 가지 회색의 삭아버린 빛과 결로 마무리하는 줄도 모른다. 사실 이런 생각은 적이 위로가 된다. 나를 향한 위로이기도 하지만 의식적 무의식적 나를 해쳤다고 생각되는 어떤 상대에게도 보내는 위로일 것도 같다.

 

십여 년 전 초겨울 IMF 외환위기 때, 그해 11월 초 뉴스에서 외환이 어쩌고 보유고가 저쩌고 이상한 소리가 주절대더니 눈에 띠게 돈거래가 움츠러들고 어음이나 수표까지도 수상한 기운을 품어 뻑뻑하게 돌아갔다. 대부분의 영세 자영업자들이 그랬겠지만 나도 역시 외환이라는 국제거래와 조그만 빌딩 작은 평수의 내 사업장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여 긴가민가 주춤거렸다. 새해에 접어들자 여기저기서 무너지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리기 시작했다. 은행에서 “오늘이 지급날짜지만 입금이 안 되었습니다.”라며 직원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멍한 표정으로 섰던 내게는 코앞에 닥친 부도였고, 전화를 걸면 벨소리만 저 편에서 공허하게 울려댔다. 다음날은 서랍 안에 넣어둔 어음이 백지로 화했고 화급하게 달려간 거래처 사무실은 문이 잠겨 있었다. 급한 김에 돈을 끌어 모으려 여기저기로 다이얼을 눌러댔다. 그러나 사채시장은 나보다 한 발 먼저 얼어붙어 송곳 하나 파고들 틈이 없었다. 조간신문에는 매일 부고장이 전달되듯 자영업자들 자살기사가 떴고 얼마 후에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노숙자’라는 딱지를 붙인 산송장들이 거리를 횡행하고 말았다.

 

그 북새통에 나가떨어질 사람은 대충 나가떨어진 시간이 흐른 후, 내 자동차는 제천과 영월을 지나 험준한 산속을 달리고 있었다. 석탄광에서 흘러내린 검은 개울물에 질척질척 시름이 젖어드는 오후, 숨이 턱에 차오른 자동차는 검은 먼지 깔린 조그만 탄광촌에 바퀴를 멈추었다. K가 소문대로 여기 있을까? 은행에서 일등고객으로 대접받던 그가 정말 여기에 숨었는가 말이다. 나는 수월찮이 많은 돈을 그에게 물려 있었다. 몇 달 전부터 꾸어준 돈 중에 반이라도 좋으니 제발 갚아달라고 독촉했던 것이다. 그는 내 전화를 받을 때마다 적이 활기차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몇 번 되풀이되는 같은 대답에 나는 그가 남들처럼 IMF 수렁에 빠졌다는 직감이 들었다. 수입한 가죽을 국내에서 가공해 다시 외국으로 되파는 회사라서 누구보다도 먼저 직격탄을 맞았다는 판단이었다. 겉과는 달리 그는 죽을힘을 다해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중일지도 몰랐다. 어느 날 통화에서 슬며시 그에게 농담처럼 진담을 던졌다. “너는 내 친구가 맞지? 돈을 떠나서 말이다. 혹시 네 신상에 이상한 일이 생기더라도 내게 연락만은 끊지 말아 줘.” 이 당부가 기폭제가 됐는지 며칠 후 K는 염려대로 잠수를 타고 말았다. 핸드폰은 불통이었다. 집에 찾아가니 K의 아내는 두려움과 그늘진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돈은 둘째 문제입니다. 사람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연락이라도 닿을 방법이 없습니까?” K의 아내는 역시 메마른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다른 채권자에게 벌써 많이 시달린 모양이었다.

 

사실 돈은 둘째고 사람이 먼저라는 내 말은, 당시엔 거짓이었을 것이다. 여기저기 뻥뻥 터지고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난데없이 증발되는 지천에 무슨 수로 그런 여유를 가질 것인가, “직장을 쫓겨나도 좋아요, 퇴직금을 날려도 괜찮아요, 집이 날아가도 참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오직 당신만은 없어지지 마세요.”라고 신문에 난 쪼가리 만평에 얼마나 많은 가장들이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벌건 눈물을 지었는가 말이다. 모든 사람이 쫓기는 도망자며 쫒는 추격자였다. 모두가 전화를 받을 수 없고 모두가 다이얼을 애타게 눌러댈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 틈을 타고 어떤 정치가는 스포라이트를 받아 떠오르고 국가 부도사태라는 정부의 호소에 누구는 금가락지를 은행에 가져가고- 그런 기사로 범벅이 된 신문지를 들어 옷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고 차에서 내린 나는 의젓하고 당당한 K의 모습과 탄가루로 먹칠을 해댄 동네 풍경과의 대비에 당황해야만 했다. 주차장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발밑으로 담배꽁초만 떨어졌다. 그냥 돌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정말 어렵사리 알아낸 그의 거처까지 들려봐야 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저 위로는 광부들이 살던 빈집들이 을씨년스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확인할 것도 없이 모두가 다 끝장 난 상황이었다.

 

머리에 닿을 듯 낮은 처마 아래, 찢어진 비닐조각 날리는 창문을 가운데 두고 우연히 K와 내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내가 두리번대며 폐가들이 늘어선 골목을 도는 순간, 그가 방구석에 웅크리고 휴대용 버너에 커피를 끓이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것이다. 수염도 깎지 못한 핼쑥해진 얼굴, 횡하니 커지며 멀어지던 동공, 허우적대 보이던 황망한 표정, K는 어서 들어와 커피 한 잔 하자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문짝 떨어져나간 문지방을 넘어 비닐장판 너덜한 방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찬찬히 커피를 타는 그의 손을 묵묵히 내려다봤다. 그도, 나도, 돈에 관해서는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좁은 방안을 내리누르던 어색한 기운을 떨쳐버리듯 “여기 웬 빈집들이 이렇게 많냐?”고 내가 운을 뗐을 뿐이었고, 그는 탄광 경기가 죽은 후에 사람들이 많이 떠나갔고 재개발을 하려고 해도 그런 메리트가 아직 없으며, 빈 동네를 혼자 지키다보면 밤에는 좀 무섭고 가끔 산짐승도 어슬렁대고, 어제는 저 골목을 오르던 사람이 자기를 발견하더니 깜짝 놀라고, 아마 간첩이라고 신고할 지도 몰라, 하며 피식 웃고, 나는 시시콜콜 맞장구를 쳐가며 같이 허허롭게 웃고, 그렇게 언덕을 내려왔을 뿐이었다. K는 소주를 마구 들이켰다. 삼겹살도 우적우적 씹었다. 겨우 형체만 남은 거죽이지만 자기를 끝까지 지탱해 내고야 말겠다는 집요한 몸놀림으로 보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길을 외롭게 달렸다. 도로 옆에 오똑 솟은 ‘구인사’라는 푯말이 눈에 띠었다. 핸들을 왼쪽으로 틀었다. 이대로 서울로 갈 기분이 아니었다. 말로만 듣던 구인사에서 하룻밤이라도 마음을 챙기던지 비우던지 해야지 견딜 수가 없었다. 구인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종무원 사무실에 오르니 하루에 삼천 원. 저녁 한 끼니와 잠자리, 그리고 내일 아침 끼니까지 단돈 삼천 원에 해결된다는 말이었다. 식당 안은 모두가 식사를 마친 후라 호젓한 분위기였다. 물론 기대도 안했지만 K는 부인할 수 없는 내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것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며칠 안으로 은행당좌에 돈을 틀어막아야 되고, 또 누구의 약속을 지켜야 하고, 그 후로는 또 뭐가 있고, 도대체 정리가 되지 않는 인생 나부랭이였다. 잠수를 탄 K의 용기가 오히려 부러웠다. 일곱 시가 좀 넘어서 잠자리를 찾아드니 이백 명은 훨씬 넘게 실히 누워서 발을 뻗을 수 있는 큰 방이었다. 왜 모였는지 많은 사람들이 광장과 같은 바닥에 몇 줄로 쭉 늘어져 잠에 취해 있었다. 이 절에서는 맨바닥에 이렇게 잠을 재우나?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워낙 피곤하기에 말로만 듣던 노숙자처럼 베개도 없이 사람 틈에 끼어들었다. 밖에는 가을비가 여전히 싸늘했다. 가물가물 정신이 멀어져 갔다. 내일도 태양이 떠오르는가, 누구를 위해서? 누구를 죽이려고?

 

선잠에 뒤척뒤척 하는데 별안간 전등이 켜지며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제 모두 일어나서 기도합시다.” 부신 눈을 비비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여 주변을 살피니 사람들은 군소리 하나 없이 몸을 일으켜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이었다. 나도 얼떨결에 그 자세를 취하니, “부처님께서 가르쳐 준 지혜는 이미 여러분의 마음에 다 들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중생들이 무명에 묻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끄집어내지 못할 뿐......” 졸음을 두드리는 긴 일장연설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형광등 아래 반들반들 대머리를 비치며 설법을 토하던 스님이, “이제부터 마음속으로 각자 염원하고 소원하는 바를 부처님께 빕시다. 선창할 테니 모두 따라 하세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러자 실내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열한 자 주문을 소리 높여 외우기 시작했다. 나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던 졸음이 화들짝 달아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인 내게는 솔직히 다들 미친 것 같았다. 저 주문만 외우면 스님 말마따나 소원성취 되는가? 나무아미타불 돈 나와라 뚝딱, 관세음보살 돈 내놔라 뚝딱 하면 나는 만사 오케이인가 말이다. 여기는 정말 이상한 나라였다. 돈 받으러 싸다니다 보니 기막힌 나라까지 오고야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은 불자들이 불철주야 기도하는 기도도량이었던 것이다.

 

잠시 화장실로 나서니 문밖 조그만 안내문에는, 두 시간 기도, 두 시간 휴식, 또 두 시간 기도, 두 시간 휴식, 그리고 새벽 4시에는 대웅전에서 예불과 기도를 두 시간, 그 후에 아침 밥, 스케줄은 이런 순으로 짜여 하루를 돌았으니 이는 일종의 사람 들볶기라고나 할까. 부처님 가호 아래 피곤에 절은 몸을 눕혀 자장자장 예쁜 잠을 청하려던 내 계획은 허사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줄행랑을 놓으려 주차장에 내려서니 내 차는 다른 차들에 의해 빙빙 둘려 구석에 갇혀 있었다. 할 수 없이 다시 기도실로 돌아왔다. 마침 짧은 휴식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워서 잠을 청했지만 내 자리 주변의 몇몇 사람들은 준비해온 야식을 꺼내놓고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주 앉은 사람은 직업이 운전수인데 담배 끊자고 여기 왔다나, 매일 그런 기도를 올리는데 오십 줄에 접어든 옆사람에게 고개를 돌려 슬쩍 묻는 말이, “노형은 뭐를 기도하러 오셨소?”하자 두꺼비 입을 가진 옆사람이 벌쭉 입술을 벌려 쩝쩝대며, “빚을 많이 지고 마음 달래려고 왔소.” 그랬다. 그러자 운전수가, “그렇죠. 부처님 덕에 마음이 편하면 좋죠.”하고 맞장구를 치자, 그 작자가 밤알을 하나를 까서 연못에 던져진 조약돌마냥 두꺼비 큰 입에 퐁당 집어넣고는 평수 넓은 입술을 마주 붙여 우물우물 대더니 “네, 마음은 좀 편합디다. 돈이란 것도 다 마음문제 아니겠습니까, 그저 주고받다가 없으면 못 주는 거고 있으면 주는 거고, 그게 다 장난질 같단 말씀입니다. 에헴.”

 

이 말이 옆에 누워서 비몽사몽 꾸벅대던 나를 확 깨우고 말았다. “있으면 주고 없으면 못 줘? 그게 다 장난질 같다니.” 슬며시 고개를 들어 그 면상을 째려봤다. 정말 누구하고 닮긴 닮았다. 내가 돈 받으러 가면 저 사람처럼 주둥이를 엿도둑 엿 물은 모양 길쭉하게 옆으로 째 다물고 그저 갚지 못해 미안합니다. 제가 일부러 이런 것은 아니고 마음이야 갚을 생각이 굴뚝이죠. 죽일 테면 죽이고 살리려면 살려주고 그저 처분에 맡깁니다. 라는 뻔뻔하고 유들유들하고 끈적끈적한 표정으로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다시 채근할라치면 조그만 눈알을 잠시 뽀꼼 내미는 게 특기다. 곧이어 내 면상까지 닿게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입맛을 쩍 다시고, 다시 머리통을 땅이 무너져라 내리박고 채권자가 물러설 때까지 지루하게 꾸물대는 게 박사장이라는 그 작자의 주종목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무리 마음을 챙기고 비우려던 최초의 의도였지만 울분이 치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슬며시 일어나 두꺼비에게 눈알을 한번 찍 갈겨 흘겨주고는 밖을 나섰다. 컴컴한 구석에 쪼그려 빨간등을 입에 달고 연기만 푹푹 내뿜자니, 기도가 또 시작되었는지 소백산 계곡을 흔들며 일제히 울려 퍼지는 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래 너는 불국의 미타사로 떠나는 나무아미타불이겠지만, 나는 땅에 빌붙어 꼼짝도 못하는 도로아미타불이다. 선삼매경에 접어든 듯 내일을 생각하고 그 이튿날을 떠올리고 그런 상념에 꾸벅대니 밤공기가 너무 싸늘했다. 아무래도 잠시 눈 붙일 자리를 좀 찾아야 될 것만 같았다.

 

위층 기도실 아래 붙은 반지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서너 개의 건물 지하방은 모두 문이 잠겨 있었다. 라이터에 불을 켜고 다음 건물의 지하계단을 내려서니 컴컴한 통로 저 끝에서 불빛이 새나왔다. 거기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서 누가 기도중인 모양인데, 단 두 사람의 목소리만 두런두런 엇갈려 들려왔다. 저 정도의 소음이면 참고 잠을 청하겠구나 싶어 소림사 방장실로 숨어드는 암살자처럼 촛불 일렁이는 장지문을 슬며시 열었다. 이십대로 보이는 젊은 스님 둘이서 촛불에 머리를 박아 주억주억 어깨를 좌우로 흔들흔들 기도에 빠져 있었다. 구석 저 편에 산더미처럼 쌓인 방석이 눈에 띠었다. 옳다구나 하여 스님 뒤를 살금살금 돌아 그 밑에 몸을 들이밀어 반쯤 묻으니, 에그, 너희들 새파란 청춘도 참 고생이 많구나, 밤샘 기도에 고달픈 목소리를 자장가로 삼아야겠다. 눈을 감고 있자니, K도 아까 그 두꺼비 녀석처럼 편하게 지낼까, 혹시 남모르는 거금을 뒤로 빼놓고 쇼를 하느냐고 탄광촌에 처박힌 게 아닐까, 아니야, 자존심이 강한 K는 그렇게 비겁하지는 않아, 적어도 나하고 이십년 지기인데, 아니야, 그래도 궁지에 몰리면 사람들은 다 제 살 궁리를 하게 마련인데, 남들처럼 뒷조사를 해 볼까, 극과 극을 오가는 K의 상념이 서서히 꿈으로 변하다가 의식이 가물가물- 너는 채무자이면서도 누구에게는 채권자, 그 채권자도 역시 또 누구에게는 채무자, 나도 채권과 채무의 샌드위치를 인생 때깔 나고 맛나게 씹어 먹는 채권자이면서도 채무자, 나는 탄광촌을 떠나며 K의 어깨를 도닥여 약간의 생활비까지 주머니에 찔러주었다. 그 두꺼비 같은 녀석이 밤톨 하나 입에 쏙 집어넣으며 지껄인 말이 사실인 줄 모른다. 주고받는 모두가 장난질 같다는.

 

몇 년이 흐른 후,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돈 보다는 정말 사람이 미웠던, 내 마지막 돈을 싹둑 잘라먹고 사라진 말하자면 죽이고도 싶었던 사기꾼이랄까, 내 생애에 고소장은 그 사람에게 딱 한 번 날렸다. 이 사람이 전남 광주에서 붙잡혀 서울 관할경찰서로 압송되었다는 말이었다. “그 분 행색이 어떻습니까? 돈이라도 있어 봬요?” 형사에게 묻자, “글쎄요, 행색은 좀 초라해요.”라는 대답이었다. 망설이지 않았다. “고소를 취하 하겠습니다. 얼굴 부딪쳐 뭐하겠어요.” 물론 이런 판단 뒤에는 나 나름의 뒷조사가 있었다. 그 사람도 남의 돈을 끌어다가 저 쪽에 틀어막는, 채권과 채무의 쳇바퀴를 돌기만 했을 뿐이지 잘 먹고 잘 산 것도 아니었다. 그때 벌써 나는 잠이라도 편히 자기 위해서, 억지로 뜨는 밥이라도 속에 얹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또는 세상살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주고받는 인과관계의 장난질이라서 끝까지 속 끓이고 미워하며 살 필요가 없다는, 그런 삶의 비결을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예부터 바보가 되기 가장 어렵다고 한다. 혹시 이런 변화와 생각이 바보 같다면 능히 감수하여 바보가 될 일이련만.

 

재작년에 삭발을 했다. 체질이 변하는지 염색을 하면 두피가 자꾸 부어올랐다. 이발소 바닥에 떨어지던 윤기 없는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니 문득 통쾌한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의 마디마디가 잘려나가는 느낌이 시원했다. 이상했다. 혹시 나도 모르게 내 속에 자학증상이 있어서 이런 기분이 아닐까, 거울을 볼 때마다 그 안에 비친 민머리를 갸웃대며 정체를 알려고 애썼다. 슬픈 일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남을 미워하지 않으려 애쓰고 혹시 누가 나를 모해하고 해를 끼쳐도 용서하려 노력했지만, 정작 나한테 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남에게 양보하는 만큼 내 자신에게는 가혹했던 것이다. 이는 자학증상을 은밀하게 내포한 반쪽의 제스처일 뿐이었다. 상대의 잘못은 곧 내 잘못으로 통하고, 용서는 상대뿐만 아니라 곧 나 자신에 대한 용서도 포함하는, 그런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자세만이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가져와, 지극히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할 줄도 알고, 지극히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어이 남도 사랑하고야 만다는-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나 용서도 화해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잊으려 노력했을 뿐이었다.

 

캄캄하다. 제 자신이 용서될 수 있어야 다 용서가 된다면 말이다. 미세한 마음 움직임도 눈에 띠어 허물이 끝이 없는데 어찌 스스로를 마음대로 용서하고 용납한단 말인가. 과거를 돌이켜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으며 어리석었는가 말이다. 백 번 죽어도 마땅한 사람은 늘 자기 자신이다. 교회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고 부처님 전에 삼천 배로 참회하여 금방 태어난 사람처럼 깨끗할지라도, 앞으로의 허물은 장담할 수 없기에 인생이란 검댕이 묻기 쉬운 아궁이와 굴뚝을 들락대는 일이라, 이것이 바로 측은하고 슬픈 일이다. 친구에게 묻겠다. 너도 역시 그렇지 아니한가? 검댕이 묻은 얼굴로 너를 쳐다봐 네 얼굴이 못날 일 없고, 네 얼굴의 검댕이 나도 묻혀 나 또한 똑같다면, 네가 나에게 잘못한 일이 무엇이고 내가 너를 용서할 일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한 갑자(甲子) 육십 년을 도니 슬픔의 강이 앞에 있다. 강물을 떠 입에 무니 누구 말마따나 인생 한여름 밤의 꿈과 같다. 장난질 같다. 그렇다면 회색빛 머리를 뒤집어쓴 너와 나는 서로 아무 이상이 없는 건가? 원래부터 우리는 그렇지 않았는가! 만약 그 누구 미운 사람도 또 용서할 사람도 없고, 밉거나 역시 용서 받을 나도 없이 길을 나선다면- 우린, 비 그친 가을빛 좋다!

 

2011. 시월 중순

 

 

 

글밥

 

 

더럽고 치사한 일이다. 전화 걸거나 찾아가기조차 싫다. 도대체 인간들이 싫어지고 세상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저 많은 인간들이나 저들만의 세상이 나를 타깃 삼아 미워하고 배척할지도 모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연세가 많이 드셔서......” 그래, 자식들아, “나 연세 많이 처먹었다.”

장미꽃이 현란한 유월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이깟 껌부스러기 같은 봉급에 목줄 잡혀 매일 되풀이되는 허드렛일이 지겨워서, “에라, 일은 저지르고 보는 것이다. 성질대로 한 번 살아보자.”하곤 뒤돌아섰다. 그 용기 덕분에 올여름 잘 놀았다. 문학인지 문짝인지 소설인지 쏘쎨인지 글이나 좀 써보자고, 또한 보고 싶은 책에다가 실컷 코나 박아보자고 유난히 많이 쏟아지던 여름 빗줄기에 귓떼기를 척 걸쳐 구성지게 홍홍, 재미가 좋았다.

 

고렇게 9월까지 송당송당 지내다보니 슬슬 기지개를 펴고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할 때라, 이번에는 뭐를 할까...... 뭘 해서 밥술 뜨나..... 하고는 평생 요렇게 먹고 놀며 살지 못하는 유감을 품고 할 수 없이 구인광고를 쫒아 다녔는데, 구하는 데마다 족족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고렇게 묻기에 나는 전화통에 눈알을 흘기며 한 살이라도 더 줄여보려고 “만으로 59세인데요.” 작은 목소리로 속닥 대답을 전달하니깐 여지없이 날아오는 반응이 “그러면 우리나이로 60세군요. 연세가 좀 그러네요.” 더 이상 집적댈 일이 아니라 내 낯가죽이 씰쭉대기도 하지만, 어린 녀석들의 목소리가 휘두르는 단칼에 그래도 고스란히 죽기는 싫어서 담대하고 우렁차게 “알았소.”하고는 탁 전화를 끊어버린 일이, 아마 십여 차례가 훨씬 넘어 스무 번은 될 것이다. 그 자식들은 꼭 나이를 한 살씩 더 올려붙여 기어이 나를 노인네로 몰아버린단 말이야. 육십 살을 한꺼번에 먹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니 기실 나이란 차근차근 한 살씩 순서대로 한 살씩 차례로 먹고 오물거리는 게 아니고 어느 날 불현듯 한꺼번에 그리고 난데없이 확 먹어버리는 모양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전혀 거론되지 않던 나이가 올해는 요 모양 요 꼴로 배가 부르고 속에 얹혀, 소화제를 먹든지 손가락 끝을 따던지 해서, 트림으로 빼고 아랫동네로 흘려보내 몸 가쁜 나이 홀쭉 했으면 좋으련만, 바윗덩이 같은 주민등록번호 앞자리 숫자가 가릴 곳 없이 불룩 솟은 이마박이다. 어느덧 내 구직 목소리도 애처로워져, “헤헤, 나이가 좀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고런 식으로 나가다가 어느 날은 뭔 정신인지 성질이 뻗쳐서, “나, 나이가 좀 들었다고 합디다. 그래도 괜찮겠소?” 고렇게 수작을 떨고 큰소리쳐 뎅겅 잘리고 마니 온통 길바닥은 내 모가지라서, 내가 조금 미친놈으로 변하긴 변했던 모양이다.

 

멀리 큰 산이 예사로 뵈지 않았다. 나를 세상이 싫어하면 가는 거지 뭐. 저 산속에 들어가 바위틈에 몸을 묻어 안 먹고 안 살겠다. 만에 하나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너희들이 양식을 가져와 내 앞에 쌓아놓고 백배 허리 구부려 사정해도 내가 꼭 봉해버린 입을 열줄 알고? 작대기를 쑤셔 넣어 비틀어 내 입을 벌리면 목구멍을 딱 닫으마. 고렇게 혼자 씩씩대 아파트 아래를 굽어보니 약간은 기운이 나는 듯도 했다. 이 기분 손상되지 않게 고이고이 다독여 일주일은 취업신문이나 인터넷을 멀리하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지내리라. 언젠가 J시인이 취업 때문에 몇 달을 고생했는데, 그때 J시인 쓴 시중에 토요일과 일요일은 자기도 공휴일이라나. 시의 내용이 꼭 은행원 같다. 그래서 집에서 쉬는 날, 아내는 고등어를 굽고 애들은 실직 아빠와 함께 즐거운 휴일을 즐기고, 그런데 나는 한 술 더 떠야겠다. “나는 휴가 중이야!”

 

증명사진 뒷면에 풀을 칠했다. 많던 사진이 이력서와 함께 다 날아가고 이게 마지막이었다. 구인업체는 일반회사가 아닌 ‘노인생활협동조합’이라는데, 노인들끼리 뭔 협동을 하러 모였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그곳에서 나에게 시켜 먹을 일이란 대충 방역소독작업이었다. 언젠가 조합의 노인들이 방역차를 몰고 다니던 모습이 기억났다. 그때 뽀얀 연막을 부릉부릉 내뿜어 꼬리에 달고 가는 방역차를 보며 떠오른 생각이 ‘과거삭제’라는 네 글자였다. 지나온 자리를 그냥 잊는 것도 아니고 소독약을 퍽퍽 내뿜어 지워버리면 자못 시원한지라, 과거를 돌이켜 세균만 득실대는 내 처지로서는 필요할 듯한 직업이기도 하다. 사실 ‘방역소독차’라는 장문의 시도 지을 뻔 했다. 스펙 또는 자격증이라 봐야 기껏 운전면허보통1종 하나뿐이고, 글쟁이를 내세워 눈 어두운 노인들에게 내 프로필이 어필될 일도 없기에 이것저것 몽땅 빼고 나니 이력서가 헐렁헐렁하여 읽을거리가 몇 개 되지도 않았다. 에라, 될 테면 되고 말 테면 말지. 어차피 산속 바위틈에 몸 낑겨넣어 입 봉하려던 나였으니깐.

 

면접을 보러가니 칠십은 되어 보이는 노인이 떡 앉았는데, 내 이력서를 꾸물꾸물 돋보기안경을 통해 들여다보더니, “아이구, 젊으셨네요.” 그러지 않는가. 정말 기분이 좋았다. 취직하러 돌아다녀 늙었다고 뎅강뎅강 잘리던 사람이 젊었다는 소리를 듣다니, 흡족한 홍조가 떠올라 몸을 비비꼬기 직전인데, “만60세가 안 되었네요. 우리는 만60세부터 사람을 채용하는데,”하는 말이었다. 혀를 쑥 내밀고 쩝쩝대던 나는 “저쪽에서는 늙다리라고 잘리고 여기선 젊었다고 잘리고, 대충 인생이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하고 일어서려는데, 내 목숨이 정말 연말까지 갈까 말까, 늙지도 젊지도 못해 굶어죽을 일만 남은 것 같아. 그때 문득 옆에 앉았던 노인이 이력서를 건네받고는 내 알몸 훑듯이 눈을 바짝 들이대 개가 똥냄새 맡듯이 킁킁하더니, “젊은 사람도 필요하긴 하지.”하곤 중얼중얼, 내일 조합사무실로 나와 보라는데, 취직이 되건 안 되건 하여튼 여간해선 듣기 힘든 ‘젊은 사람’이라는 그 말이 기분 좋아 그렇게 하겠노라며 돌아섰다.

 

두어 번 조합사무실에 들락댔다. 노인들이야 원래 의심이 많고 뭉근하여 선뜻 사람을 신임하지 않는 법이라, 그 속을 빤히 들여다보며 모른 척 하루아침에 젊은 사람이 되어서 ‘젊은 시절’을 즐기는데, 역시 젊은 사람 대접하듯이 조합 홈페이지를 좀 관리해 달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내가 홈페이지에 올린 첫 글이......

 

[이야기] 나이는 마음과 활동의 문제입니다

 

93세 되신 노인께서는 가슴을 치며 통탄을 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니 자신이 공직에서 퇴직할 당시의 나이가 65세. 언제까지 살지는 모르지만 나머지 인생을 그저 연금을 타먹다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맞기도 합니다. 우선 연금이 보장되었으니 용돈은 걱정 없고, 칠십 살을 넘길지, 팔십 살 까지 살지, 언제 죽을 지도 모르고, 밖에 나가면 퇴물 취급만 받고, 그러니 건강이나 챙기며 조용히 사는 게 능사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게 노인은 살아왔고, 살다보니 어느덧 93살이 되었습니다.

93회 생일 아침, 노인께서는 문득 이렇게 오랫동안 살 줄 알았으면 자기가 퇴직한 후에도 무엇인가 일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깜짝 놀랐습니다. 돌아보니 퇴직 후, 28년을 나는 퇴물이다 하고 생각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28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늙었지만 무슨 일이라도 힘닿는 대로 천천히 해 나갔어도, 젊은 사람 못지않은 성과가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나는 늙었는데... 어디 가도 붙여주지 않는 퇴물인데... 내일 죽을지도 모르고 모레 죽을지도 모르는데... 남들처럼 나도 그렇게 살다 말 텐데...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인생의 3분의 1을 그냥 그렇게 흘려보냈다는 생각이 드니 얼마나 억울한지 몰랐습니다. 지나고 보니 무슨 일이라도 새롭게 시작해도 되었을 65세의 나이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손자에게 영어책을 하나 사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비록 93세의 늙은 나이지만 세상을 다시 시작해도 될 것만 같았습니다.

(이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올해 93세의 노인께서 고백한 수기입니다. 늙었다는 것은 몸과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활동의 문제입니다. 오늘도 조합원 여러분의 활기찬 하루를 기대해 봅니다.)

 

아마 이 글이 마음에 들었을까?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문인들이 먹기 어려운 글밥을 먹는 셈이다. 오늘 사무실에서 호출하여 나가보니 11월부터 사무실의 행정업무를 맡아 달란다. 조합활동을 취재하여 글로 잘 엮어 홈페이지에 올려달란다. 물론 봉급은 쥐꼬리토막의 반만 하지만, 마음에 들었던 것은 하루 6시간 주5일 근무. 나머지는 모두 내 문학. 집에 돌아와 읽던 오르한 파묵의 작품 <내 이름은 빨강>을 집어 들었다.

 

 

2011. 시월 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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