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의 작품

껍질 1, 2, 3

미송 2012. 1. 24. 21:33

 

 

 

껍질 1

 

지렁이가 지렁이를 벗으려고

몸을 앞으로 내미오 지렁이가 지렁이를 벗으려고

땀 흘리며 기고 있소

지렁이였소 더 큰 지렁이였소

지렁이는 지렁이로부터 지렁이를 빼내려고

지렁지렁 기고 있소

지렁이는 기고 있소

지렁이는 기고 있소

 

노숙자 무료급식으로 유명한 ‘밥퍼’의 최일도 목사는 지렁이 때문에 아내와 10년을 싸웠다고 한다. 최목사가 신혼살림을 차렸던 집이 얼마나 누추했는지 모르지만 부엌바닥에서 지렁이가 나왔고 젊은 아내는 기겁을 했다. 문제는 지렁이에 대한 해석이었다. 지렁이가 뭐 그리 징그럽다고 그러느냐, 다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이것이 최목사의 지론이었고, 털 없는 짐승은 뱀을 비롯해서 다 싫다는 아내의 서슬이었다. 10년을 싸웠다니 지렁이가 꾸준히도 부엌에서 나온 모양이다.

 

아침에 왜 내가 지렁이를 떠올려 시라고 끄적였는지 모른다. 처음 쓸 때는 그저 낙서였는데 지우기가 좀 아까워, 시적 형식으로 나열하곤 이 낙서의 원천을 하루 종일 더듬어보기로 했다. 말하자면 오늘의 화두는 지렁이였다. 나도 지렁이를 끔찍이도 싫어한다. 뱀은 옛날에 땅꾼을 친구로 사귄 덕에 손으로 만지기도 하고 눈과 코와 입과 날름대는 혀의 위치와 각도를 자세히 재고 살펴, 뱀도 잘 생겼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지만, 지렁이는 내가 젊었을 때 낚시를 못 배운 이유가 될 정도로 징그러웠다.

 

그런 지렁이가 왜 악몽처럼 별안간 떠올랐을까? 일단 위의 글을 낙서가 아닌 시라고 하자. 시는 엮는 게 아니라 한꺼번에 찍힌다는 내 시론에 의하면 그렇다. 시는 대부분 눈 뜬 꿈과 같다. 오른쪽 뇌는 비논리적이고 감성적이라고 한다. 여기서 문득문득 떠오른 잠재의식의 단편적인 그림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왼쪽 뇌로 넘어가는 중간에서, 정지한 상태로 영상과 논리가 섞여 표현되면 시가 되지는 않을까. 그래서 시는 두 눈 사이의 미간에 위치한다. 언어와 그림의 중간. 논리와 비논리의 중간, 이성과 감성의 중간, 눈 뜬 꿈.

 

몇 줄 안 되지만 위의 글은 한꺼번에, 그리고 난데없이 찍혀 나왔다. 쓰지 않았다. 우선 시는 잠재의식의 발로라는 관점에 탐조등을 들이댔다. 위의 글의 주제는 ‘답답함’이다. ‘허물에 갇혀 재탄생되지 못함’이다. 처음에 ‘내 글’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내 글이 허물을 벗지 못한다는 뜻이다. 모든 사유와 생각이 일정한 틀에 갇혀버려 머리가 굳어졌다는 말인데. 이러면 문학생명은 끝이다. 그 위기의 화면에 떠오른 첫 형상이 바로 지렁이였다면, 언제 내가 지렁이를 굽어보며 절망에 가까운 답답함을 느꼈을까.

 

기억이 안 난다. 내 잠재의식은 지렁이 영상만 툭 떠올려 주고는 사라져버렸다. 추론하건데 하나는 떠올릴 수 있다. 지렁이는 아무리 기어도 지렁이라는 말이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머리를 쑥 내밀며 기는 지렁이의 모습이 마치 지렁이가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징그러워 그 지렁이를 탈피하려는 노력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내밀어 제 몸뚱이를 빠져나오려 해도 그 몸이 그 몸이라면, 얼마나 지렁이는 애가 탈까. 어린아이는 지렁이가 가여웠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화두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지렁이 구출작전이랄까, 그래서 시어를 좀 바꿔보기로 했다.

 

중생이(내가) 중생을(나를) 벗으려고

몸을 앞으로 내미오 중생이(내가) 중생을(나를) 벗으려고

땀 흘리며 기고 있소

중생(나)이었소 더 큰 중생(나)이었소

중생(나)은 중생(나)으로부터 중생(나)을 빼내려고

허겁지겁 기고 있소

중생(나)은 기고 있소

중생(나)은 기고 있소

 

이렇게 고쳐보니 좀 싱겁다. 역시 지렁이가 제격이다. 결론을 짓자면 나는 정말 지렁이가 분명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도 나, 내가 가장 징그러워하는 사람도 나. 지렁이 구출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어린아이는 안타까워했다. 지렁이가 불쌍했다.

 

 

 

껍질 2

 

설날 벽두부터 지렁이 타령이라니, 어리빙빙한 글 몇 조각을 문득 써놓고 고민고민 쌕쌕 거리다가 <껍질>이라는 제목으로 그 변명을 잔뜩 늘어놓고는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게 또 여간 고민이 아니었다. 컴컴한 천정을 바라보고 꺼벙대다가 뭐가 못마땅한 듯이 몸을 획 뒤집어 엎드렸다가 좌측우측으로 철퍽대고, 어둠 속에 꾸물대고 노는 꼴이란 내가 진정 답답한 땅속에 들어앉아 겨울잠 든 지렁이가 맞는 것도 같아, 좀 분한 마음이 끓어오르기도 했다. 많고 많은 비유 중에 하필이면 흉측한 지렁이라니, 달팽이는 어땠을까? /달팽이가 달팽이를 벗으려고/ 몸을 앞으로 내미오/ 달팽이가 달팽이를 벗으려고 땀 흘리며 기고 있소/ 이미지가 예쁘다. 지렁이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지렁이는 이미 <껍질>이란 제목으로 밖에 실려 나갔다. 아침에 눈을 뜨자 먼저 든 생각이 억지로라도 이 지렁이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 뭔가의 아귀를 짓는 일이었다. 글은 산뜻하게 끝맺음을 해야겠지만 때로는 지리멸렬하고 집요할 필요도 있다. 일부러 실패하는 것도 작가의 근성이다. <껍질> 2탄을 쓰기로 했다. 어린아이는 지렁이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구하기>처럼 ‘지렁이구출작전’을 다시 펴기로 했다.

 

“저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스승에게 제자가 던진 질문이었다. 스승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즉시에 대답했다. “없다!” 그러자 제자는 항변했다. “전에 스승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저에게 없다고 하십니까?” 그러자 스승은 “불성이 자기에게 있냐고 네가 물었기 때문이다.”고 대답했다.

 

불성(佛性). 고승의 대화에서 ‘불성특공대’를 일단 조직했다. 조직하고 보니 좀 버겁다. 사실 내가 가장 읽기 어려운 책이 불경이다. 가르침을 모은 경장, 지켜야 할 율장, 그리고 신학이라고 볼 수 있는 경장의 해석서인 논장이 있는데, 경장을 이해하려면 논장을 필독해야 한다. 그런데 흔히 시보다도 시를 해설하는 평론이 더욱 어렵듯이 정작 부처님의 말씀보다는 그 말씀을 왈가왈부하는 주변의 이야기가 요해부득이라서, 책을 몇 페이지만 넘겨도 벌써 나는 혼란에 빠져드는 것이다.

 

세계적인 불교학자 콘젠은 “불경이 성립될 시기에는 모든 언어가 자명한 이치라서 특별히 따로 공부하고 해석할 필요가 없었지만, 불경이 이천 오백 년이 흐른 지금은 애초에 사용된 단어의 뜻이 변하고 왜곡되어 원래의 경지에 다다르기 힘들다.”고 탄식했다. 고전을 읽다보면 이런 현상은 다반사다. 불경에 ‘평등’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면 나는 오늘의 관념으로, ‘경제적 평등, 사회적 지위의 평등, 남녀나 만인의 평등’을 퍼뜩 떠올리지만, 이천 오백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의 ‘평등’은 공(空)이나 무아(無我)나 여래(如來)와 같은 개념이다. 구체적으로 더 파고들면 정말 머리가 뻐개진다. 번뇌와 언어가 벗겨진 장에서는 너와 내가 하나고 내가 곧 전체고 전체가 곧 나고, 빈 것이 꽉 찬 것이고, 꽉 찬 것이 곧 빈 것이고, 그러다가 기가 막힌 것은,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전체는 전체일 뿐이고 나는 나일뿐이고, 빈 것은 비었을 뿐이고 꽉 찬 것은 찼을 뿐이고, 그렇게 오물조물 아리송송 흘러가다가 까막까막... 어느덧 내가 뭐를 하는지도 모르게 사라져버린다. 잠들고 만다. 오죽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제일 큰 장애가, 부처님 살아생전에 내가 태어나지 않았음이라고 모두들 한탄을 할까.

 

이렇게 처참하고 황당한 지경의 부처님 말씀이라도 거기에 지렁이의 생명이 달렸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저지른 실수고 꼴값에도 불구하고 나는 달려가는 수밖에 없다. 지렁이라는 시에게 또 하나의 극히 아름다운 시를 붙여, 시를 시로 평론을 해본다. 불설반야바라밀(佛說般若波羅密), 즉비반야바라밀(卽非般若波羅密),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密), 부처의 설하신 지혜가, 지혜가 아님으로서, 곧 지혜인 것이다.

 

이것이 금강경 전체를 꿰뚫는 테마인데, ‘A는 A가 아님으로써 곧 A다.’라는 묘한 화법은 반복하여 변주를 계속한다. ‘하나도 남김없이 중생을 구제하여 멸도 하였다, 그러나 많은 중생들 중에 멸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가르침을 전하였지만 가르친 자도 없고 가르침을 받은 자도 없으며 가르침도 없었다.“ 대충은 다 이런 식으로 알듯 모를 듯 언설을 화려하게 펼쳐 나가는데, 경지가 언뜻 와 닿지 않는다. 그런데 뭔가는 있을 법하다. 호기심이 간다. 논리기법도 시적이다. 여기서부터 나의 불행이 시작되었고 오늘날 그만 지렁이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소 닭 개 돼지 말 파리 물고기 낙지 오징어 지네 지렁이 바퀴벌레 이 벼룩 등등 수많은 중생들 중에 인간의 탈을 쓰기가 제일 어렵단다. 한 번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구백 년에 한 번씩 바다 위로 떠오르는 장님 거북이가 흘러 다니던 구멍 난 나뭇조각에 머리를 탁 끼울 확률이라나, 사실 중들이 이렇게 황당한 말을 쫑알거리면 나는 그 입술이 미워져서 죽을 지경이다. 종교인이나 철학자들은 사태를 꼭 극단으로 밀고 가는 경향이 있다. 너무 기가 막혀 “그렇다면 내가 큰 혜택을 받은 거네요.”하면 중들은 얼른 말을 이어받아, “사람의 탈을 쓴 지금이 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받들어 윤회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입니다. 절에 나와서 불공을 열심히 드리십시오.” 요렇게 결론짓고 만다. 물론 내 눈엔 저기 보이는 불전함이 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경을 손에서 놓지를 못했다. 오히려 자꾸 빠져들었다. 이런 학자 저런 학자의 책을 집적대며 벌레처럼 야금야금 쥐어뜯고, 앞장이 어려우면 그냥 뒷장으로 건너뛰고, 그렇게 몇 년간 고생하다가 얻은 결론은 원래 불경이 어려운 게 아니라, 내 머리가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오늘의 내 사고나 사유전개 방식이나 머리에 쌓인 개념과 지식이나 그것 모두가 불경을 공부하기에는 적합지 않기에, 다른 말로는 다 번뇌요 망상이고 허공에 핀 꽃이기에 나를 깨뜨리고 없애지 않으면 불경의 불(佛)자에도 접근이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아마 중들이 나의 이런 모습을 보면 번들대는 머리를 흔들어 좋아할 터이다. “불법에 인연이 깊군요.”하며 고소해 할 것이다.

 

그렇다. 법이 법이 아님으로서 곧 법이다. 부처가 부처가 아님으로서 곧 부처다. 일견 간단지만 아리송한 변주는 계속 된다.

아, 정말 내가 뭐를 쓰는 거지? 지렁이로부터 출발하여 지렁이로 가는 길인데, 지렁이구출작전을 벌이는데, 왜 자꾸 부처니 뭐니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지? 물론 어떤 연관이 있어서 그런 게 분명한데, 부처 이야기만 했다 하면 오 분도 못되어 횡설수설해지고 마는 일이라서, 내 글은 분명 삐끗할 위험에 처해있다. 정신을 가다듬자. 작가란 눈을 똑바로 뜨고 실패로 뛰어들기는 할망정, 정신없이 실패하는 자는 아니다. 에라, 몸 던지자.

 

번뇌의 한 가운데 섰던 자가 있었다. 나는 쿠마라지바다. 내 이름은 문화사 교과서에 나온다. 나라의 왕자로서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던 정신적 지도자. 동쪽으로 불경을 전한 전도자, 산문체의 산스크리트어를 운문체인 중국어로 번역하여 내 글은 한 자 한 획이라도 틀림없어 화장하여 내 몸이 다 불길에 사라져도 내 혀는 타지 않고 남을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던 언어학자, 쿠마라지바를 당신은 아는가. 그의 절망과 고뇌와 번뇌와 성취와 사라짐을, 그리고 지금 팔만대장경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그의 혀를 아는가.

 

이제 지렁이는 수필에서 소설로 넘어간다. 아침에 아내는 투닥투닥 땡겅땡겅 주방에서 오락가락하더니 김치찌개를 끓여 놨다. 오늘은 설 명절 다음의 공휴일이지만 아내는 특근하러 일찍 밖으로 나섰다. 부스스한 눈으로 이불을 무릎에 감싸 일어난 나를 아내는 현관을 열며 쳐다봤다. “다녀 올 게요.” 그녀의 말 뒤로부터 불어오는 영하 18도의 바람. 그 찬 기운에 정신이 깬 후, 어제의 화두를 오늘로 이어가는 중이다. 정초의 횡설수설, 쥐꼬리만한 문학이라도 내게 있다면 올해의 첫 글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밥을 먹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자. 지렁이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2탄에 이은 껍질 3탄. 내 이름은 쿠마라지바다.

 

 

껍질 3

 

내 나라 쿠차왕국을 아는가, 초록의 나라를 아는가. 북쪽 하늘을 둘러친 천산의 하얀 봉우리에서 맑고 차가운 물이 졸졸 흘러내려 내를 이루고, 성안으로 빙 돌아 곡식과 온갖 과일을 여물게 한 후 멀리 사막으로 스며들고, 서역으로 가는 사람 동쪽으로 가는 나그네들이 시원한 그늘에 몸 눕히면 낙타가 한껏 물을 들이켜 순하디 순한 그 눈이 더욱 편안해지는 나라, 달뜨는 밤이면 금빛모래가 광막한 형체를 드러내 지평선까지 달리고 별들이 머리에 툭툭 걸려 별똥이 빛을 발해 사방에 흩뿌려지는 나라, 나는 사막의 휴식처, 그런 나라의 왕자였다. 어머니는 공주였다. 아버지는 서역 어느 나라의 귀족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 날 기뻐했다, 슬퍼했다. 무량의 전생을 흘러내려와 자기 몸에 살포시 깃든 뭇 중생을 어머니는 어여삐 여겨 기뻤고, 노병사(老病死)와 고통의 발단으로서의 생(生)을 자식에게 물려주어 그것이 슬펐다. 나에게 젖을 물린 채 어머니는 관음상 앞에 무릎을 꿇어 일어설 줄 몰랐다. 지수화풍(地水火風) 몸의 사대물질이란 불어오는 바람에 쌓였다가 다시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는 모래언덕과 같은 것, 그렇게 허망한 몸에 깃든 마음과 정신이란 또 신기루와 같은 것, 산후의 붓기마저 가라앉지 않은 어머니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 줄기 자비의 강이었다.

 

커갈수록 아버지는 남의 말을 잘 엿듣는 나의 호기심에 주목했다. 당시 사막을 건너는 대상들은 쿠차왕국을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이나 낙타들은 여로의 피곤한 몸을 여기서 잠시 풀었고 먼 길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사원에도 몰려들었다. 대상들은 각기 다른 말을 썼다. 서역에서 온 사람들이나 동쪽 중국에서 온 사람들의 말이 달랐고 서역도 고장이 다르거나 중국도 역시 고장이 다르면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다섯 살 뿐이 안 되었지만 여러 나라의 말을 분명히 구분해내는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런 재능을 믿고 아버지는 나를 서역과 천축으로 보냈을 것이다. 이 뒤에는 어머니의 입김도 많이 작용했다. 내가 쿠차왕국을 떠나 서쪽으로 향할 때 어머니는 낙타 위에 올라탄 나를 우러러 조용히 합장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마치 부처님을 우러러 경배하듯이 나를 대한 어머니의 작별인사는 ‘부디 불법을 구하여 스스로를 멸도하고 중생을 멸도 하라.’는 염원이었다. 당시 나는 아홉 살이었다.

 

천축에서의 20년, 훌륭한 스승과 도반들 틈에서 낮에는 경, 율, 논 삼장에 몰두했고 해가 지면 명상에 들었다. 무엇보다 큰 소득은 아비달마 교학을 논파한 나가르주나의 중관론 터득일 것이다. 이는 언어의 해체에 관한 문제였다. 번뇌의 근본은 언어와 판단과 차별에 집착하는 마음에 있다. 부처는 언어를 말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본 경지를 전하려 했다. 그러나 언어를 통하지 않고 어떻게 경지를 남에게 전달한단 말인가. 부처는 언어를 사용했다. 언어로 언어를 지우는 작업이었다. 삶은 내가 부리는 마술이며 환상이다. 마술과 환상은 언어로 구체화된다. 기억된다. 오늘은 기억의 장난일 뿐이다. 그래서 번뇌는 오늘도 잃고 과거도 잃고 미래도 잃는 일이다. 그러나 과연 과거와 오늘과 미래가 존재하는가? 사실 이것도 언어의 환상이다. 시간은 번뇌일 뿐이다. 해와 달은 미망이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 어느 것도 손에 쥔 적이 없다.

 

고향인 쿠차왕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벌써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늙으셨다. 백성들은 산부처가 오셨다고 부산을 떨었다.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지나 모두들 나를 우러렀다. 저 눈빛들, 하나하나의 신기루들, 그 신기루를 벗겨내면 진여의 세상이다. 나는 백성들에게 말했다. “나는 온 적도 없으며 간 적도 없습니다. 불제자인 여러분들도 그렇습니다.” 내가 들어앉은 화염산 골짜기에 수행자뿐만 아니라 신심이 깊은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내 강론의 자리는 침 넘기는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내가 지혜를 말하지만 사람들 각자 속에는 이미 지혜가 들어있어, 나는 지혜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구한 적이 없습니다.”

 

사방으로 쿠차왕국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불국정토, 그곳은 부처님들이 사는 고장이었다. 새로운 불법을 구하여 널리 전파하는 나 쿠마라지바도 알려졌다. 이런 불국정토에 동쪽으로부터 불길한 바람이 불어왔다. 대상들은 쿠차왕국에 들리면 동쪽 중원의 피비린내를 이야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병사들이 나타났다. 여광과 그의 졸개 8만 대군이었다. 평온한 땅을 둘러싼 성은 무너졌다. 굶주린 여광의 군사들은 성벽을 넘어 들어와 약탈과 겁탈을 자행했다. 휘두르는 창과 칼이 모두 피에 젖었다. 여광은 나를 광장에 끌어내어 무릎을 꿇렸다.

 

“네가 득도했다는 쿠마라지바인가? 중원에까지 소문이 자자한 쿠마라지바인가?” 여광의 얼굴에 냉소가 흘렀다. “부처님이 지켜준다는 불국정토도 내 용감한 병사 앞에서는 형편없구나. 부처님이 도망을 친 모양이지?” 나는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평생이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장면은 처음 목격했던 것이다. 여광은 새파랗게 질린 내 표정에 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광장을 둘러싼 백성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어린애처럼 여린 네가 이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였단 말인가? 말이라도 탈 줄 아는가?” 여광은 말을 끌어내어 나를 그 위에 앉히고는 손바닥으로 말의 엉덩이를 찰싹 갈겼다. 말이 훌쩍 앞발을 들며 앞으로 내뛰자 나는 떨어지고 말았다. 여광의 군사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부처께서 말은 사나워 못 타는 모양이다. 그러면 소에 태워봐라.” 나는 소 등위에 올려졌다. 역시 금방 나가떨어져 자빠지고 말았다. 8만 군사의 비웃음소리, 쿠차왕국 백성들의 울음소리, 여광의 말처럼 부처님은 어디로 갔는가, 관세음보살은 잠에 취해 있는가.

 

토굴에 갇힌 지 며칠이 지났다. 부처의 가호를 빌며 절망을 헤집었다. 문득 토굴 앞에 여광이 큰 몸체를 드러냈다. 그의 뒤에는 젊은 여자가 한 명 서있었다. “득도하신 분,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나는 부처를 모신답시고 계율이라는 것을 만들어 여자를 멀리하는 당신이 밉소. 잘난 척 하는 그 모양새가 싫단 말이오. 자, 젊고 예쁜 여자 하나를 들여보내니 같이 동침하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이 여자는 죽을 것이오.” 나 쿠마라지바. 36년간을 수행하여 몸을 지켜왔다.

 

여인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나는 결가부좌를 틀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목을 내놓을지언정 파계는 안 된다. 망국의 성터에서 죽어간 백성들의 혼을 내가 기어이 위로하여 서방정토로 인도하리라. 궁전 계단에서 발견된 어머니의 처참한 시신도 역시 내가 수습하여 해탈의 멸도를 이루어 드리리라. 시간은 흘러갔다. 조금만 있으면 사막의 지평선에 해가 떠오를 것이다. 여인은 흐느꼈다. 해가 떠오르기 전에 나와 몸을 섞어야만 한다. 용기를 낸 여인이 주춤주춤 무릎으로 다가서는 느낌이었다. 반쯤 내려감은 눈시울을 치켜 올렸다. 다가오던 여인은 나와 눈빛이 마주치자 움찔 상체를 뒤로 물렸다. “대사님, 죄송합니다. 다가서지 않겠습니다.” 여인은 구석에 몸을 기대 웅크리고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날이 밝았다.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토굴에 들어선 사람은 여광이었다. 그는 이미 토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다 알고 있었다. 굳어진 표정의 여광은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끌어 무릎을 꿇렸다. “쿠마라지바, 너는 나를 무시했다.” 짧은 두 마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광의 손에서 검이 번뜩 날았다. 여자의 목이 땅에 떨어져 내 앞으로 굴러오고 말았다. 나는 숨을 훅 들이켰다. 여광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부처님은 자비가 아닌가. 계율이 중한가 여자의 목숨이 중한가? 오늘 저녁에도 여자를 들여보내겠다. 계율과 자비 중 하나를 선택하라.” <계속>

 

 

 

껍질 4

 

벌써 세 명의 여인이 죽임을 당했다. 어젯밤에 끌려온 여인은 얼굴이 퉁퉁 붓도록 울면서 내 옷자락에 매달려 사정했다. 살고 싶다고, 살려달라고, 동이 틀 무렵 여인은 절망했고 여광이 휘두른 칼날이 목에 닿는 순간 내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눈빛이었을까. 무량의 생을 거칠 때마다 겹겹이 쌓여온 업장의 눈빛일까, 원망은 아니었을까.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무슨 인연이 여인과 나 사이에 이런 업보를 놨단 말인가.

 

여광은 일견 고요하고 태연한 내 겉모습을 용납 못했다. 아니, 아침이면 말끔한 화색으로 잠을 깨고 밤이면 평온한 표정으로 잠자리를 찾아들었던 이 나라의 평화로움과 소소한 일상사를 못 견뎌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저 동쪽 늑대의 들판에서 태어났고 삶과 죽음의 공포를 먹으며 자랐고 피비린내를 몰고 다녔다. 병사들 틈으로 말을 몰고 달릴 때면 휘두르는 그의 창칼에 언제나 핏물이 튀었다. 비록 글도 모르고 부처님 법도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여광은 부하의 심중을 바닥까지 꿰뚫는 통찰력이나 갖은 술수를 동원한 싸움이나 적진에 먼저 뛰어드는 용맹으로서는 난세의 자식으로 손색이 없었다.

 

여광은 나를 무너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내가 견고할수록 그는 미치광이처럼 행동했다. “흥, 이년이 별로 마음에 안 드나보지?” 세 번째 여자의 목을 내리칠 때 그의 입에서 떨어진 얼음장 같은 냉소였다. 그러나 나는 광기의 눈빛 뒤에 숨겨진 여광의 냉철한 계산을 간파하고 있었다. 늘 난데없는 조급과 거칠음으로 위장된 단호하고 냉정한 그의 성격대로라면 나는 벌써 그의 칼 아래 동강이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를 죽이지 못했다. 이유는 그가 모시는 동쪽 전진(前秦)이란 나라의 왕 때문이었다. 불제자인 전진의 왕이 나를 생포하여 데려오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명령이 칼 한 자루를 쥐고 전쟁터를 전전한 여광을 식상케 했는지도 몰랐다. 여광은 원래 말이나 글만 앞세우는 사람들을 멸시했고 문약이나 종교에 깊이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확실한 북방의 장군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쿠차왕국 백성들의 정신적 맥을 끊어놓자는 정치적 의도였다. 비록 여광의 병사들에게 제압당하여 신음하지만, 내 왕국의 백성들은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의 가호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잃지 않았다. 여광은 정신적 지도자인 나의 파계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절망을 안겨 주고 싶었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계율은 어느 누구도 지켜주지 못했다. 비명에 간 여인들의 피가 몸에 흠뻑 적셔오는 느낌이었다. 겉과는 달리 내 속은 많이 흔들렸다. 네 번째 여인이 토굴 속으로 디밀어져 저만치 서 있었다. 토굴 앞에 밝힌 감시병의 횃불이 기괴한 무늬를 그리며 긴 혓바닥을 안으로 날름댔다. 어깨가 후끈해지며 뜨거운 기운이 기맥을 타고 흘렀다. 누구를 위한 계율인가? 부처님은 36세 나이에 깨달음을 얻어 설법에 나섰지만 지금의 나는 그 나이에 파계로 치닫고 있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 계율과 자비! 여광은 한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저울대에 나를 올려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감았던 눈을 지그시 떴다. “옷을 벗어라.” 신음에 몰리듯 내 입에서 떨어진 말이었다. 목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토굴을 흔드는 듯 했다. 여인은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뭔가 말을 꺼내려고 입술을 움찍거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말은 하지 말고.” 여인의 눈에서 별안간 물먹은 빛이 일렁거렸다. 잠시 망설이던 여인은 뒤돌아서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나신이 푸르스름한 어둠을 몰아내며 관세음보살의 미소처럼 뽀얀 빛을 뿜어냈다. 여인의 어깨가 보일 듯 말듯 전율했다.

 

“대사님.” 낮은 여인의 음성이었다. 나는 침묵했다. 여인은 망설이다가 다시 나를 불렀다. “대사님” 그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실오라기 하나 걸쳐지지 않은 등과 엉덩이를 드러낸 채 입을 열었다. “제 죽음을 기뻐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나는 숨을 죽였다. “수행자에게 파계란 죽음 너머까지 고통을 이어주는 커다란 죄입니다. 저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무명에 젖고 어리석은 저지만 제가 부처님 법을 따르는 대사님의 높은 뜻에 감히 동참했다 생각하시고 제 죽음을 기뻐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마지막 소원이라면 제 이름 수자타를 대사님께서 기억해주시는 겁니다. 수자타는 사원에 바칠 양젖을 허기져 쓰러진 걸인에게 먹인 처녀입니다. 그 양젖을 받아 마신 분이 석가님이 아니겠습니까. 기운을 차린 석가께서는 그로부터 일주일 만에 마라의 유혹을 뿌리치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수자타라는 이름을 제게 붙여 주셨습니다. 어찌 제가 대사님을 파계시킬 수 있겠습니까?”

 

팽팽한 긴장감에 말을 마친 여인의 호흡이 멈춘 듯 했다. 토굴 안은 무거웠다. 차를 반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까. 침묵을 깨며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여인 앞에 떨어져 굴렀다. “안 된다.” 이 말에 여인은 간신히 서있는 몸을 지탱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다리가 어둠의 파동을 일으키며 휘청댔다. “말은 하지 말라. 나에게 오라. 가까이 오라.” 화석 같던 내 입술에서 흘러나온 음성이 토굴 바닥을 기어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감쌌다. 여인은 천천히 뒤돌아 전면을 보였다. 잠시 후 눈물이 바다가 되어 다가왔다.

 

다음 날 나는 광장에 끌려 나갔다. 수많은 쿠차왕국의 백성들도 광장에 끌려나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8만 병사들의 창검이 번쩍이고 깃발이 펄럭였다. 나와 여자를 단상 높이 올려 세운 여광은 백성들을 향해 매몰찬 목소리로 기염을 토했다. “자, 너희 어리석은 자들아 똑똑히 봐라. 너희가 숭배하고 따르던 지도자 쿠마라지바, 그는 부처님의 지엄한 계율을 어겼도다. 여자와 밤새 히히덕대며 살결을 붙여 놀았단 말이다. 요부 노릇을 했던 여자도 옆에 서 있도다. 나라가 망한 지경에도 여색에만 정신을 팔아 골똘했으니 평소에 그의 행동이 어떠했겠는가, 파계를 일삼아왔던 저 위선적인 쿠마라지바의 몰골이 너희들의 눈에는 안 뵌단 말인가?”

 

일순 광장에 싸늘한 기운이 내려앉으며 숨소리마저 그친 듯 했다. 백성들의 황망한 표정과 눈길이 내게 먼저 쏟아졌고 다음으로 여자에게 달려갔고, 사막에서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고, 햇볕이 따가웠고, 나 쿠마라지바는 초라했다. 여광의 군사들이 일제히 와 하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승려라는 너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아예 저 여자와 살림을 차려 줍시다.”하고는 손가락질하며 웃어댔다. 입을 굳게 다문 백성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메말라져 그들의 눈동자가 안으로 쑥 들어가 보였다. 출가하여 나를 따랐던 수많은 제자들은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수치와 모욕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내 머리를 휘감았다. 왕자이고 수행자며 불법의 지도자였던 나는 침묵과 비웃음 사이에서 맥없이 고개를 수그려 떨어뜨렸다. 패망의 핏물에 발을 얹고 겨우 목숨만 건진 가엾은 백성들 앞에서 말이다.

 

동으로, 동으로, 쿠차왕국의 금은보화와 청금석과 온갖 재물, 그것을 등에 진 낙타 행렬은 백리의 꼬리를 뻗으며 동으로 향했다. 포로가 된 남녀 백성들도 행렬을 길게 이루며 사막을 건너고 천산의 좁은 계곡을 비틀비틀 더듬어 끌려갔다. 독수리들이 창공을 빙빙 돌며 우리의 뒤를 따랐다. 가다 무릎이 꺾이면 독수리 밥이 되었다. 나는 귀한 전리품이었다. 여광은 나를 수자타와 함께 낙타 등에 같이 태웠다. 내게는 깨끗한 승복을 입혔으며 수자타에게는 쿠차의 복색을 화려하게 갖추게 하여 “서역의 부처님이 부인과 함께 납십니다.”라고 아침이면 병사들에게 소리치게 했다. 이는 병사들과 지나는 고장의 사람들에게 나를 구경거리나 조롱거리로 만들고, 또한 끌려가는 내 백성 불쌍한 포로들에게 회복할 수 없는 절망과 체념을 주입하려는. 그리고 조롱거리가 된 내 모습 그대로를 “폐하께서 눈 씻고 찾던 서역의 고승이란 자가 바로 이렇습니다.”라며 전진의 왕에게 보여주어, 왕이 불가를 경계하게 하려는 여러 가지 의도로 보였다.

 

그믐밤, 도망친 포로를 붙잡으려고 저녁나절에 호각을 불며 부산을 떨던 병사들도 잠이 들었다. 포로가 된 내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멀리 감시병들의 그림자만 오락가락 보였다. 얼마나 오래 동쪽으로 끌려왔는지 모른다. 오전나절에 지난 고을이 돈황이라고 했으니 땅바닥은 아직도 모래지만 내가 중원 초입에 들어선 것만은 분명했다. 고향하늘 쪽으로 정좌를 하고 손을 모았다. 지금은 폐허가 된 나라, 아직도 흘러넘치던 피가 굳지 않은 모양이다. 피비린내가 공기에 묻어나는 듯하다. 문득 뒤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늘 밤도 수자타의 숨죽인 울음소리다. 울음이 어디 그녀에게 뿐이랴, 저 별들도 울먹울먹하지 않는가.

 

“대사님” 수자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화석처럼 가만히 있었다. 쓱쓱 바닥을 끌며 무릎으로 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사님” 이번에는 등 뒤 가까이에서 들렸다. “잠자야지. 내일도 고된 행군인데.”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러자 수자타는 울음 섞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토굴에서 대사님을 만났을 때, 대사님이 오라고 말씀하실 때 제가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아까 돈황의 거리에서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대사님께 파계승이라는 야유를 보내고 놀리던 모습이 눈에 너무나 선합니다. 대사님, 저를 죽여주십시오. 아니면 제가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릴까 합니다. 대사님을 파계에 이르게 한 저의 죄, 천생만생을 죽었다 태어나도 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누가 나를 파계에 이르게 했단 말인가?” 내 입에서 육중한 음성이 떨어졌다. 흠칫 하듯이 잠시 뒤가 조용했다. “제가... 저 수자타가 그랬사옵니다.” 모깃소리만한 목소리였다. “어서 잠을 자두어라.” 수자타의 말문이 막힌 듯했다. 등 뒤에 캄캄한 침묵만 맴돌았다. “내 말을 잘 들어 두어라. 물론 나는 너와 몸을 섞었다. 누가 봐도 나는 파계승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이 일은 여광과 나와의 싸움이었다. 여광은 창칼로 우리를 지배하려 들었고 나는 불법의 힘으로 그에 대항하려 했다. 그리고......” 문득 남쪽 하늘에서 수직을 그으며 별똥이 떨어졌다. 뒤를 이어 또 하나가 떨어졌다.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떼었다.

 

“여광이 나의 목을 칠 수는 있어도 부처의 목은 치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여광은 그런 자다. 전란 통에 내 백성들이 저 별만큼이나 무수히 죽었고 부녀자들이 겁탈을 당했고, 그것도 모자라 백리의 긴 행렬을 이루고 독수리 밥으로 몸을 내주면서 동녘으로 붙잡혀 오고 있는데, 내가 파계승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일이, 어린애들까지 뛰쳐나와 혀를 내밀어 놀리는 일이, 또한 날마다 병사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일이, 무슨 큰일이고 대단한 수모란 말인가. 네가 죽는다 죽는다 하지만 간밤에 잠깐의 꿈을 꾼 자나 밤새 긴 꿈을 꾼 자나, 잠에서 깨면 다 마찬가지다. 무량을 흘러가는 중생의 끝없는 인연과 인연을 한 토막 잘라내 슬퍼하지 마라. 증오도 원한도 인연의 물결이고 잠시 불었다 지는 바람이거늘...... 수자타야,” 나는 서서히 몸을 뒤로 돌렸다. 수자타는 모래바닥에 두 손 모아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다. 팔을 뻗어 수자타의 한 손을 잡았다. 수자타는 손을 내맡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속울음에 어깨만 가냘 피 들먹였다.

“수자타야, 너는 나의 도반이다. 나의 수행을 돕는 동반자란 말이다. 너는 나를 파계시킨 적이 없다.”

 

2012. 1. 24 이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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