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건너온 징검돌들을 다시금 되돌아가자면 그만 부스러지고 말 것만 같다.
천상 저편으로나 하나씩 더 놓으며 가야 하리."
장석남 시인이 시집에서 밝힌 등단 25년 소회다.
<문학동네 제공>
장씨는 2년 만에 펴낸 새 시집[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에서 비움과 느림의 삶을 추구한다. 가난을 '맑고 호젓한 가계(家係)'라 부르며 '그런 데 가서 그 아들 손주가 되겠다'고 하고('가난을 모시고'에서), '저물면 아무도 없는 데로 가자/ 가도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모과의 일')라고 노래한다.
그의 '호젓함의 서정'(문학평론가 엄경희)은 오롯이 자연에서 길어낸 것이다. '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 이른 봄빛의 분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발목이 햇빛 속에 들었습니다/ 사랑의 근원이 저것이 아닌가 하는 물리(物理)도 생각하고 있습니다'('안부'). '흰 돌멩이 처음 그 자리에 앉던 시간의 문 따고 나오는 눈빛 따스하여 나는 그걸 알뜰히 모아 새 담장을 치려 한다// 문은 새삼 내지 않으려 한다'('담장').
'봄빛의 분주'와 '돌멩이의 눈빛'에서 생의 이치를 읽어내는 시인의 통찰은 기다림이라는 노역의 대가다. '수로에 외발로 서서 고개 움츠리고 비 맞는 왜가리'처럼 '어떤 기다림도 잊고 다만 기다림의 자세만으로 생을 채우려 용맹정진'하는 와중에 드물게 찾아드는 깨달음이다('수로에서'). 이를 위해 시인은 '어머니의 기도를 버리고 또/ 세상의 불빛도 아득'한 오솔길을 자진해서 걷는다('오솔길을 염려함'에서).
이처럼 험한 생의 여정은 그러나 시인 스르로 고고해지기 위함이 아니다. 수록시 '물의 여정'의 결구는 이렇다. '한겨울 시퍼런 얼굴을 씻는 절간 수좌의 손가락 사이에선/ 그만 냉기도 성씨도 놓고 마는/ 이민자가 되는'. 그러니까 시인은 '절간 수좌' 같은 자신의 고행이 세상의 '냉기도 성씨도' 눅이는 데에 보탬이 되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이런 이타심은 '내 유산으로는/ 징검다리 같은 것을 하고 싶어'('나의 유산은')라는 바람에서도 확인된다. 별러서 장만한 무쇠 솥에 거는 흐뭇한 기대에서도. '이 솥에 닭도 잡아 끓이리/ 쑥도 뜯어 끓이리/ 푸푸푸푸, 그대들을 부르리'('무쇠 솥')
속화되는 자신에 대한 절절한 반성을 담은 지난 시집 <뺨에 서쪽을 빛내다>(2010)를 거쳐 시인은 한결 초연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혹독했을 자기 단련을 증거하듯, 시어도 한층 차분하고 농밀해졌다.
안부 / 장석남
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
이른 봄빛의 분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발목이 햇빛 속에 들었습니다
사랑의 근원이 저것이 아닌가 하는 物理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빛이 그 방에도 들겠는데
가꾸시는 매화 盆은 피었다 졌겠어요?
흉내내어 심은 마당가 홍매나무 아래 앉아서 목도리를 여미기도 합니다
꽃봉오리가 날로 번져 나오니 이보다 반가운 손님도 드물겠습니다
行事 삼아 돌을 옮겼습니다
돌 아래, 그늘 자리의 섭섭함을 보았고
새로 앉은 자리의 청빈한 배부름을 보았습니다
책상머리에서는 글자 대신
손바닥을 폅니다
뒤집어보기도 합니다
마디와 마디들이 이제 제법 古文입니다
이럴 땐 눈도 좀 감았다 떠야 합니다
이만하면 안부는 괜찮습니다 다만
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