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生命의 서사敍事를 연주演奏하는 샤먼,
□ 김선우: 2년 전부터 춘천에서 지냅니다. 간간이 토지문화관 같은 곳에 들어가 한두 달 정도 집중 작업을 할 때도 있지만, 춘천으로 집을 옮긴 후엔 예전보다 작업실을 많이 옮겨 다니지 않아요. 취재나 구상을 하는 단계에선 여러 곳들에서 영감을 받았고요. 『세 개의 달』 의 경우엔 경주 불국사를 비롯해 기림사 등 경주 근처의 절집들에서 많이 머물렀지요.
그리고 연재에 대해선, 지난 2009년에 인터넷서점 예스24에서 운영하는 웹진에 일일연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연재한 소설이 2010년에 출간된 『캔들 플라워』 이구요. 이번 『세 개의 달』 의 경우는 주 1회 연재라 일일연재보다는 좀 덜 숨 막힙니다. 쓰면서 뭔가 배우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작업이 저는 좋은데요. 그런 의미에서 『세 개의 달』 은 긴장과 함께 큰 산 하나를 넘는 듯한 즐거움을 동시에 주고 있고요. 연재 글을 쓰면서 달라지는 일상은, 글쎄요, 생활이 심플해진다고 할까요.
■ 김명원: 소설 창작을 작정한 계기가 조세희 선생님으로부터의 권유라고 들었는데요.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인지요?
□ 김선우: 글쎄요, 창작자들에게 창작의 계기는 본질적으로는 창작자 자신의 내면의 욕망에서 발현되는 거겠죠. 누가 뭘 권유한다고 해도 자신의 내면에서 뭔가 준비되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아주 오래 전, 2000년에 첫 시집과 2002년에 첫 산문집을 막 출간했을 무렵, 조세희 선생님께서 제게 전화를 주신 적이 있었어요. 제가 너무나 좋아하던 분인데 직접 전화를 주셔서 깜짝 놀랐지요. 그때 제가 신문에 독서칼럼을 쓰고 있었는데, 제 칼럼을 읽으시고는, 이 시인이 꼭 소설을 함께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대요. 그래서 제 전화번호를 수소문해 직접 전화를 하신 거였어요. 그날의 기억이 아직 생생합니다. 첫 통화였는데 퍽 긴 통화를 나누었지요. 그런데 그때는 제 속에 소설에 대한 열망이 그리 크지 않았어요. 시인으로서 도달해야할 바닥 같은 것에 더 치열하게 당도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그렇게 세 번째 시집에 이르자 이제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소설에 대한 열망이 슬슬 생겨나기 시작하더군요. 조세희 선생님께서 응원해주신 것이 용기가 많이 되었구요.
■ 김명원: 그렇게 해서 소설가로의 길을 들게 했던 첫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는 온 생애, 춤을 살았던 최승희의 면모를 시적 템포로 강렬하게 그려낸 작품이지요. 단선적인 서술을 버리고, 과감하고 입체적인 시점과 구성으로 최승희라는 인물을 잘 묘파해 내었다는 일단의 평가를 받았고요. 1인칭과 3인칭을 넘나들며 최승희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시대적인 통찰까지 담아내셨는데요. 소설 창작과 시 창작의 변별점은 어떤 것들인가요?
□ 김선우: 소설과 시는 일단 신체가 달라요. 몸이 바뀌어야 하는 일이지요. 저에게 시는 일종의 예술적 엑스터시를 경험하게 하는 일종의 ‘들림’ 상태로 오곤 하는데, 소설은 매일 매일의 일상적이고 꾸준한 ‘엉덩이의 힘’이 필요한 일종의 노동이에요. 좀 단순하게 말하자면 시는 정신 혹은 영혼의 노동에, 소설은 육체노동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를 쓸 때는 ‘피로 쓰라’는 니체적 문장이 매우 관념적인 치열함으로 다가오지만 소설을 쓸 때는 실제로 오늘 하루분의 소설작업이 내 살과 피와 아주 물질적으로 교환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시에 비해 소설은 매우 고단하고 체력이 많이 요구되는 작업이니까요. 그런데 그런 막막한 고단함을 감당하며 일상적인 노동을 하고 있다는 생활인으로서의 쾌감도 있어요. 도저히 끝이 안날 것 같은 이야기들이 어느 날엔가는 끝나 있거든요. 그것도 내 책상에서!요. 놀라운 일이지요.
많은 분들이 시 작업과 소설 작업의 ‘몸 바꾸기’가 힘들지 않냐고 물어 오시는데, 다행히 저는 등단해 첫시집을 내면서 줄곧 산문과 칼럼쓰기를 늘 해 와서, 시쓰기와 산문쓰기 사이에 그다지 큰 단절감은 못 느끼는 편이에요. 그러니 이미 시집 권수와 산문집 권수가 같고 이제 곧 소설 권수가 같아지네요. 시는 일종의 숨 쉬는 공기 같은 것인데, 저의 경우는 시 작업은 일상적으로는 하지 않아요. 특별한 날, 바로 오늘이다! 하는 느낌이 오는 날들에 몰아서 초고를 쓰지요. 평균적으로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그런 날들이 와요. 그런 날들엔 하루 종일 ‘시를 잘 받는’ 몸 상태를 만들어놓고 매우 비일상적인 시간을 살아요. 그동안 몸에 붙여두었던 ‘시적인 어떤 것들’을 그런 날들에 한 번에 몸 풀듯이 꺼내죠. 한 번에 여러 편의 초고를 만들고, 감이 좋은 날엔 그중 많이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날엔 많이 버리게 되고요. 좀 많이 특별한 시간성을 요구하는 시쓰기에 비해 소설쓰기는 일상인의 자세를 갖게 해 주어서 저는 참 좋은 것 같구요.
■ 김명원: 시 작업과 소설 작업이 바꾸지 않아도 되는 한 몸에서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은 분명 행운이지요. 부러울 따름입니다. 『나는 춤이다』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 『바리공주』를 읽고 한 영화사에서 최승희에 대한 시나리오 작업을 부탁해서 시작되었다면서요. 평양까지 가서 최승희에 대해 취재를 하였다고 알고 있는데, 취재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랄까요, 소설 후일담을 좀 들려 주셨으면 합니다.
□ 김선우: 평양에서는 북의 ‘요원’ 아저씨들과 몇 번이나 말싸움을 할 뻔해서 참느라 애썼던 기억이 남네요. (웃음) 최승희 같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 이런 데서 살아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타깝기도 했고요.
“네 행동은 불경했다.”
“저는, 천황이 왜 고마운지 몰라요.”
“천황은 국가의 아버지야.”
“저는 아버지가 있어요.”
“무엇을 향해 고개 숙인 거냐?”
“나무요.”
“……?”
“아름다웠어요. 춤을 추는 것처럼.”
작은 마녀. 작고 완벽한 빨강. 사이쇼키는 단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나는 아끼던 조선 백자 찻잔을 들어 다탁 위에 놓인 수석 분에 수직으로 내리쳤다. 산봉우리를 닮은 수석의 정수리에 정면으로 맞으며 백자잔이 깨져 흩어졌다. 사이쇼키가 흠칫 놀라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는 천천히 사금파리를 쓸어 모아 다탁의 한쪽으로 몰았다.
“세상에는 한번 깨지면 붙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아름다운 것일수록 잘 깨지지.”
깨진 백자잔의 가장 큰 사금파리를 사이쇼키에게 주었다.
“아름다운 것을 스스로 보호할 힘이 없다면 건방 떨지 않는 게 좋아.”
머뭇거리다가 사금파리를 받는 순간 사이쇼키가 움칫, 손에 힘을 주었다. 베였는가. 흰 사금파리 단면을 따라 붉은 직선을 그은 듯 사이쇼키의 손바닥에서 핏물이 올라왔다. 사이쇼키가 다시 한 번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의 꼭 깨문 입술을 보자 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갑자기 이런 말이 떠올랐다. 사이쇼키, 너는 나를 여러 번 배반하게 될 것이다……. 그랬다. 그때 나는 이미 이런 날을 예감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내 몫인 것이다.
“이해해주세요, 선생님. 저는 이제 막 날개를 갖기 시작했어요. 멈출 수가 없어요.”
나는 신중하게 다음 말을 골랐다.
“지금 조선으로 돌아가는 건 섣부른 선택이다. 조선은 널 키울 준비가 안 돼 있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 제가 조선을, 조선의 무용을 키우겠어요!”
- 『나는 춤이다』 부분
<중략>
■ 김명원: 창작 비법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 김선우: 이게 진짜, 저는 잘 모르겠어요.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르지만, 굳이 꼽아보자면, 시를 몸에 오래 붙여둔다고 해야 할까요. 뭔가 쓰고 싶은 것이 생기면 바로 시로 쓰지 않아요. 그 시상, 혹은 영감들이 문자로 일단 한번 나와 버리면 그 문자에 포로가 되어 자유로운 운신의 폭이 줄어든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문자의 포로가 되지 않게 조심하죠.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몸의 어딘가 붙여두고 오래 익혀요.
어떨 때는 ‘아, 이건 지금 막 쓰면 재밌는 시가 되겠다’ 싶은 영감들이 있는데, 그럴 때도 일부러 한 템포씩 더 느리게 가요. 정말 최고로 잘 익어서 나올 때까지 좀 더 기다려! 그렇게 스스로에게 주문하고 그냥 몸에 붙여두죠. 막 시가 쓰고 싶은 걸 일부러 참아요. 그러다가 ‘그날’이 와요. 그러면 몸 여기저기 붙여둔 시의 씨앗들을 한 번에 막 받아쓰지 시작하지요. 성공적으로 나오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는데, 저마다의 운명이니 어쩔 수 없죠 뭐.
그렇게 일단 언어로 나온 시들은 퇴고할 때 수없이 소리 내어 읽어요. 누군가에게 말하듯이 소리 내어 중얼 중얼거리지요. 일종의 기도 같은 거예요. 기도는 간절한 말인데, 간절한 것을 중얼 중얼거리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고요. 처음 퇴고 할 때는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데, 여러 번 거듭 읽으며 퇴고하다보면 한 편의 시가 구현하게 되는 내적리듬이랄까요. 그 시에 딱 필요한 옷이라는 게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 같아요.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火酒-
싸아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컥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론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하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
- 시 「대관령 옛길」 전문
<중략>
■ 김명원: 시인의 시들에서는 순환에의 사유, 윤회론적 세계관이 발견 되는데요. 본인이 가지고 있는 종교관이랄까요, 궁금합니다.
□ 김선우: 그와 관련해서는 ‘불교신문’에 밝힌 종교관을 부분 인용하여 말씀 드릴게요. 저는 세상의 모든 종교가 그 참된 본질을 궁구하다보면 결국 서로 상통하게 되어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종교의 역할이란 우리가 대자대비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에 눈뜨도록 인도하는 것이니, 그것은 개인의 구복과 발원으로서의 신앙이 아니라 우주의 삼라만상이 평화로운 공존을 이룰 수 있기 위해 역시 하나씩의 우주이면서 더 큰 우주에 연동되어있는 개개인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깨우고 사랑의 실천에 동참할 것인가를 촉구하는 윤리의 문제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그러니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한 구복이나 극락 혹은 천국 같은 사후세계에 대해 확신에 찬 답을 주는 종교에 대해 전 매우 회의적예요.
인연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존재의 기쁨과 슬픔, 지금 이 순간의 행복과 아름다움에 대해 영민하게 깨어있으면서 생활 속의 자비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 개인과 세계의 각성을 도모하려는 자세, 그런 지속적인 노력이 이른바 종교적 수행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는 쪽이지요. 그러니 가끔 종교를 물어오는 독자들에게 저는 비교적 가볍게 대답해요. 저는 특별한 종교가 없다고요. 참되다고 느껴진다면 모든 종교의 성소에 거부감도 없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절집이지만 성당이나 교회, 힌두의 아쉬람 같은 곳에서도 다양한 방식의 기도를 합니다. 굳이 무슨 ‘교’를 붙여야 한다면 ‘대자대비교’나 ‘사랑교’라고 할까요.
제가 이렇게 대답할 때 많은 독자들은 그러므로 김선우는 불교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고개를 끄덕거리지요. 종교 간 배타성이 세계의 갈등을 부추기는 지독한 악영향을 생각한다면 제가 생각하는 가장 매력적인 종교인 불교만큼은 그런 배타성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니까요. 저의 이런 바람은 제가 불교로부터 배운 가장 좋은 것 중 하나이기도 하구요.
사실 저는 불교를 종교로 받아들이기보다 인류가 가진 가장 매력적인 철학사상, 일종의 ‘삶의 태도’로 받아들여요. 불교철학은 지구환경이 직면한 21세기 위기로부터 인류와 지구를 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대안철학으로서의 미래지향성을 가졌다고 느끼구요. 삼라만상 모든 존재 속에 불성이 내재해 있음을 가르치는 불교적 사유는 인간중심주의의 서구적 사유체계로는 도달 불가능한 포용의 세계를 가능하게 하거든요. 인간을 비롯해 동식물 등의 생물만이 아니라 돌 한 덩이 모래 한줌에도 공경의 마음을 촉발시키는 불교적 사유의 윤리성과 문학성, 연기론의 엄정함, 공사상의 어마어마한 순환과 변화의 질서, 이런 것을 곰곰 들여다보고 있으면 제가 태생적으로 불교에 친연성을 가진 인연으로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감사해요.
어릴 적 어머니 따라 파밭에 갔다가 모락모락 똥 한무더기 밭둑에 누곤 하였는데 어머니 부드러운 애기호박잎으로 밑끔을 닦아주곤 하셨는데 똥무더기 옆에 엉겅퀴꽃 곱다랗게 흔들릴 때면 나는 좀 부끄러웠을라나 따끈하고 몰랑한 그것 한나절 햇살 아래 시남히 식어갈 때쯤 어머니 머릿수건에서도 노릿노릿한 냄새가 풍겼을라나 야아- 망 좀 보그라 호박넌출 아래 슬며시 보이던 어머니 엉덩이는 차암 기분을 은근하게도 하였는데 돌아오는 길 알맞게 마른 내 똥 한무더기 밭고랑에 던지며 늬들 것은 다아 거름이어야 하실 땐 어땠을라나 나는 좀 으쓱하기도 했을라나
양변기 위에 걸터앉아 모락모락 김나던 그 똥 한무더기 생각하는 저녁, 오늘 내가 먹은 건 도대체 거름이 되질 않고
- 「양변기 위에서」 전문
밥 잡채 닭도리탕 고등어자반 미역국
이토록 많은 종족이 모여 이룬
생일상을 들다가 문득, 28년 전부터
어머니를 먹고 있다는 생각이
시금치 닭 고등어처럼 이 별에 씨뿌려져
물과 공기와 흙으로 길러졌으니
배냇동기 아닌가,
내내 아버지와 동침했다는 생각이
지금 먹고 있는 닭 한 마리
내 할아버지를 이루었던 원소가
누이뻘인 닭의 깊은 곳을 이루고
누이와 살을 섞은 내 핏속엔 지금…
누대에 걸친 근친상간의 밥상
비켜갈 수 없는,
무저갱의 밥상 위에
발가벗고 올라가 눕고 싶은 생각이
어머니가 나를 잡수실 수 있게 말이지요
- 「숭고한 밥상」 전문
<중략>
□ 김선우: 저마다의 자리에서 저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을 써주고, 그 마음들이 현실로 발현될 수 있도록 뭔가 작은 실천들을 해주는 것… 너무 큰 실천이 아니라 조금만 마음 쓰면 할 수 있는 그런 소소한 실천들을 일상 속에서 소중히 실천하고, 또 그게 창작자들에게 또한 새로운 영감을 주고… 그런 방식의 선순환이면 좋을 듯 해요.
그 풍경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신을 만들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가녀린 떨림들이 서로의 요람이 되었다
구해야 할 것은 모두 안에 있었다
뜨거운 심장을 구근으로 묻은 철골의 크레인
세상 모든 종교의 구도행은 아마도
맨 끝 회랑에 이르러 우리가 서로의 신이 되는 길
흔들리는 계절들의 성장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마른 옥수숫대 끝에 날개를 펴고 앉은 가벼운 한 주검을
그대의 손길이 쓰다듬고 간 후에 알았다
세상 모든 돈을 끌어 모으면
여기 이 잠자리 한 마리 만들어낼 수 있나요?
옥수수밭을 지나온 바람이 크레인 위에서 함께 속삭였다
돈으로 여기 이 방울토마토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나요?
오래 흔들린 풀들의 향기가 지평선을 끌어당기며 그윽해졌다
햇빛의 목소리를 엮어 짠 그물을 하늘로 펼쳐 던지는 그대여
밤이 더러워지는 것을 바라본지 너무나 오래 되었으나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번져온 수많은 눈물방울이
그대와 함께 크레인 끝에 앉아서 말라갔다
내 목소리는 그대의 손금 끝에 멈추었다
햇살의 천둥번개가 치는 그 오후의 음악을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다만 마음을 다해 당신이 되고자 합니다
받아줄 바닥이 없는 참혹으로부터 튕겨져 떠오르며
별들의 집이 여전히 거기에 있고
온몸에 얼음이 박힌 채 살아온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해
빈 그릇에 담기는 어혈의 투명한 슬픔에 대해
세상을 유지하는 노동하는 몸과 탐욕한 자본의 폭력에 대해
마음의 오목하게 들어간 망명지에 대해 골몰하는 시간이다
사랑을 잃지 않겠습니다 그 길밖에
인생이란 것의 품위를 지켜갈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압니다
가냘프지만 함께 우는 손들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을 위해 눈물 흘리는
그 손들이 서로의 체온을 엮어 짠 그물을 검은 하늘로 던져 올릴 때
하나씩의 그물코,
기약 없는 사랑에 의지해 띄워졌던 종이배들이
지상이라는 포구로 돌아온다 생생히 울리는 뱃고동
그 순간에 나는 고대의 악기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태어난 모든 것은 실은 죽어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말한다
살아가고 있다!
이 눈부신 착란의 찬란,
이토록 혁명적인 낙관에 대하여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온갖 정교한 논리를 가졌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옛 파르티잔들의 도시가 무겁게 가라앉아 가는 동안
수 만 개의 그물코를 가진 하나의 그물이 경쾌하게 띄워 올려졌다
공중천막처럼 펼쳐진 하나의 그물이
무한 하늘 한 녘에서 하나의 그물코가 되는 그 순간
별들이 움직였다
창문이 조금 더 열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뾰족한 흰 싹을 공기 중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의 가녀린 입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처음과 같이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2011년을 기억함」 전문
<중략>
■ 김명원: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요, 강릉 시내에서 가까운 교동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지요? 마당에 후박나무와 석류나무가 있는 작은 기와집이라고 산문에서 읽었습니다. 석류가 익어가는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덧붙여 있어서 제가 꼭 그 교동집 석류나무 곁에서 시인과 함께 자란 것처럼 친밀감이 선연했지요. 그만큼 시인의 필력이 섬세하고 감각적이고 수려했다는 이야깁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그 공간에 대한 미담과 시인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려 주셨으면 합니다.
□ 김선우: 교동집에 대한 이야기는 제 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에 수록되어 있는데요. 정말 궁금하신 분들은 책으로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시공간성을 문장으로 만들면서 농축해놓은 무늬들은, 풀어서 그냥 이야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질감의 것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학교와 집에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어가지 않는 모범생이고 내성적인 고등학생이었어요. 집 근처 남자고등학교 앞 향교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었는데요. 온통 남학생들의 무거운 시선을 받으면서 그 길을 지나가곤 했는데, 일요일이 되어 남학생들이 없는 날이면 그 은행나무를 비로소 보러갔지요.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청소년기 특유의 감수성이 저를 배회하게 할 때마다 찾곤 하던 곳은 사천, 사근진, 경포, 강문, 안목, 안인진, 정동진으로 이어지는 동해바다였고요. 동해바다를 찾아 갔던 그런 오후에는 대개 난설헌 생가의 고택에서 하릴없이 소일하며 간간이 찾아들던 낮잠으로 보내곤 하였어요. 제가 살던 교동집에서 초당마을까지는 버스를 타고 내려서도 꽤 걸어야 했던 만만치 않은 거리였지만 난설헌 고택은 제게 쉼터가 되어주고 은밀한 기도처가 되어주곤 했지요.
<중략>
□ 김선우: 이십대와 삼십대는 거의 여행자로 길 위에서 살았던 것 같고, 사십대가 되니 체력이 떨어지는 것과 비례해 여행의 유혹이 많이 줄었습니다. 어딘가 여행을 가도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한곳에 머무는 여행을 선호하구요. 인상에 남는 여행지로는 작년에 출간한 여행에세이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의 배경이 된 남인도의 오로빌을 추천합니다.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해 폭넓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곳이죠. 매우 문학적이고 시적인 곳이기도 하구요.
■ 김명원: 독자들에게 이 봄에 꼭 읽기를 권하는 책이 있다면요?
□ 김선우: 요즘은 간간이 카잔차키스를 다시 읽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야 워낙 유명한 책이지만, 『영혼의 자서전』, 『돌의 정원』 같은 책들도 꼭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시를 쓰는 독자분들이라면 옥타비오 파스의 『활과 리라』 같은 책도 권합니다. 천천히 책장을 넘겨가며 사유를 정리하거나 영감을 받는데 무척 도움이 되는 책들이지요.
<후략>
김선우 시인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강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산문집으로 『물 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의 사물들』,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에세이집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캔들 플라워』 와 어른을 위한 동화 『바리공주』 출간. 제49회 ‘현대문학상’, 제9회 ‘천상병시상’, 2008년 웹진 『시인광장』 제1회 ‘올해의좋은시상’을 수상. '시힘' 동인.
출처- 시인웹진광장