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눈 / 이정문
며칠 전부터 눈이 별안간 침침하고 안구건조증인지 뻑뻑해오자 중국 남조 양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소역(AD508~554)의 생애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역은 독서에 얼마나 열중했는지 어렸을 때 안질에 걸렸고, 그 탓에 애꾸눈이 되어 버렸다. 황후인 서소패는 책에만 몰두하고 자기를 등한시하는 소역을 경멸하여, 어쩌다가 황제가 침실을 찾으면 얼굴 반쪽만 화장을 하여 그를 놀리곤 했다.
환상적 리얼리즘 소설의 태두 보르헤스나 필생의 역저 <황금가지>로 유명한 영국의 프레이저경은 애꾸눈 정도가 아니라 책 때문에 아예 장님이 되어 버렸지만 특히 소역을 떠올린 이유는, 궁성을 둘러싼 적군의 창칼을 바라보며 “만 권이나 되는 책을 읽었는데 오늘 나에게 주어진 것은 이렇게 나라의 패망뿐이란 말이냐,”며 동각죽전(東閣竹殿)에 불을 질러 이제껏 모았던 10여 만 권의 장서를 불살라버린 고사 때문이다.
이에 기탁해 일부 역사학자들은 양나라의 패망 원인으로 염정(艶情) 또는 궁체(宮體)시로 대표되는 당시의 “방탕문학”을 꼽기도 한다. 이를 흔히 망국지음(亡國之音)이라고 일컫지만, 문학이 나라를 망쳤다기보다는 어차피 망해버릴 나라이고 퇴폐에 중독된 사회였기에 그런 문학이 출현했다는 생각이다. 예부터 대부분의 문장이나 문학은 당대를 비쳐내는 거울이며 결과물이다. 문학은 국가의 얼굴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晉)나라에 살던 사광(師曠)이란 사람은 남쪽의 초나라 군대가 북진해오자 안색 하나도 변하지 않고 “조금도 근심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북쪽의 노래를 불러보고 또 남쪽의 노래도 불러보았는데 남쪽의 노래가 굳세지 않고(南風不競), 또 죽은 소리가 많습니다(多死聲). 초나라는 반드시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짐작대로 초나라는 패하여 물러가고 말았다. 여기서 노래란 문학을 말하는데, 글을 읽어 전쟁의 승패를 점쳤던 사광의 판단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가 있다.
이후 남풍불경(南風不競)이라는 말은 기세가 드세고 호방하며 남자다운 황하의 북풍문학이 섬세하고 유연하며 여성적인 양자강의 남풍문학을 경시하는 용어로 정착되었지만, 칠백 여 년이 흐른 후, 이 네 글자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글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황제의 탄식을 불러일으킨 남풍사건이 바로 양나라의 패망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부터 시대를 이끄는 글은 드물다. 그런 선구적인 글은 곧잘 시대의 흐름에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는 죽어서야 필명을 날리는 무명의 슬픔이기도 하다.
때로 나는 나의 경박한 잡설에 질식당한다. 작품과 작가가 같으냐 아니냐에 대한 공론이 지금도 분분하지만, 작가의 화신이 곧 작품이고 작품은 작가를 가늠하는 저울이라는 판단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옥따비오빠스가 ‘가장 완벽한 시는 내면에 있다.’고 말했듯이 문장은 자기 안으로부터 나오기에 작품은 곧 작가의 얼굴이라는 끔찍한 결론이다. 산이 어디에 있는가? 산은 스스로 산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산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아무리 객관적인 관찰에 의한 기술도 알고 보면 작가의 은밀한 사생활의 고백에 불과하다. 이는 작품이 작가를 넘지 못한다는 한계를 의미한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는 자기가 쓸 수 있는 것만을 쓴다.” 그리하여 언제나 글을 쓰는 자가 먼저다. 작품은 지나온 발자취에 지나지 않는다. 원로문인들은 곧잘 말한다. “큰 인간이 먼저 되어라.”
근래에 “사광의 글눈”이 여간 나를 괴롭힌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중국 위진남북조시대(AD 280~589), 약 삼백 년간의 역사와 문학을 대충이나마 정리해보지 않고는 못 견딜 것만 같았다. 중국역사에 있어서 “문학의 자각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위진남북조시대에 흥국의 문학과 망국의 문학을 일목요연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어떤 요체가 들어 있을 법도 했다. 어떤 문장이 기가 드세고 건강하고 호방하며, 어떤 것이 추하고 퇴폐적이며 나라를 말아먹을 문장인가를 알아 볼 수 있는 바로 사광의 글눈이 부러웠던 것이다.
중국 문장이 경전과 그 주석의 도구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의의를 확립한 시기가 위진남북조시대다. 말하자면 글을 갖고 논다고나 할까, 미학을 추구하여 문장을 격이 잡힌 문학으로 승화시키고 중국문학 전성시대인 당송문학의 초석을 마련한 공적은, 우리에게 친근한 삼국지라는 소설의 배경이 된 시대로부터 그 후 약 삼백 년간 번갈아 명멸한, 건안문학과 태강문학, 그리고 영명문학에 돌려야 할 것이다. 건안문학은 흥국지세(興國之勢)요, 태강문학은 태평지세(太平之勢)며, 영명문학은 망국지세(亡國之勢)로서, 문학의 흥망성쇠가 비교적 또렷하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는 교활하고 잔인하며 무자비한 인물로 후대의 작가들에 의해 그려졌지만 사실 흥국의 기세가 충천한 대단한 문인이었다. 조조뿐만 아니라 건안문학을 주도했던 그의 아들 조비, 조식의 재능도 출중했기에 이들 세 부자를 삼조진왕(三曹陳王)이라고 한다. 부자지간에 서로 필명을 날린 경우는 당송팔대가 중 세 자리를 한꺼번에 차지하는 소순, 소식, 소철의 문장가 집안이 있지만 이는 흔치 않는 일로서 문학재능은 부자간에도 서로 본받을 수 없다는 속설을 무색케 한다. 하여튼 조조는 문장가로서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문인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도 또한 깊었다.
중원의 패권이 좌우되는 관도전투 때 진림은 적장 원소의 부하였다. 원소는 진림에게 명하여 조조를 능멸하는 격문을 쓰게 했고, 마침 편두통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던 조조에게 이 서신이 도착했다. 얼마나 글이 조조를 잘근잘근 멸시하고 짓밟아 들어가는지 삼대까지 싸잡아 욕하는 장면에서 조조는 그만 기혈이 치받아 편두통이 싹 가셔버리고 말았다.
후인들은 이것을 두고 “진림의 격문은 편두통을 낫게 한다”(陳琳之檄, 可治頭風)고들 했다. 조조가 전투에서 승리하자 진림은 그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눈이 시퍼렇게 변한 조조가 “네가 적장의 수하로서 나를 희롱하고 멸시한 죄는 이해한다. 그러나 어찌 내 삼대 조상까지 싸잡아 그리도 능멸했는가?”라고 묻자 진림이 태연하게 말했다. “이거야말로 ‘화살이 시위에 놓였으니 쏘지 않을 수 없다’(箭在絃上, 不得不發)는 경우입니다”
조조는 이 말에 무릎을 치고 말았다. 진림의 말은 오늘로 말하면 문장론이다. 글의 기세가 그 기맥을 분출하면, 위엣 글 아래에 마땅히 따라오는 적당한 글이 놓이게 되므로 일단 서론을 시작하여 달리면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글이 따로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조조를 욕하는 글이 제대로 뻗어나가려면 그 조상까지 부득이 언급해야 마땅하고 그렇지 않다면 맥이 빠진 문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그런 뜻을 조조가 단박에 이해한 것이다. 조조는 진림을 아껴 자기 수하에 두었고 자기의 모든 서류를 맡겼다. 조조의 글은 모두 진림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서 ‘대단한 글 솜씨’(大手筆)라고 사람들이 평했다. 조조는 글눈뿐만 아니라 작가를 알아보는 눈도 아울러 갖추었으니, 경전의 주석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중국문학의 태두로 일컬어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앞에 내가 서면 어떠했을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사광의 눈에는 오늘 우리의 문학이 어떻게 보일까. 도서관 열람실에 섰다. 내 키보다 더 높이 쌓인 수천 권의 문학서적 앞에서 눈을 껌뻑인다.
(2012. 일월 초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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