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현실로 꿈꾸는 헤겔
하나의 개념이 세워지면 그것은 반대자로 인하여 반드시 부정된다. 그리고 모두 새로운 형태로 규합되어 보존된다. 이와 같은 정 반 합의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 역사이다.
칸트의 윤리학은 페에티즘(경건주의)의 신학과 시민법의 정치를 연결하는 선상에 있다. 개인의 도덕법칙이란 스스로가 세운 법이다. 개인과 개인은 인격과 인격으로서 입법자와 입법자로서 서로 존중해주는 윤리적 공동체를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신은 이 윤리적 공동체 공화국의 우두머리이지만 입법권만은 개인에게 있어야 한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1789년 그 해 칸트는 63세였고, 헤겔은 19세였다. 노인은 차분한 기대를 머금고 혁명의 종말을 지켜 보았고, 젊은이는 열광했다. 열광은 젊은이에게 아름다운 꿈을 꾸게 했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지상공화국에 신은 임재한다는 꿈을 꾸었다. 신은 사랑이며, 사랑은 의(義)를 넘어선 생명이라고 여겼다. 당시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꿈은 지상의 법칙을 거역하는 상태의 운명에 놓여 있었지만, 지고(至高)의 사랑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모든 것에 화해를 가져오게 하는 데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예컨대 잃어 버린 양처럼 집을 떠나 나쁜 일을 저지르고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할 때의 아버지는 그 아들이 의로운 사람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에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롭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의 품으로 되돌아온 아들이 한없이 사랑스러운 것이다.
죄인은 자기로 하여금 죄 있는 행동을 하게 만든 그 죄악의 생명에서 용서와 회개의 눈물을 흘림으로써 본래의 자기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결국 죄악의 생명은 자신을 분리시키고 대립을 일으키지만 다시 합일하여 되돌아올 때 사랑이 풍성한 생명의 고삐가 되는 것이다. 사랑은 스스로 근원적인 영생의 생명을 갖는 것이다.
이처럼 프랑스혁명은 환상을 현실로 바꾸어 놓았다. 꿈을 꿈으로서 꿈꾸는 칸트보다도 꿈을 현실로서 꿈꾸는 헤겔 쪽이 더 깊은 꿈에 빠져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칸트의 꿈은 잿빛인 반면 헤겔의 꿈은 핑크빛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의 꿈은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로 풍성하였고, 중심 사상 또한 칸트의 도덕법칙으로부터 사랑과 이해의 법칙으로 바뀐 것이다.
헤겔은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재무관 아들로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그리스의 비극을 애독했다. 1788년 튀빙겐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여 J. C. F. 휠덜린과 F.W셰링과 함께 칸트 철학과 루터 신학 등을 배웠다. 졸업 후 7년간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정치 역사 종교 철학 등을 연구하고, 몇 가지의 저서를 발표한 뒤 1801년 예나로 옮겨 예나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이미 예나대학의 교수로 활약 중이던 셸링의 사상에 동조하여<철학비판잡지>를 간행하면서 잇달아 논문을 발표했으나 차차 셸링적 입장을 벗어났다. 1806년 하숙집에서 나폴레옹의 예나 침공의 포성 소리를 듣고 그의 입성을 '마상(馬上)의 세계정신‘이라고 경탄하면서 그의 최초의 독창적인 主著<정신현상학(Phanomenologie des Geistes)> 마지막 부분을 탈고하여 1807년에 세상에 내놓았다.
나폴레옹군의 침공으로 예나 대학이 폐쇠되자 뉘른베르크로 가서 신문 편집에 종사하였으며, 이어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 교장이 되었고, 이곳에서 두 번째 주저<논리학>을 저술하였다.
181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로 취임, <철학백과전서>를 썼다. 1818년 프로이센 정부의 초청을 받아 셸링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 교수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의 철학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전 독일을 지배하고 있었다. 베를린 시절은 헤겔의 가장 화려한 시절로서 유력한 헤겔학파가 형성되었으며, 그의 철학은 국내외에 널리 전파되었으나 콜레라에 걸려 불과 하룻밤의 신음 끝에 1831년 사망하였다.
헤겔은 장대한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는데, 그 체계는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 3부로 되어 있으며, 이 전 체계를 일관하는 방법이 모든 사물의 전개를 정 반 합의 3단계로 나누는 변증법이었다. 그의 철학은 한 마디로 절대적 관념론이며, 그가 생전 존경하여 유언으로 그 곁에 묻히게 된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에 그가 같이 배우고 교유하면서 도움을 받았으나 뒤에 비판하고 있는 셸링의 객관적 관념론을 종합하여 웅대한 철학 체계로 완성시킨 것이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이야말로 절대자이며, 반면 자연은 절대자가 자기를 외화(外化)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논리학에서는 자연 및 정신에 대하여 고루 타당한 규정이 다루어졌다. 그는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요, 현실적인 것은 반드시 이성적인 것이라고 하여 범신론적인 주장을 내세우고 현실이란 –자기 자신 속에 반대자를 내포하고 있는 절대자- 즉, 절대정신이 그의 이성 개념을 차별상으로 분열시키고 발전시키는 자기 활동의 과정이다. 하나의 개념이 세워지면 그것은 내재적인 반대자로 인하여 반드시 부정된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새로운 형태로 규합되어 보존된다. 이와 같은 정 반 합의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 역사이다.
<중략>
헤겔의 사랑의 역설
남에게 베풀면 베풀수록 많이 갖는다. 즉, 헌신과 자기희생, 그리고 자기 포기가 자기 충족, 자기확립이라고 젊은 헤겔은 역설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무덤 앞에서 아무리 눈물을 뿌려도 이제 다시 만날 수는 없다. 무엇이 잃은 것인가. 자신이 갖고 있던 물건을 잃은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잃은 것인가. 잃었다는 점에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이나 보석을 잃어 버린 사람이나 동일한 의미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은 소유라고 하는 관계에서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함으로써 관계되는 것이다. 즉, 존재의 주체인 나의 존재는 상대방의 사랑과는 관계없이 성립되고 있지만, 사랑하는 주체로서의 나의 존재는 사랑하는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사랑과 죽음이 그들을 둘로 나누어 놓았지만, 동시에 하나로 합일하였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셰익스피어는 비극의 종말에 두 사람의 죽음을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로미오도 줄리엣도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 둘로 나누는 일이 없다면 합일도 없다. 합일이 없다면 분리도 없다. 이것을 헤겔은 ‘결합과 비결합의 결합’, ‘동일과 비동일의 동일’ 이라 명명(변증법)하였다.
생명체의 구조도 동일과 비동일의 동일이다. 자연계라는 커다란 생명체, 즉 코스모스 속에 개체로서의 생명체, 즉 마이크로 코스모스가 존재한다. 그러나 개체는 살아있는 한 존재하는 것이지만 죽으면 전체로부터 자기를 끊임없이 분리시키고 다른 한편으론 존립을 위해 또 다른 개체를 수용하는 활동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이화와 동화의 활동에 의해 성립된다고 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흡수당하는 것이다’ 라고 헤겔은 말한다. 전체로부터 개체가 자기를 분리하는 활동이 없으면 전체로서의 생명도 멈춰 버린다. 전체와 개개의 사이에는 ‘동일과 비동일의 동일’인 것이다. 공동체를 전체적 생명이라 생각하고 개인을 개체라 생각하면 된다. 여기서 개체란 공동체를 지탱시키는 실체이다. 그러므로 실체는 자기를 희생시켜 공동체를 존재하게 만들고 공동체 또한 자신을 희생하여 개체를 유지시킨다. 즉 공동체와 개체의 사이에는 상호적인 자기포기, 자기양보가 없이는 결코 양자의 존립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신을 전체적 생명 즉 공동체라 부르고 개체를 자기 원인자라고 규정했다. 이것이 자연이 자존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 즉 자연’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자연범신론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헤겔도 상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존하는 것을 공동체라 하였다. 그러므로 개체는 공동체를 통하여 참된 자기를 갖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채란 타이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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