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최종천<희망을 꺼놓자>외 3편

미송 2012. 1. 20. 18:59

 

    

     

    희망을 꺼놓자

     

    인간이 희망을 켜놓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므로

    희망이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는 것은 인간에게 좋지 않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희망으로는

    식물을 재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꺼버리면 어떨까요?

    절망은 희망의 위성 같은 것으로서

    희망의 빛을 반사하여 빛나고 있기에

    희망을 꺼두면 절망도 빛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가 사막화하고 있는 것은

    태양보다 희망이 더 빛나기 때문입니다

     

     

    자폐증

     

    무슨 말을 하랴

    그 오랜 시간과 사랑을 말하기엔

    사과 한알이면 충분하다

    객관적 상관물!*

    사과 한알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우리 선희밖에는 없다

    자폐증을 앓는 선희는

    말보다 사과에 집착한다

    오늘도 선희는 사과를 열고 들어갔다

    사과를 열면 이 세상보다 더

    넓고 찬란한 세계가 있다

    사랑해, 하면 선희는 사과를 들어 보인다

    처절한 개성으로부터의 도피*

    시는 둥근 과일처럼 만져지고 묵묵해야 한다**

    선희가 들어 보이는 사과처럼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한다**

    노자나 쏘크라테스도 예수도

    도무지 말하지 않았다 쓰지도 않았다

    선희가 열고 들어간 세계에서 

    그들이 놀고 있다

     

    *엘리어트(T. S Eliot)의 시론에서

    **머클리시(A. MacLeish)의 [시법]에서

     

     

     

    실패한 연애를 위하여

     

    여름에 내리는 주먹만한 우박

    벌써 봄인가 싶어 겨울에 피어보는 개나리

    유부녀인 줄도 모르고 꼬리를 저으며 따라다닌

    나의 실수는 한동안 구경거리였다

    그녀는 이를테면 태양 같았다

    나는 가끔 이상난동을 부리는 날씨처럼 살고 싶다

    나는 모자라서 거기에 적임자

    이번에 시작한 연애도 햇갈리기는 마찬가지

    그녀가 처녀인지 유부녀인지

    똥과 된장은 구별이 안되고

    나의 후각은 마비상태다

     

    나같은 모자란 놈을 위해

    실수는 실패가 아니다

    자연에는 실패가 없다

    문명은 실패를 통하여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행한다

    질서가 없이도 아름다운가?

    단순함이 복잡함을 이길 것이다

    질서가 무질서를 이길 것이다

     

    예술은 실수의 수납공간이다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완성이란 없다, 이것이

    성공한 연애보다 실패한 연애가

    아름다운 이유다, 실패한 연애는 

    내 시의 실체이자 실재다

    매번 성공하는 연애는 무질서를 낳는다

     

     

     

    나는 소비된다

     

    헤겔전집을 읽을 때 베토벤을 들을 때

    나는 의미를 소비하고

    의미는 나를 소비한다

    의미에 나를 담아두고

    어언 십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나를 팔아먹고 비어 있다

     

    의미를 소비하지 못하는 인간

    그를 우리는 무식한

    문화를 모르는 인간이라고 한다

    자신을 상징으로 만들지 못하는 인간은

    적어도 천재는 아니다

    천재가 이 지상에서 한 일이라고는

    모순을 한층 치밀하고 정교하게 만든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오류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예수의 상징에 절하는 사람들

    헤겔의 상징에 머리를 싸맨 사람들

    베토벤의 상징으로 귀를 막아버린 사람들

     

    헤겔전집 속에는

    헤겔이 소비한 헤겔이

    문자로 분해되어 있다

    그를 만나기 위해선 모든 문자들을 조립해

    만질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만들어야 한다

     

    불가능한 시행착오의 쓰레기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실재인 자신을 버리고 허구를 살고 있는가    

     

    시집<나의 밥그릇은 빛난다> (2007, 창비) 中에서.

     

     

    최종천(崔種天) 

    1954년 전남 장성에서 출생했고, 1986년 [세계의 문학], 1988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눈물은 푸르다](2002)가 있으며, 2002년 제 20회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