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의 기쁨

홀로코스트[Holocaust]

미송 2011. 10. 6. 07:48

홀로코스트[Holocaust]

 

유럽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집단학살하려 했던 나치의 '마지막 해결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색인 : 국가사회주의).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는 그가 1933년 1월 30일 총리가 된 지 1개월 만에 시작되었다. 유대인 소유 기업은 배척받아 곧 파산했으며 유대인은 지방정부와 법원, 대학에서 쫓겨났다. 1933~38년에 이루어진 일련의 법령·몰수·대학살로 히틀러는 독일 유대인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나치 독트린에 따르면 그 가운데는 유대인 혈통을 가진 수천 명의 독일 그리스도교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5년 뉘른베른크 법에 따라 유대인은 시민권을 완전히 잃었으며 다른 독일인과의 결혼도 금지되었다. 크리스탈나흐트(1938. 11. 9~10) 대학살 결과 독일에 있는 모든 유대교 예배당과 유대인 기관이 사실상 파괴되었다. 그뒤 수천 명의 유대인이 집단수용소에 감금되었고 독일 유대인의 재산 대부분은 가혹한 벌금과 기타 강제징수로 몰수되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유대인은 더이상 시민이 아니었다.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었으며 실제로 사업을 하거나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다. 또 토지를 가질 수도 없었고 유대인이 아닌 사람과는 사귈 수 없었으며 공원이나 도서관, 박물관에조차 갈 수 없었다. 그들은 '게토'(유대인 거주지역) 안에서만 살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1년 12세가 넘는 유대인 남자는 군수공장에 징집되었으며, 전화와 모든 공공 수송시설의 사용을 금지당했다. 또 6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은 '다윗의 별'이라 씌어진 노란색 배지를 달아야 했다.

 

여러 선전활동이 성공을 거두자, 나치는 반(反)유대주의가 모든 유럽 국가로 진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유용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38년 9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는 독일의 반유대주의 종족법을 본보기로 반유대법을 공포했다. 그리고 1938년 오스트리아,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합병해 이들 나라의 유대인을 종속시켰다. 반유대주의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헝가리도 1938년 히틀러의 법을 모델로 하여 처음으로 반유대주의 법령을 제정했다. 루마니아의 반유대주의는 1937년 12월 옥타비안 고가가 총리가 되어 일련의 나치 반유대주의 법률을 지지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곧 국왕 카롤 2세에 의해 해임되었지만 1939년 11월 루마니아 유대인의 1/3 이상이 공민권을 박탈당했다. 이 조치로 루마니아 유대인은 외국인으로 취급되어 사회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유대인을 비롯해 유럽의 다른 억압받는 소수민족을 후원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사회·정치 세력들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중부 및 동부 유럽 학생들은 오랜 전통에 따라 자유주의자와의 제휴를 거부했다. 자유주의 정당들 자체도 분쇄되거나 억압당했다. 교회의 저항이 있었으나 무력했고 효과적이지도 못했다. 몇몇 신자와 고위 성직자들은 반유대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유대인 스스로 모색한 자구책으로 그들의 입지는 다소 나아졌다. 대다수가 이주를 희망해 1931~41년 미국에 간 사람이 16만 1,262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이주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여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처한 상황을 개선시켜주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초 독일군이 연승을 거두자, 유럽에 거주하는 대다수 유대인은 나치와 그 위성국 치하에 들어갔다. 대서양에서 볼가 강, 노르웨이에서 시칠리아까지 그곳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모든 인간적 권리를 빼앗겼다. 재산은 몰수당했으며 그들 대부분이 게토와 집단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당시 나치는 이미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정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프랑스를 함락한 뒤인 1940년에 구상된 '마다가스카르 계획'은 마다가스카르 섬을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의 관할 아래 수백만 명의 유럽 거주 유대인들을 재정착시키는 특별구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영국과의 평화 없이는 결코 실시할 수 없는 것이었고 독일이 러시아를 침략한 뒤에는 실용성이 없어졌기 때문에 결국 무산되었다. 그뒤 악명높은 반제 회의가 열렸다. 1942년 1월 20일 베를린 교외의 그로센반제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비롯한 15명의 나치 주요 관료가 모여 나치 친위대(Schutzstaffel/SS) 분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주재로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취해진 결정은 모든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동부에 있는 수용소로 이주시켜 그들을 '적절하게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유대인 일부는 철저하게 학살될 것이며(그러나 학살이나 처형이라는 말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음) 그밖의 유대인은 거대한 노동부대로 편성될 것이지만, 소모적인 노동과 빈약한 식사로 그들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거나 집단학살수용소로 들어가는 길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계획이었다(→ 색인 : 강제수용소).

 

가장 효과적인 대량학살 방법은 특별히 만든 가스실에서 가스를 마시게 하는 것이었다. 가스실에서 나온 시체는 인근 화장터로 옮겨졌다. 이런 여러 가지 방법으로 400여 만 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마이다네크·트레블링카·헤움노·소비보르·벨제크 등의 집단학살수용소에서 죽었다. 전쟁 기간에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대인 수는 총 575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특히 나치의 잔학행위에 의해 간접적으로 희생된 사람, 반(半)유대인, 유대인으로 등록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희생자 수는 훨씬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량학살계획은 효율적으로 실행되었기 때문에 만성적인 기아와 질병으로 기력을 잃어가던 희생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들이 가스실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유대인들은 소극적·적극적으로 저항했다. 덴마크·프랑스·이탈리아·불가리아 등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던 나라에서는 유대인을 숨겨주고 위조서류를 만들어주기도 하며 중립국으로 도망갈 수 있게 해줌으로써 상당수의 유대인을 구했음이 밝혀졌다. 즉 덴마크 유대인의 대다수는 비밀리에 스웨덴으로 집단이주했으며, 일부 프랑스 유대인은 스페인·포르투갈·스위스로 피신했다. 그러나 동부 유럽에서는 독일인이 농민의 반유대주의 전통을 이용했기 때문에 유대인은 일반대중의 도움을 거의 받을 수 없었다. 한편 적지 않은 수의 비독일인이 학살운동을 실행하는 데 가장 야만적인 앞잡이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젊은 유대인은 폴란드·소련·리투아니아·프랑스·이탈리아 등지에서 다양한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과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유대인 게릴라들은 종종 그들 자신의 부대를 편성했다. 프랑스에서도 '마키'라는 특수 유대인 부대가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점은 바르샤바·비아우이스토크·빌뉴스 등 폴란드의 주요 게토에서 엄청난 열세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바르샤바에서는 한때 거의 40만 명까지 수용했던 게토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6만 명이 독일의 퇴거 명령에 불응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거의 무장도 안 된 상태에서 화염방사기와 장갑차, 탱크로 무장한 독일 정규군에 대항해 거의 1개월 동안 저항을 계속했다(1943. 4~5). 불행하게도 연합국 정부들은 그들 자신의 문제에 몰두함으로써 유대인을 구하는 데 있어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전쟁의 전기간을 통해 대부분 국가의 문은 소수의 피난민을 제외한 모든 유대인에게 닫혀 있었다(→ 색인 : 바르샤바 게토 봉기).

 

유럽에서 전쟁은 1945년 5월 8일에 끝났다. 그뒤 몇 년이 흐르자 개인의 상처는 어느 정도 치유되었으나, 유럽 대륙에서 유대인 사회가 겪은 피해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유대인의 희망은 이스라엘의 건설과 그 유지, 그리고 나치 전범의 재판 회부에 쏠리게 되었다. 홀로코스트 추모일은 이스라엘에서는 니산 27일, 그밖의 지역에서는 4월 19일 또는 20일이다. 이 날짜는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시작된 날을 기념해서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인류가 저지른 광기의 역사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위치한 아우슈비츠는 문명을 배반한 야만의 극치이며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행위의 흔적이다.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상징인 강제수용소로 잘 알려져 있는 아우슈비츠는 원래 인구 5만 명의 작은 공업도시로, 폴란드어로는 오슈비엥침이라고 한다. 이 도시의 외곽에 있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생지옥을 만나게 된다. 학살한 시체를 태웠던 소각로, 카펫을 짜기 위해 모아둔 희생자들의 머리카락, 유대인들을 실어 나른 철로, 고문실 등이 끔찍했던 광기의 역사를 전해 준다.

 

4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현장

 

1940년 봄, 친위대 장관인 하인리히 힘러가 주동이 되어 가시철망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을 갖춘 공포의 강제수용소를 세웠다. 그 해 6월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고, 1941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었으며, 1942년부터 대학살을 시작하였다. 열차로 실려온 사람들 중 쇠약한 사람이나 노인, 어린이들은 곧바로 공동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로 보내 살해되었다.

 

이처럼 가스, 총살, 고문, 질병, 굶주림, 심지어는 인체실험을 당하여 죽은 사람이 4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중 3분의 2가 유대인이다. 희생자의 유품은 재활용품으로 사용했고, 장신구는 물론 금니까지 뽑아 금괴로 만들었으며, 머리카락을 모아 카펫을 짰다. 뼈는 갈아서 골분비료로까지 썼으니 사람의 몸뚱이 중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우슈비츠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1945년 1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치는 대량학살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막사를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수용소 건물과 막사의 일부가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폴란드의회에서는 이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희생자를 위로하는 거대한 국제위령비를 비르케나우에 세웠으며, 수용소 터에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나치의 잔학 행위에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 유네스코는 1979년 아우슈비츠를 세계문화유산에 지정하였다.

[출처] 아우슈비츠 수용소 [Auschwitz Concentration Camp ] | 네이버 백과사전

 

 

 

 


 

"아우슈비츠"
폴란드어로는 "오슈비엥침" 이라고 한다.
우리에겐 이미 영화로, 소설로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져서 친근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크라코프 근교에 세워진 거대한 수용소
정치범이나 군포는 물론 유럽 각지에서 끌고 온 유태인와 집시들이 강제로 수용되어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강제노동을 하다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죽고, 가스실로 끌려가 학살당하던 곳
전쟁이 끝나기 직저네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5년동안 400만명의 사람이 이런 식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문화인" 임을 자부하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인류문명사의 오점으로 남게 될 이 곳.

폴란드는 이 쓰라린 상처의 장소를 모든 이에게 항상 무료로 개방하고 있었다.
한국어까지 포함된 여러 나라의 언어로 된 팜플릿과 짧은 다큐멘터리 영화도함께 상영하면서
말이다.

 

 

 

 

수용소 정문에 적혀있는 Arbeit macht frei 일하면 자유로워진다.. 라는 기만적인 문구.
지금은 아우슈비츠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면서 관광객들의 사진 촬영장소이지만
당시 수감자들은 이 글자 아래를 지나 매일 강제노동에 끌려가 12시간 이상씩 일을 해야 했다.

 

 

  


당시엔 고압전류가 흘렀을 철조망
차라리 이 철조망에 몸을 던지는 게 나을 만큼 혹독한 수용소였다.
 

 

 

 

 


입구 옆에 붙어있는 당시 사진
수용소 사람들이 행진할 때 오케스트라가 행진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열을 맞추고 통제하기 쉽게 하려고 그랬다나
.

 

 

 

  

고압전류가 흘렀던 이중으로 된 철조망
감시 망루와 해골표시
HALT!! 이미 전류는 흐르지 않고 망루에도 아무도 없지만

저 해골 그림은 꽤나 잔인하게 여겨진다.

 

 

 


 

교수대 

 

 

 


 

시체를 태운 연기들이 뿜어져 나왔을 굴뚝  

 

 


유럽 각지에서 유태인을 끌고 왔다는 것 알려주는 지도.  

 

당시 수용자들이 생활하던 건물들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는데,
그 중 수감자들의 명단이다.
  

 

 

 

 


 

가슴에 노란색 별을 단 유태인들, 영문 모른채 끌려온 아이들.

체코,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노르에ㅞ이. 리투아니아, 그 외의 독일 점령국에서 끌려온
유대인과 집시들, 전쟁포로들과 정치범들이 이곳 아우슈비츠로 끌려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가스실로 보내져서,
명부에 등록되지도 않고 죽음을 당했다고.  

 

 

 

수감자들을 샤워장이라고 얘기하며 밀어놓고 물이 나오지 않는 샤워기로 흘러나온 것은 독가스 "싸이클론 B"
이 약품 6~7Kg 정도 만든 독가스로 천오백명 가량을 죽일 수 있었다고 한다.

 

 


 

연합군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 창고에서 발견된 빈통들. 

 

 

 

  

가스실 희생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놓은 것.
저게 다 머리카락이라는 게 언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가스실에 가스가 뿜어져 나오고 15분 이내에 모두 질식사하면,
금이빨을 뽑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반지와 목걸이를 빼낸 시체는 화장터로 보내졌다. 

 

 

 


안경도 모두 수거되고.

 

 


수감자들이 끌려 올 때 가져온 철제 그릇 등등.
녹여서 쓸 수 있는 것들도 모조리 수거되었다.   

 

  

 


 

  

그들이 끌려올때 가져온 가방들.
기차에 타면서, 혹은 샤워를 하러(?) 가면서 나중에 돌려받을 줄 알고
찾기 쉽도록 자기 이름을 큼지막하게 적어놓았건만
반세기가 지나도록 주인을 찾지 못한 채 박물관 유리창 너머에 쌓여있다.

 


신발들 

 


구두솔과 칫솔들  

 

 

 


유태인들도 중노동을 견딜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수용소로 보내졌다.
옷과 소지품들을 빼앗기고 이런 세가지 포즈의 사진을 찍어야 했다고 한다.
옆면 정면 모자쓰고 45도 시선. 옆면 정면 45도 시선 모자.

  

 

 


영화에 많이 나와서 낯익은 4계절 통용 죄수복.

 

 

 


아침으로는 "커피라고 불리는 액체"를
점심에는 썩은 야채로 만든 물같은 스프,
저녁으로는 빵 하나와 마가린, 종종 치즈나 소시지.
중노동과 배고픔에 수감자들은 영양실조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지.
체중이 30Kg 정도까지 줄어 버린 여성의 사진...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 생각해 보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도자였던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모독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유대인의  심장에는 반역자의 피가 흐른다.

*7살이 넘은 유대인 아이는 부모의 동의 없이도 세례를 받을 수 있다.

*카톨릭교인은 유대인 예배에 참석할 수 없다.

*카톨릭교 여인은 유대인 아기의 유모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교회를 모독하는 행위다.

그것은 마귀가 성령과 접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톨릭교인은 유대인과 함께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

*기도할 때에 유대인을 "배신자"라고 불러야 한다.

*유대인은 군인이 될 수 없다.

유대인은 오직 세탁업자,넝마주이,행상인,사채업자 등의

일만 해야 한다.

 

히틀러의 악행을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다.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그의 손에 죽었다.

그의 종말은 어떠했는가? 그는 자살을 했다. 무솔리니가 사후에 조롱을 당했던 것처럼

러시아가 그를 조롱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광적인 추종자들에게 자기의

시체를 불에 태우라고 명령했다. 

 

히틀러는 죽음 가운데서 눈을 감고, 그의 영원한 심판자인 나사렛 예수라는 랍비를 만나기 위해

영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출처-아름다운 기하성 총회를 위한 모임, 박승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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